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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n Hyejin Kim Sep 30. 2020

엄마와 아이의 공통 인생 단어, 'Silly'

‘I am so silly.’ 

3살인 그녀의 인생 단어는 ‘silly’다. 영한 사전에는 ‘바보, 어리석은, 얼빠진'으로 나와있지만, 통상 아이에게 많이 쓰는 이 단어는 ‘귀엽고 천진난만한, 웃기는’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어린이집과 유아원에서 보내준 아이의 사진은 silly라는 단어에 맞게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고, 선생님들은 아이를 class-clown이라고 불렀다. 반에서 농담 잘하고 다른 친구들을 웃기면서 주목 받는 아이다.


반면 나는 진지하고 경직된 자세로 시스템에 순응하며 공부만 하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 말씀 안 들으면 세상 끝나는 줄 알고 농담 같은 것은 해 본 적도 사람이었다. 공부를 잘 했지만 친구들은 나를 바보라고 불렀다. 물론 그것도 나와 아주 친한 친구들만 그렇게 대 놓고 부를 수 있었다. 돌아보면 내 자신에 자신이 없어서, 내 낮은 자존감이 드러날까봐 누구도 나를 농담 대상으로 삼지 못하게 했었다. 


이런 엄마가 선생님한테 아이가 ‘silly’하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가 1살도 안 되었을 때 얘기다. 대충격이었다. 영한사전을 다시 찾으며 내 아이를 욕했다는 생각에 ‘그런 얘기는 안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던 밤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내 아이에게 딱 맞는 단어로 칭찬을 해 준 것이었는데, 무식한 엄마라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나이가 어리지만 이미 아이의 성향은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아이는 생후 3개월부터 어린이집 생활을 해서 사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도 정의할 줄 알고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지도 알고 있었다. 걸걸한 목소리로 목을 긁으며 ‘헤헤헤헤' 하는 웃음소리를 내고 선생님들은 웃으며 그걸 따라하고 ‘evil laughter’라고 불렀다. 사진을 찍으면 온갖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장난감을 원래 쓰임과 다른 방법으로 가지고 놀았다. 룰을 깨고, 음악에 맞춰 어설프게 리듬을 타고, 친구들을 웃겼다. 하교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가면 아이의 친구들은 ‘Charlie is so funny’하며 아이와 함께 깔깔 웃었다. 집에 돌아오는 차에서 내가 질문들을 쏟아내면 - 이를테면 ‘오늘은 뭘 배웠어?’, ‘누구랑 재밌게 놀았어?’, ‘밥은 잘 먹었어?’ 같은 -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silly했는지, 오늘은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를 얘기했다. 자신의 silly함이 유독 돋보였던 날엔 스스로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손을 이마에 몇 번이나 갖다댔다. 


아이의 silly함은 집에서 놀 때도 자주 드러났다. 완벽주의 엄마는 놀 때도 아이가 뭔가 배웠으면 좋겠고, 유심히 관찰하면서 어떤 점이 부족한지만 찾는다. 하지만 아이는 원숭이다 (실제로 원숭이의 해에 태어난 원숭이띠다). 뭐 하나 딱딱 내 맘에 들어맞게 하지 않고 마이웨이로 놀면서 엄마를 놀려먹는다. 여러번 읽어서 아는 책의 퀴즈도 일부러 틀리고, 틈새를 노려 글자를 가르치려고 하면 빠르게 눈치채고 다른 주제로 넘겼다. 조금만 분위기가 진지해지면 다른 게임으로 넘어갔다.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됐다. 아이 또래 다른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쓰고, 문장을 말하고, 꽤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면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내 아이는 뭘 배우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이가 제일 신나할 때는 열심히 만든 걸 다 부술 때, 거의 다 끝난 퍼즐이나 레고를 다시 흩트려 사방으로 날릴 때, 몸으로 놀 때, 스노우 같은 어플이 자신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줄 때, 아빠와 같이 엄마를 놀릴 때이다. 늘 진지한 내가 아이의 silly함을 보고 빡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배에서부터 나오는 웃음으로 자지러지게 깔깔깔 웃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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