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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림 Nov 17. 2023

서른의 우정은 함께일 때에도, 따로일 때에도 존재한다

함께 산을 오르던 친구들이 삼십대가 되자 그동안 즐거웠다며 이별을 고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겨울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가을이 올 것 같아서 단풍이 들기 열심히 기다렸는데. 빨간 물이 제대로 들기도 전에 북서쪽에서 시베리아 겨울바람이 들이닥쳤다. 요새는 사계절이 아니라 여름과 겨울만 존재하는 2계절이라더니.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을이 얼마 있지도 않고 금세 떠나버려서 조금 섭섭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산행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점이다. 첫 번째 산행은 도가니탕을 먹고 인왕산을 한번 설렁설렁 다녀온 것이고, 두 번째 산행은 제법 등산이라고 부를만한 해발 400m짜리 1시간 반 코스였다. 특히 이 산행은 전날 늦게까지 업무를 한 친구가 무리해서라도 가고 싶다는 산행이었기에 내가 친구몫까지 도시락을 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후보 첫 번째로는 컵라면을 생각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뜨끈한 김치사발면 국물을 먹는 것도 꽤 낭만적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몸 하나 간수 못하는 처지에  1L짜리 보온병을 들고 산에 갈 자신이 없었다. 후보 두 번째는 김밥이었다. 김밥은 손으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데다가 야채와 고기를 든든히 먹을 수 있는 한국인의 소울푸드다. 하지만 아침 6시에 출발해야 하는데, 채소와 햄을 볶고 밥에 밑간을 할 여건이 안됐다. 후보 세 번째는 유부초밥이다. 김밥에 비해 밑간과 재료를 손질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적었다. 그러나 탈락이었다. 예전에 한번 만들어봤는데 영 손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유부초밥 하나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편의점이나 근처 분식집에서 포장해 오는 것이 확실히 쉽고 편하긴 했다. 그래도 자존심상 어디서 사오고 싶지는 않았다. 번거롭지 않으면서도 친구에게 정성스러운 간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천천히 고민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미리 정해둔 후보로 30분 만에 간단한 도시락을 챙겨 친구와 둘이서 등산을 시작했다. 가을 단풍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낮은 산인데도 제법 힘이 들었다. 사람 사는 인생을 산행에 비유하기도 하던데 왜 그런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힘들긴 하지만 향긋한 산내음을 맡으며 숲을 둘러보는 묘미가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산행길인줄 몰랐다. 그래서 서른이 되면 답답한 오르막길이 끝나고 너른 평야를 걸어 다닐 줄로만 알았다. 수능이니 취업이니 하는 오르막길도 무척 힘들었는데, 그 너머에는 승진욕심, 결혼준비, 이직준비, 해외발령, 대학원 진학, 아기출산 등의 돌산이 아직 가득 남아있었다.


대학입시나 취업을 준비할 때에는 옆에 있는 친구들이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십 대에는 그 우정이 영원할 같았고, 이십 대의 우정은 추억할 때마다 항상 빛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서른을 목전에 두자마자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친구들이 "나는 저쪽 산으로 가야 해서. 그동안 즐거웠어!" 하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돌산은 내가 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홀로 남아 내가 넘어야 할 커다란 돌산을 바라만 보았다.


바닥에는 먼저 떠난 친구들이 남기고 간 무언가가 발에 차였다. 자세히 보니 그 무언가는 우정이었다. 추억할 때마다 반짝반짝했던 우정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가진 것 중에 가장 흔하고 낡았다. 그래서 어깨에 멘 짐이 무거워지면 가장 먼저 우정을 버렸나보다. 우정 없어도 곧잘 앞으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철없고 뒤쳐진 나는 나만의 돌산을 천천히 올라가면서 아무렇게나 버려진 우정을 주웠다. 좋아하던 친구들과의 우정이었기에 마음이 더 쓸쓸했다. 한때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낡아빠졌나 하면서.


