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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ue Nov 27. 2023

요지경 속 공공건축

건축사사무소 고군분투기

올해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11월 말) 올해 초부터 출퇴근하면서 쓰던 글을 마무리해 보고자 오랜만에 노트를 뒤적여서 그동안 적어오던 글을 찾아냈다.


새해가 되어 이런저런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고자 출퇴근시간에 메모장에 끄적임을 시작해보려 한다.


작년 이 맘 즈음, 공모전을 통해 여러 심사위원(교수 및 각 분야 전문가들)의 심사를 통해 당선되어 계획설계를 막 시작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참으로 다채로운 어려움과 숨이 턱 막히는 갑갑함을 종종 경험했고, 이를 글로 정리해두고 싶어 기억을 끄집어본다.


1. 체계 없는 용감함

2. 국제적이지 못한 갈라파고스 인재풀

3. 전근대적인 계약방식과 관의 구태

4. 지리멸렬한 전문가의 훼방

5. 정치 상황



1. 체계 없는 용감함


재작년 말 즈음 전혀 다른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었을 때부터 해당 프로젝트 일로 가끔씩 불려 가서 번역 및 통역 일을 하고 있었다. 해외사와 협업하는 국제 현상이었는데, 해외사와 계약 마무리가 순탄치 못해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다른 프로젝트에 속해 있던 내가 불려 갔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공모전에 당선되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고, 나는 본격적으로 팀을 옮겨 해외사와 계약 체결 및 디자인 코디네이션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건축을 하면서 영어를 하고 거기에 경험도 많아서 계약 관련 사항들을 두루 이해함과 동시에 국제적인 안목까지 가지고 계약과 프로젝트 조율을 척척 해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업무 당사자가 되어보니 상상 이상으로 답답한 나날들이었다. 국내 여타 프로젝트에서 으레 하던 대로 지방자치 단체가 계약을 체결하는데 필요한 서류를 먼저 처리하고 이후에 조건을 조율하자는 프로젝트 매니저와, 원칙적으로 조건을 모두 조율하고 합의가 되어야 계약에 필수적인 위임장을 보내주겠다는 해외사, 그리고 구시대 관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계약사항과 설계사 의견에는 무관심한 관청 사이에서 골머리를 앓았다.


그다지 관심 가져보지 않았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계약 관련 법 조항들과 보험보증 자료들 그리고 한국의 체계와 영문 법령을 찾아 헤매고, 오역 혹은 lost in translation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끙끙대며 서류들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가끔은 전달하는 나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독소조항(관행대로 내려오던 전근대적인 조항) 들을 찾았을 땐 이를 어떻게 해외사에 설명해야 하나 왜인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일의 선후 관계를 뭉개버리며 진행하는 매니저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안부를 묻고 새해 인사를 나누며 가볍게 시작했던 콘퍼런스 콜이 몇 회 진행되며 점점 전문적인 법률 및 계약의 세부 사항을 다루게 되었다. 그때마다 예전에 했었던 국제현상 및 국제협업 프로젝트 자료들을 뒤적여서 어떻게든 계약서와 위임장을 정리하려는 프로젝트 매니저를 보며 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곤 했었다. 기계적으로 번역을 할 수는 있고 서술하신 내용을 글로 정리할 수도 있지만, 그게 법률적으로 검토가 되었는지, 그리고 법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없을 만큼 번역이 깔끔하게 잘 되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일을 할 땐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 국제변호사나 및 번역공증 외주를 알아보고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씀드리곤 했었지만, 위에서 비용을 아끼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는 우울한 대답만 들었었다.


국제계약 및 분쟁을 대비할 만큼 충분하지 못한 설계비와, 그 작은 파이조차 해외사에 디자인 피로 절반을 떼주고 일해야 하는 우리나라 설계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팔 것이라는 두둑한 뱃심으로 상대를 목마르게 만들 타절 위협을 몇 번 하고 나니, 해외사가 다행스럽게도 우물을 파고 나섰다. 국제 변호사에게 의뢰하여 그동안 나와 프로젝트 매니저가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설명하던 법적 근거와 관행으로 내려온  조항에 대해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2. 갈라파고스식 국제화


