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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yo Aug 02. 2023

처음엔 잘 그려지고, 두번짼 그 느낌이 안날 때

memo 


지난주 강의(크로키클럽3기 두 번째 시간)가 끝날 무렵, 뒷정리하며 마무리하고 있을 때, 어떤 분이 '그리다 보면 꼭 두 번째 그린 게 처음 그린 것보다 별로에요.' 라며 혼자 그릴 때 겪은 애로사항을 꺼내주셨다. 나는 순간 신나서(늘 겪는 일이라, 당신도 겪는다니 너무 반가운 마음에) 정말 너어무 그렇지 않냐며 격한 맞장구를 쳤다. 동지 만난 기분으로 (ㅎㅎ)   


요즘은 대부분의 시간을 새로운 책 작업(뉴 독립출판.언리밋을 앞두고)에 쓰고 있는데, 스케치 해둔 몇 장면을 그리면서 너무나도 단순한 장면이 계속 계속 마음에 안 들어서 짜증이 꽉 찼을 때,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그게 '질문'이 아니라 그자체로 '맞는 말'이라 생각했었는데, 과연 그럴까? 나는 즉흥적이고, 즉물적이라, 콘티 스케치를 늘 두려워했다. 처음 후루룩 풀릴 때의 가벼운 스케치의 느낌을 본 작업에 들어갈 때 결코 뛰어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너무 넘어가 보고 싶었다. 전체의 짜임을 짜면서도, 드로잉의 맛을 잘 살리고 싶어. 나도 콘티란걸 짜보고 싶어. 계획이란걸 하고 싶어. 구성하고 싶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고, 담고 싶고, 표현해 내고 싶어. 물론 즉흥성을 살릴 계획과 구성-나만의 방법-을 더 고민할 필요도 있다. 그치만 한편으론, 


처음 잘 그려지고, 두 번째는 잘 안되는 것이 당연한 것에 머무르면 안 되지 않나? 두 번, 세 번, 열 번을 그렸음에도 처음보다 별로일지라도, 견디고 완성해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의 그 백지의 감각이 과연 내 실력이라 할 수 있나? 그 감각을 끝내 소환해 낼 수 없다면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그저 닫힌 가능성일 뿐 아닌가? 툭, 튀어나온. 열리지 못한 무지의 가능성. 



그림이 처음엔 잘 그려지고, 두 번짼 그 느낌이 안 나는 것. 왜 그럴까?


-가장 순수한 상태. 처음 꺼내짐. 흰 눈 위의 첫 발자국. 맨 처음 그린 그림. (소중히 하되)

-'내가 그리고자 한 것'과 '그려진 것'. 어느새 내게는 두 개의 '상'이 생겨버렸다. 

-나는 너무도 손쉽게 첫 번째 그림의 '상'에 사로잡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 한 장을 그려 놓고, 그것의 좋은 점을 몇 번이고 재현해 내는 복사기 같은 손이길 바라면서, 동시에 앞에서 막혔던 부분을 너끈히 뚫고 갈 창조적인 손이길 바란다. 그걸 동시에 바란다.

-고작 두 번 만에 대작을 하고 싶은 욕심이 났다면, 실력이 늘길 바란다면, 경직된다. 

-내가 그리려던 것, 표현하려던 것은 뒷전이고, 이미 그려진 것에 얽매여, 그 이미지에 갇혀, 나아가지 못한다면 경직된다. 

-그때, 경직됨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왜 안되는지 묻지 않는다면,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계속 시도해 보지 않는다면, 그리면서 묻지 않는다면, 

-영영 첫걸음에서 멈춘 채, 시선만 먼 풍경일지도 모른다. 

-결국,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림들은 계단 순으로 점점 더 높은 순위로 랭크인 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짓수를 만드는 '시도' 들이어야 하는데. 

-그림에 눌리고 있었다... 바짝... 

-'잘' 그려졌어도, 더 '다양하게' 그려 볼 수 있어야 한다. 

-지엽적인 부분 하나를 똑같이 살리고 싶어서 다른 모든 걸 잃는다. 

-가끔 너무 안 풀려서 잠시 누워 있다가, 혹은 밥을 먹고 오거나, 뒹굴거리며 이것저것 보거나, 아예 다음날이 되어 이어서 그리면 또 쓱 잘될 때가 있다. '여유'의 문제일 수도 있고, '시간'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시간. 의식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내 안에서 풀어낼 시간. 무의식의 시간. 

- 그리던 스케치북을 잘 펼쳐둔 채로 돌아가면 된다. 그럼, 하룻밤 정도는 내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그림이다. 

-(그림에선) 모두 내가 가볼 수 있는 선택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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