한 번은 친구들과 어렵게 한 자리에 모였다. 평생 바보같은 일로 맥주나 마시며 나른하게 살아갈 것 같은 내 친구들도 하나둘 보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사정이야 다르겠지만 대체로 새 가정을 준비하거나 정해둔 꿈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시간으로 하던 연락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건 당연하고, 주말 약속이라도 잡으려면 티켓팅이라도 하듯 친구의 애인이나 회사 스케줄과 경쟁해야 했다. 한 친구가 우스갯소리로 친구관계를 새롭게 정의해 주었다. 서른부터는 한 친구를 1년에 2번 이상 만나면 절친이라고 말이다.


함께 시간표를 짜고 공강시간마다 동아리방에 모여 웃고 떠들던 시간은 벌써 추억하기에도 어렴풋한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때는 교수님 성대모사만 해도 배에 복근 생길 정도로 웃었지만 이제는 내가 전 직장상사 성대모사를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각자의 일터에서 서로 다른 하루를 보내는 우리들이다. 엎친게 덮친 격으로 친구에게 결혼 연인이 생기거나 회사일로 바빠지기라도 한다면 친구와의 만남은 기약없이 뒤로 밀려난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서로의 삶을 공유해도 더 이상은 이해하지 못할 벽이 느껴졌다. 즐거웠던 이십 대 청춘이 벌써 지나가려 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내 주변사람들이 모조리 어른의 세계로 훌쩍 떠나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수암봉 정산에 다다랐다. 며칠 고민한 끝에 내가 싸 온 도시락은 계란 샌드위치와 녹차였다. 준비하는 과정은 이랬다. 등산 전날 영양 가득한 계란 몇 개를 미리 삶았다. 다 삶은 계란을 보울에 넣고 포크로 적당히 포슬거릴 때까지 으깼다. 그리고 등산 가기 30분 전에 으깬 계란에 설탕, 소금, 후추, 레몬즙을 가볍게 섞어 식빵에 발라 가져갔다. 정성스럽지만 그 과정이 대단히 어렵지는 않아서 나도 부담 없이 준비할 수 있었다. 혹시 목이 막힐까 봐 따듯한 녹찻물도 준비했다. 그런데 친구가 전날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다며 녹차는 마시지 않고 샌드위치만 감사히 먹겠다고 했다.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전날 업무하느라 무리한 친구에게 억지로 권하고 싶지 않았고, 친구의 반응에 엄청난 기대를 한 것도 아니어서 크게 상관이 없었다.


서른의 우정은 적당한 거리와 기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상황으로 인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관계. 사는 게 바빠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않는 관계. 계란 샌드위치를 싸듯 내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녹찻물처럼 거절당해도 아무렴 괜찮은 관계. 십 대 때 기약했던 영원한 우정은 좌절되었다. 이십 대의 빛나는 청춘도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서른의 우리는 한층 더 생각이 깊어지고 신중해졌다. 언제까지고 내 옆에 단짝으로 남아있어줄지 모르니까. 함께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되,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안다.


가을산을 보며 선선한 바람과 함께 계란 샌드위치를 먹은 게 2주 전인데, 오늘은 벌써 첫눈이 왔다고 한다. 우리의 알록달록한 계절은 금방 지나가고 곧이어 서른의 하얀 겨울이 올 것이다. 따사로운 가을햇살이 지나가면 갑자기 불어온 겨울바람이 뼈시립게 차가울 수밖에 없다. 춥고 힘들겠지만 달라진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그저 달라진 계절에 맞춰 두꺼운 옷을 껴입어야할 뿐이다. 그러니 나는 친구에게 만들어주는 샌드위치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의미를 다하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웃으며 배웅하고 싶다. 그러니 반년에 한 번, 1년에 한 번, 그러다가 카톡으로 안부만 주고받는 사이가 될지언정 우울해하거나 쓸쓸해하지 않으려 한다. 서른의 우정은 함께였을 때에도, 따로 있을 때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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