건축쟁이들에게 던져주면 알아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몇 가지 질문들이 있다. ‘건축은 예술인가 공학인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 기능, 미 중 무엇인가?’. 정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답하는 건축쟁이의 성향을 알아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내가 저 두 가지 질문에 단답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술을 지향해야 하고, 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주변 선후배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다수는 건축은 예술은 아니며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기나긴 이야기를 촉발하는 질문이라 나중에 다른 글로 정리를 할 시간을 가져야겠다만, 기능을 중시하며 건축의 예술적 성격은 다소 부정하는 성향을 언급하고 싶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동양미학과 서양미학의 차이점, 건축 재료의 차이, 건축 교육 및 그 체계의 차이 등 꽤 다각도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계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 경우와 같이, 현재 일정 규모가 넘어가는 프로젝트의 경우는 공공이든 입찰 제안이든 해외사 초청을 으레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해외 유명 회사의 ‘선진 디자인’을 받아오겠다는 계산인데, 그 의식 저변에 깔린 의식은 ‘국내 설계사는 디자인을 못한다.‘ 가 아닐까? 혹은 해외 유명 디자인 회사를 앞세워 우리 마음속의 사대주의를 자극하는 마케팅을 펼치고자 함일수도 있겠다. 우리나라 설계사가 하는 설계는 미학적 관점에서 해외 유수의 디자인 회사보다 뒤떨어져서 해외사를 초청하는 것인지, 무조건 해외사를 초청하다 보니 우리나라 설계사가 디자인 능력에 중점을 두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다 사실인 것 같다.


나는 인턴을 포함해도 고작 5-6년의 짧은 실무 경험을 했지만, 정말 다양한 종류의 경험을 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 보단 스스로를 어디에서든 비주류라고 느끼는 일종의 자격지심과 비주류로서 비판의식, 그리고 다소 체념하는 마음가짐을 길러온 것 같다. 학부 때부터 개인적으로 기술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았고, 혼자 비주얼 스크립팅을 하며 모델링을 연습하곤 했다. 돌아보면 ‘기술적인 자유’와 그 궁극적인 자유도에서 오는 ‘효율적인 설계’ 방식이 내가 어렴풋이 생각하던 이상향이 아닌가 싶은데, 뉴욕에서 일하면서는 어느 정도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일했었다. 물론 프로젝트마다 다소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주체적으로 동료들과 방법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서로 짜놓은 그래스호퍼 스크립트를 공유하며 방법론적인 것을 만들어가곤 했었다.


해외와 국내 시장은 인재 풀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적절하지 않겠지만, 내가 겪어본 환경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국내 시장은 꽤나 lofi 한 느낌이 강했다. 고전적(?), 혹은 근대적(?)인 디자인 어휘에 고착화된 느낌이 든다. 어느 수준 이상으로 복잡해지는 경우는 ‘외주’를 통해 해결하며, 외주가 여의치 않을 때에는 한두 명의 스페셜리스트에 의존해 일이 돌아간다. 보통 이 ‘외주’는 해외사 혹은 디자인에 자부심 있는 아뜰리에가 되는데 이들은 대체로 technical difficulties를 겪지 않는다. 물론 예시로 드는 환경이 대형 설계사라서 그렇겠지만, 단순히 말해 설계 회사가 디자인을 외주 주는 환경인 것이다. 디자인과 설계는 다른 것인가? 이 주제에 대해서도 다른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 같다만, 디자인이 설계이며 설계가 디자인이다.


같은 듯 다른 듯 오묘한 ‘설계’와 ‘디자인’의 간극 속에서 정작 설계 혹은 디자인에 필요한 테크닉은 모두 외면받는다. 기술 없는 엔지니어링, 미학 없는 디자인 같은 모순 형용이 일어나는 분야가 되어 갈라파고스화되어있다. 다양한 사람이 모두 같이 할 수 있는 쉽고 범용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문화에, 장유유서 성리학이 끼얹어져 나이 드신 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아날로그 방식을 디지털 세상에서 구현하는 1차원 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효율적이고 새롭고 효율적이며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은 구태의연한 방식에 구축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옛 방식을 고집하지만 정작 건축의 최종 납품형태로 이어져오던 ‘도면’마저 외주에 의존하는 것을 보면 장인정신으로 옛 방식을 고수한 다기보단 하루하루를 익숙하게 넘기려는 권태로움에서 구태가 촉발되었다 감히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구태가 비판 없이 이어지고 전승되고 강화되면서, 해외사의 빠르고 효과적으로 작업을 따라가는 것조차 어려운 느낌을 받았다. ‘툴은 툴일 뿐이야.’라는 말들을 하지만 정작 본인들이야 말로 AutoCAD 및 SketchUp 그리고 power point에 고착되어 그 이외의 몇 배는 효율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2D drafting 방식을 21세기에도 고수하고 있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Z 축을 추가하여 모델링을 하는 방식으로는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은커녕 국내 사업 파이도 걱정해야 할 것이다.



