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정규직으로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두꺼운 310g짜리 명함에 박힌 내 이름 석자와 마케터라는 직함이 꽤나 자량스러웠다. 10시까지 매일같이 야근을 하면서도 택시 타고 퇴근하는 길에 SPSS 자격증을 공부할 정도로 나는 내 업무에 진심이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신입'뽕'은 채 한 달을 가지 못했다. 1년간의 취업 준비 끝에 들어간 회사는 실제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과 거리가 멀었다. 잦은 회의와 출장으로 인해 밀린 업무를 하느라 12시가 넘도록 회사에 남아있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가끔 야근식대로 나가서 저녁이라도 먹자는 팀원들과 동기의 권유도 있었지만 에둘러 거절하기 일쑤였다. 밥먹는 걸 뒤로 할 정도로 나는 집에 가고싶은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있다 보니 하루는 회사에서 포상이라며 팀원들에게 봉투를 하나씩 줬다. 20만 원 짜리 코스요리가 나오는 레스토랑 식사권이었다. 청담의 어느 근사한 레스토랑까지 법인차량인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들어갔다. 발레파킹을 받고 들어가니 미리 연락을 받은 셰프가총 1시간 동안 진행되는 코스에 대해 설명했다. 음식이라면 아무거나 다 잘 먹는 나지만, 내 눈앞에 있는 화려한 요리들이 정말 맛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기억나는 음식은 푸아그라였다. 고소하고 사르르 녹는 식감을 느끼며 왜 푸아그라가 세계 3대 진미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다만,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나의 소화력이었다. 회사 다니는 내내 장염과 위염을 번갈아가며 달고 다녔던 나의 몸뚱이는 이 기름지고 푸짐한 상차림을 견디지 못했다. 먹고자 하는 욕심은 끝이 없는데 코스요리가 끝없이 나왔고 배가 끊임없이 아팠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쯤에서 양을 조절하며 먹거나 상을 물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회사를 위해 고생했다는 의미로 주어진 이 포상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받아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길고 긴 코스요리가 끝나고 집을 향했다. 올 때는 벤츠를 타고 왔는데, 갈 때는 차편이 없어서 그냥 걸어서 지하철을 탔다. 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개찰구 옆에서 커다란 전신거울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아침에 급하게 말리는 바람에 그대로 뻗친 잔머리와, 뺨까지 타고 흐르는 눈밑 다크서클 두줄이 보였다. 방금 20만원짜리 식사를 한 사람이라고는 보기에는 심히 지치고 추레해보이기까지 했다. 소화되지 않아 불룩한 윗배를 아래로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푸아그라를 만들기 위해 살찌워진 거위는 내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고급스럽고 윤기 나는 푸아그라는 사실 악명이 높다. 푸아그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거위의 입에 사료를 강제로 주입해야 한다. 그러면 거위의 간이 스트레스로 비대해지고 지방이 쌓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푸아그라다. 나의 회사생활은 마치 이 푸아그라와 같았다. 휘황찬란한 빌딩숲 속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나도 푸아그라처럼 고급진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기름지고 윤기 나는 직함을 유지하려면 내 시간과 청춘을 갈아야만 했다. 아플 때에 못 쉬고, 피곤해도 해내야만 했다. 취업을 준비하던 1년은 자기소개를 빙자한 소설만 썼고, 취업을 하고 난 뒤 1년은 대표이사가 쓴 것처럼 인터뷰 대본을 대필하거나 없는 일을 있었던 것처럼 보고서를 지어 썼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정작 내 글은 한 자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2,000원짜리 김밥 한 줄만 먹어도 행복한 사람인데 굳이 소화도 못 시키는 푸아그라까지 먹어야 하나 싶었다. 지금껏 해온 것이 아깝지만 내 인생을 내 의지대로 영위하고 싶었다. 먹고 싶지 않은 먹이를 억지로 먹으며 만들어지는 푸아그라보다는, 김밥처럼 원하는 재료만 넣고 예쁘게 말아 한입에 먹기 좋게 썰어먹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뒀다. 물론 갈수록 야위어가는 통장 잔액을 보면 종종 회사생활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럴 때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위장을 채우고, 가벼운 운동으로 체력을 키우고, 눈에 들어온 책을 펼쳐 마음의 양식을 쌓는다. 내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 인생도 건강히 살찌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