이따금, 무심코 가만히 한자를 들여다본다는 것
「29cm 텔링 가이드」를 쓴 카피라이터 이유미 님이 어느 인터뷰 영상에서 ‘타인이 되어 보는 경험’을 위해 소개한 책이 있다.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 「뭉클하면 안 되나요?」. 편의점에서 나오는 퇴근길 직장인의 비닐봉지가 사각 도시락을 버티지 못하고 비스듬히 기우는, 그 찰나의 풍경에서 주인공은 뭉클한다. 여기서 이유미 님이 발견한 뭉클함의 포인트는 극히 사소한 우리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깊이 바라보고 관찰하며 그 마음이 되어보는 능동적 경험이었다.
뭉클하다는 것. 사전적으로 감정의 순간적 상승, 북받침을 뜻하는 이것을 나도 새로운 취미 속에서 경험하고 있다. 일종의 ‘의미 수집’에 가까울 그것은 문득 나를 멈추게 하는 단어들을 제법 진지하게 마주하는 것이다. 종종 그 단어들은 한자로 구성된 한국어의 형태로, 국어사전과 한자사전을 오가며 기본 의미를 반추한 뒤, 한자 한 글자씩 천천히 그 상형 원리를 따라가 본다. 어떤 글자는 영 의미의 연결성이 시원치 않고 다소 억지스러워서 헛헛하기도 하지만, 어떤 글자는 단박에 직관적인 이해와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로움과 감동을 주어 포기할 수 없는 여정이 되었다.
내가 머무는 도시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잠시 느슨했던 어느 주말, 토이의 노랫말처럼 플랫 슈즈를 신고 예쁜 수첩과 펜을 준비하여 혼자 만의 도시 탐사에 나섰다. 약간의 소나기에 살짝 풀이 죽은 도심의 더위를 틈타, 부지런히 새로 생겨난 공간들을 돌아다녔고 그곳의 사람들을 관찰하였고 물건들을 구매했다. 그리고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탐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아지트로 향했다. 식사 때가 지난 무렵의 부티크 호텔 조식당은 적당히 한적한 디저트 카페가 되곤 했다. 따뜻한 차와 조각 케이크를 즐기며 오늘 관찰하고 수집한 풍경들을 적어나가다 ‘탐사’라는 단어에 멈췄다. 알려지지 않은 사물이나 사실 따위를 샅샅이 더듬어 조사함. 같은 사물과 공간을 보더라도 조금은 엉뚱한 발견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돼야겠다고 스스로의 글 쓰는 이유를 찾던 무렵의 나였다. ‘알려지지 않은’ 것을 향한 거대한 탐사의 정신을 지극히 일상적인 나의 삶에 적용하겠다는 게 모순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글자의 끝을 쫓아가 보았다.
찾을 (탐). 왼편에 손 (수)와, 오른편에 점점 (미)가 합쳐진 이 글자는 한 손에 횃불을 들고 캄캄한 동굴 속을 더듬어가며 점점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었다. 그가 어둠의 공포에 맞서며 그토록 열심히, 필사적으로 찾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외투에서 어느 공장의 소녀를 떠올리던 루시드폴의 노래가 생각나는 잠깐의 전율이었다. 오래도록 살아남아 어느 날 내게로 온 이 글자는 활자 너머에 사람이 있었다. 때로 참 부질없게 느껴지는 나의 사색이, 글을 쓴다는 것이 먼 옛날을 살던 누군가의 절박한 찾음의 행위와 일면 닿아 있음에 마음껏 뭉클해졌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잘 보이지 않아도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게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그 아름다운 갑골문이 어느새 지쳐버린 나를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결국 뭉클함이란 본인만의 미학 기준에 따른 지극히 개인적인 찬미의 순간이 아닐지. 부지불식간에 무한 증식해버린 내 안의 자아들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타자의 등장을 자각하는 것. 그 예민함을 잃지 않는 것. 그가 머물 수 있도록 내 안의 자리를 정리하고 비워내는 이 시간이야말로 거리 두는 요즘의 존재적 외로움을 극복하는 또 하나의 생존법이라 마음속에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