3. 전근대적인 관의 행정


공공 프로젝트를 하면서 몇 가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도면 및 회의자료 프린팅과 제본 그리고 도서 배달이었다. 가장 편하고 범용적으로 자리 잡은 pdf 포맷으로 파일 전송을 하고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출력해서 보면 되는 일을, 굳이 차량으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설계사에 떠넘기곤 한다. 설계사에서는 컬러 출력까지 한 번에 맡기면 가격이 과도해지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출력하고, 공무원 혹은 심의위원들이 편히 볼 수 있도록 제본을 맡겼다가 완성되면 다시 가지러 가는 방식으로 서류를 준비했다. 최종적으로 준비된 서류를 봉투 혹은 박스에 담아 시청에 전달하러 다녀오는 식이다. 우리나라가 같이 값싼 노동력이 넘쳐나는 나라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확인하는 최종 결과물이 있기까지 출력물을 만들고 출력해서 맡기고 찾아와서 포장하고 전달하는 일련의 번거로운 과정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에 누군가가 시간과 노력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란다. 각자가 그 부담을 조금씩 나눠가져 본인이 위원으로 혹은 공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설계사에게 대접받으며 프로젝트를 평가하는 방식이 아닌 실제 도움을 주고 기여하려는 마음이 필요해 보인다.


관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새롭게 다가왔던 다른 한 가지는, 관이 생각보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공모를 내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공모 당시 대지는 1차, 2차로 나누어 개발을 할 수 있는 부지였고, 설계사는 최종적으로 개발이 완료된 캠퍼스의 모습을 제안하는 방식이었다. 공모가 끝나고 1차 사업을 시작할 즈음부터 발주처 측에서 프로젝트를 이끌던 TF의 과장은 우리에게 당연하다는 듯 2차 부지의 조경 디자인과 공사까지 떠넘겼다. 과업지시서 상에 과업의 범위로 기재되어 있지 않은 면적이었고, 엄밀히 따지면 공사비 혹은 설계비 증액을 받았어야 하는 추가면적이었다. 때문에 협의 초반에는 회사 입장에서 법률적 검토를 통해 거절을 했었다.


당시 실무자들은 착수신고서류를 꾸려서 제출했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각 참여자들의 경력 증명 및 서명이 된  서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련 서류들을 건축사사무소에서 한 서류로 묶어 제출해야 했다. 제출본을 만들기 위해 각 협력사에 서류를 배포하고 스캔 본을 받아 다시 출력하여 400페이지가 넘은 서류를 꾸려가고 있었다. 해외사에는 왜 개인의 서명이 필요한지에 대해 한참 설명해야 했고 회사 차원에서 개인의 서명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해외사 규정을 긴 설득을 통해 겨우 양해받았었고, 각 부문 대표가 되는 핵심 인원 몇 명에게 서류를 받았었다. 글로 정리하면서도 꽤나 구구절절하게 느껴지는 착수신고서류들을 정리하여 겨우 제출할 즈음에 위에 언급했듯 회사가 2차 부지 설계 및 공사를 거절했었는데, 신청사건립단 과장님께서 서류 보완을 이유로 공문을 보내며 실무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추후 낱장 끼워넣기를 통한 서류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각 페이지에 숫자 도장을 일일이 찍으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 그리고 이미 서류대조필 도장을 찍어 스캔해 온 서류들에 원본 서류대조필 도장을 일일이 다시 찍어 보완하라는 것이었다. 엄밀히 서류를 꾸리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공무원 및 주무부서 더 나아가 해당 지방자치단체인 듯한데, 왜 ‘건축사사무소’ 직원이 이 과정을 수행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겨우겨우 꾸려서 낸 서류를 가지고 회사를 치졸하게 협박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다니 정말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물론 어느 분야든 피할 수 없는 귀찮은 일들이 있다지만, 과장의 횡포 덕에 2년 차 직원은 정말 문자 그대로 하루 종일 서류에 도장을 찍는 일을 했었다.


