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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Dec 23. 2019

역사적인 순간❶

【저 기억 안나세요?】

저 기억 안 나세요?     


  나는 청소근로자다. 15층짜리 건물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다. 내가 맡은 구역은 4층에서 7층이다. 네 개 층에 근무하는 직원은 200명이 넘는다. 나는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한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인 6시에서 8시까지 초벌 청소-전날 내가 퇴근한 뒤에 사용 흔적이 남은 화장실이나 출입문 손자국 등 말이다-를 한 뒤 아침 식사를 한다. 8시부터 9시이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한 개 층씩 꼼꼼하게 청소한다.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 한 시간 동안 휴식시간이다. 그 후로는 퇴근시간까지 잡다한 청소를 한다. 그러니깐 2시에서 4시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는 않다.    


  그날은 4층 사무실과 연결되어 있는 비상구 통로 앞 엘리베이터 문을 닦고 있었다. 4층에 근무하는 기획실장은 워낙 깐깐한 성격이라 엘리베이터 문에 자기 얼굴이 깨끗하게 비치지 않으면 나를 부른다.  

  

-여사님, 안 바쁘실 때 저 좀 보시죠.    


주로 그가 화장실을 갔다 오는 길이다. 나는 잠자코 실장의 뒤를 따라 간다.      


-여사님, 이거...뭐 별 건 아니지만...    


그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 늘 나에게  뭔가를 건넨다. 예를 들어, 치약이나 비누, 핸드크림 같은 것들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손님이 방문하면서 사온 떡 같은 걸 출출할 때 먹으라고 준다.    


-여사님, 엘리베이터에 손자욱이...    


  그는 꼬박꼬박 나에게 여사님이라고 한다. 듣기 싫지는 않다. 모욕감 같은 걸 느끼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하므로 그런 날이면 퇴근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엘리베이터 문을 거울처럼 깨끗하게 닦아놓고 퇴근한다.     



  그날도 핸드크림 하나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 문을 닦고 있는데 낯선 남자가 5층에서 내려와 4층 기획실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 건물의 각 층은 개방형으로 되어 있어서 누구나 아무런 검열 없이 출입할 수 있었다.     


- 팀장님, 팀장님이 전화하셨어요?    


  남자는 사무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여자 팀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법 목소리가 우렁찼다. 기획실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 팀장님이 전화하셨죠? 제가 좀 늦었습니다.    


남자는 여자 팀장앞으로 걸어갔다. 기획팀장이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요?    


했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획팀장 뒤쪽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아직도 그대로 있네. 2년 전에도 제가 왔었잖아요. 저 기억 안 나세요, 팀장님?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기획팀장이 말했다.    


-저는 7월에 발령받아왔는데요?    


-맞는데...내가 팀장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데....    


라더니 남자는 기획팀 옆 예산팀장을 쳐다봤다.    


-아, 팀장님이었나보다. 맞죠, 팀장님? 저 기억하시죠?    


-저도 7월1일자로 왔습니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벽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 이거 제가 닦아놓은 겁니다, 재작년에. 보이세요? 여기, 이렇게 동그랗게 되어 있는 곳이 제가 닦은 거지요. 아직도 먼지하나 없이 깨끗하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한반만 닦아놓으면 2년은 청소를 안 해도 됩니다. 아파트 앞 베란다 뒷 베란다에 흰 페인트 칠해놨죠? 때 탄 거 그거 페인트 칠 할라믄 이삼백은 줘야 됩니다. 근데 이거 하나면 감쪽같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췄다. 뭔가 재미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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