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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먹진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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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가 Nov 20. 2023

추위를 녹이는 칠리 콘 카르네

초겨울 정도겠거니 싶었던 북유럽의 10월은 생각보다 더 혹독했다. 피오르를 보기 위해 도착한 베르겐의 밤은 5도였다. 거침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뼛속이 시리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항구의 거센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이런 날 필요한 건 바로 매운맛인데.


아시아 마켓에서 산 라면은 마침 전날 다 먹어버렸고, 짧은 휴가에 한식당을 가기에는 아직 조금의 자존심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살인적인 노르웨이의 물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래. 그리스에서 사 온 향신료도 많고 여기는 수산시장도 있는데 해 먹자!


베르겐의 수산시장으로 향하는 길, 자그마한 비스트로 카페 하나가 있었다. 


- 되게 예쁘다. 샐러드랑 수프 이런 거 팔아. 빵도 팔아. 저기서 내일 점심 먹을까?


- 오. 칠리 콘 카르네도 있네. 엄청 맛있겠다.


- 그게 뭔데?


- 기다려봐.


욘이 내민 화면을 보니 감이 왔다. 그 미국 스타일 소스! 멕시칸 스타일인가? 하여튼 아메리카 대륙 어디의 가정음식 스타일의 푹 끓인 무언가였다. 오, 해볼 만 한데! 문제는 간 소고기였다. 칠리 콘 카르네는 이름대로 칠리에 고기를 더한 것이었기 때문에. 


- 근데 우리 넙치 살 건데. 고기 안 넣고 하면 안 되나?


- I don't know, but foody Junga know.


푸디정아도 모른다. 그냥 할 뿐. 토마토, 강낭콩, 향신료까지 있으니, 고기 빼도 맛있겠지 뭐 하며 콩 통조림을 사 왔다. 필요한 향신료는 쿠민, 오레가노, 후추. 마침 다 가지고 있다. 칠리 파우더가 사실 핵심이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맵부심 한국인 냉장고에는 항상 매운 파프리카나 고추가 있으므로. 다행히도 노르웨이의 칠리는 매운맛이 강해서 요리에 사용하기에 매우 만족스럽다.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원래의 레시피라면 고기를 굽고 건진 후 그 냄비에 양파를 볶는다. 이후 마늘, 쿠민을 비롯한 향신료를 살짝 볶아 향을 내고 고기와 칠리페이스트, 콩, 육수를 넣고 계속 끓이기만 하면 된다. 이때 옥수수가루를 넣어 농도를 맞춘다고 한다. 


소고기를 넣지 않은 버전으로는 양파를 먼저 볶고 저민 파프리카와 마늘, 쿠민, 오레가노를 넣어 함께 볶는다. 허브향이 올라오면 토마토 페이스트와 콩을 넣고 끓여준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양송이도 함께 넣었다. 이 정도면 Chile con carne sin carne 쯤 되려나. (나중에 알고 보니 채식 칠리도 이름이 있었다. Chili con frijoles - 칠리 콘 프리홀레스). 하지만 고유명사로 많이 굳어져서 그냥 칠리라고도 부른다고. 원래 집 냉장고에 있는 걸로 이것저것 넣는 게 '가정식' 아니던가!


드디어 뜨끈하고 매운 무언가가 완성되었다. 보통 만능소스로 활용할 때는 여유를 오래 두고 충분히 끓이지만 우리는 스튜처럼 먹을 거라 30분 정도만 끓였다. 한입 먹고 나니 이른 추위에 나가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매서운 추위를 녹이는 매운 칠리스튜. 이렇게 하나 또 건졌다.

다음번 급작스러운 추위를 만나게 된다면 좀 더 시간을 들여 끓여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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