디지털 그림 파일의 유일성을 NFT로 인정받아 디지털 예술품 거래를 하는 시대에도 스캔된 서류를 다시 출력하고 도장을 일일이 찍어 원본이라고 해야 하는 게 대체 어느 곳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직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결국 회사가 저가로 토목 업체의 조경 부서에게 2차 부지 조성을 덤핑 하면서 과장의 꼬락서니도 잦아들었고 사업 착수가 가능해졌다.



4. 지리멸렬 전문가


‘이건 정말 아닌데 이걸 왜 자꾸 고집을 하지?’

‘이런 건 한국 정서에 맞지 않고 유럽에나 어울리지.’

‘층을 높이고 배치를 바꿉시다.’

‘공자님께서 세상의 흐름을 배우라 했어요!’


제자를 존중하는 훌륭한 교수님이라면 제자가 아무리 무지하다 한들 수업 도중에도 함부로 내뱉지 않을 말들이지만, 경기도의 꽤 큰 지방자치단체 ‘시청사 건립 자문위원회에서’는 경력이 꽤나 풍부한 세계 건축인들에게 이런 류의 밑도 끝도 없는 가르침을 하사하곤 하셨다. 이미 국제 공모를 통해서 진행 안이 결정된 상황에서 자문위원이 과연 얼마나 고민을 하고 설계사에 변경을 제안한 것인지 궁금했다.


공모 심사 당시의 전문가와 당선 이후 시에서 고용한 자문위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공모전 당시 심사위원과는 견해차이가 상당해 보인다.


전문가라면 다른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심사를 거쳐 뽑은 당선 안을 가지고 원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해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지만, 지방대학 카르텔로 작동하는 심의위원 제도에선 요원한 이야기 같다.


당선 안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로그램을 낮게 흩뿌려져서 기존에 지어진 타 시도의 청사처럼 고압적이지 않도록 계획한 것과, 흩뿌려진 건물들 사이사이 위요감을 만들 수 있는 작은 광장 여러 개를 계획하여 시민행사 및 여가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공모 당시 자료 공유와 킥오프 미팅 중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충분히 설명했었다.


‘건물을 통합하고 층수를 올려 효율화가 필요해 보임.’

‘건물의 배치를 변경하여 전면으로 탁 트인 광장 조성 필요.‘

’ 광장의 크기가 작아서 시민활동을 수용하기 충분치 않아 보임.‘

‘시의회 의장보다 시장실의 층수가 낮은 것은 정무적으로 옳지 않아 보이며, 판단이 필요해 보임.‘

‘건물의 배치가 한국의 실정과 맞지 않으며, 특히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빌딩풍이 염려됨.’

‘건물의 북쪽에 있는 광장에 빛이 들지 않을 것으로 염려되니 건물 배치를 재고할 것.’

‘랜드마크가 될 만한 요소가 부족해 보임.’


높고 고압적인 고층건물에서 벗어나 건물 사이사이 아기자기한 공원들을 조성하여 편안한 캠퍼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계획안을 만들었다. 위에 적은 코멘트들은 계획에 대한 심의위원들의 의견이다. 사업부지에서 도보 5분 거리에 거대한 광장이 위치해 있음에도 거대한 광장에 목을 매고, 7-8미터 이격 된 건물 사이에서는 강력한 빌딩풍이 불거라는 근거 없는 말을 하며 디자인을 이렇게 바꿔라 저렇게 바꿔라 하기 시작했다.


6개 건물이 체크보드처럼 어슷하게 배치되어 있어 휴먼스케일에 알맞은 작은 중정들을 확보했던 초기 안에서, 건물 하나를 없애고 높이를 높이고 전면으로 광장을 크게 확보하라는 일방적이며 고압적인 심의 의견에 따라 점점 안이 변경되었다.


가장 황당했던 것은 빌딩풍이 염려된다는 지적에 대해 우리는 해외사 친환경팀의 도움을 받아 CFD 분석을 했고 4m/s 정도의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괏값에 기반하여 바람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방풍림 조성을 하여 불쾌한 바람을 조절하겠다는 조치를 했음에도, 심사위원의 ‘빌딩 배치가 이러면 빌딩풍이 불지!’라는 막무가내 윽박지름에 묻혀버렸다. 유사한 방식으로 건물 북측에 영구 음영지대가 생길 거란 우려에 대해 일조 분석을 수행한 결과를 가지고 ‘적어도 2시간 정도는 빛이 비친다.’라고 설득해보려 해도 본인 말이 옳다며 우리 의견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여러 기술을 사용하여 분석을 해도 들을 마음이 없는 이에게 이를 설명하는 일은 소 귀에 경읽기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며 무식한 의견들을 검토하기 위해 해외사에 협조를 구할 때면 대단히 부끄러워졌다. 일을 수행하기 전 근본적으로 ‘왜?’라는 물음을 중요시하는 해외사 사람들에게 한국식 ’ 까라면 까‘ 분위기를 이해시켜야 했었다. 끊임없이 ’우리는 너희와 같은 의견이지만 심의위원이 의견을 내면 반영할 수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어르고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시스템은 망가졌다는 선배들의 푸념을 눈으로 확인하며 고장 난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아등바등 대던 시기였다.



5. 정치상황


지자체장 선거를 1년도 채 남기지 않은 상황에 시청사 사업이 급하게 진행되었다. 시청사 부지선정에 관한 의견 수렴이 충분하지 않았었던 것인지, 구도심에 청사를 짓는 것에 불만인 의견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을 정도로 급하게 진행된 느낌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진행이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현재는 전임 시장이 되어버린, 당시 시장의 당초 계획보다는 꽤 느리고 더디게 진행되었던 것 같다. 12월 중순에 공모전 제출을 하고 말 즈음에 결과가 나왔고, 우리는 계약을 마무리하고 합사 지를 알아보며 발주처의 요구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위에 적었듯, 계약이 예상보다 많이 늦어졌고 우여곡절을 넘어 4월부터 정식으로 과업 착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계약이 이루어지고 나니 해외사도 적극적으로 협의하고 싶어 하며 방문 의사를 내비쳤고, 방문 워크숍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지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프로젝트 매니저, 디자이너, 한국인 인턴까지 세분이 방문했다. 공무원들과 일정을 조율하여 현장 답사도 가보고, 시청도 방문하여 부시장과 면담도 하고, 현재 사용 중인 청사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사용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잠시였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수없이 많은 콘퍼런스 콜을 하고도 남아있던 아쉬움이 다소 해소되어 갔다.


대지 답사 및 디자인 워크숍을 삼겹살과 소주로 끝마친 이후, 해외사 직원들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고 지구 반대편 8시간 시차에도 이제 제법 한 팀이라는 의식이 피어날 즈음이었다. 지방선거가 끝났고, 연임이 꽤 확실해 보였던 전임 시장은 선거에서 지고 물러나게 되었다.


으레 그렇듯 전임 시장이 진행하던 사업은 숙청 대상이

된다. 내가 속해 있던 프로젝트의 경우는 전임 시장이 상위 단위의 토지이용계획까지 변경했었기 때문에 단순히 용역을 중지했다가 조용히 사라지도록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울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몇 번의 공청회를 거쳐서 결국 사업은 백지화되었고, 잡설이지만, 공청회를 이끌던 좌장은 이후 부시장으로 취임한다. 우연히도 내 학부시절 은사님이셨는데, 교수 시절부터 다분히 정치 입문을 위해 정치 행사에 기웃거리며 학부 생들도 본인 연구실에 소속되어있지 않으면 절대 성적을 주지 않던 정치적인 교수였는데 강렬한 혐오감과 약간의 경외감이 동시에 드는 경험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즈음 다른 기회가 생겨 이직을 결정하게 되어 정확히 해외사와 어떻게 정산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업이 타절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설계비만 100억이 되는 이 거대한 사업도 바람 불면 휙휙 흩날리는 갈대처럼 휘청이고, 정치 논리에 따라 타당성이 정반대로 오락가락하는 것을 경험하며 무기력함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애초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타당성 조사와 사업성 분석 역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으니, 결정권자가 바뀌거나 결정권자의 목적이 바뀌면 타당성과 사업성은 얼마든지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 글을 정리하며


국가기관 발주, 해외사 협업, 심의위원 협의, 주무부처 협의 그리고 급변하는 정치상황 등 다양한 변수들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축과 업무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기억이 더 희석되기 전에 경험했던 것들을 기록해놓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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