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죽었다
어릴적부터 나는 남들을 가르치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초등선생님이 여자직업으로 젤 좋은 직업이라고 들으면서 컸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세상살이에 꽤 보수적이었다. 광역시로 이사를 오고 나서도 사고방식은 꽤나 옛스러웠다. 친구들이 진로와 이성에 대해 고민할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무척 단순하기도 하고 관심없는 일에는 곁눈을 두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고민이나 진로에 대해 깊이있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관심대상이 아니었고, 처음부터 초등선생님으로 태어난 사람처럼 교육대학교에 진학을 했다.
대학생활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지루했다. 어떻게 그 심심한 4년을 버텼는지 놀랍다. 배울 것도 많았고 늘 분주했지만 딱히 몰입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 사명과 비전이 훌륭한 교육정책 입안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22세가 되던해 졸업을 하고,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그해 9월 발령을 받았다. 대학생활 못지않게 교사생활도 늘 분주하고 정신이 없었다. '나'는 막연히 뜬구름 속에 살고 있었다. 나의 존재가치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
김형환대표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꿈부터 꾸지 마라" , 내가 이 말을 20년 일찍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아쉬움 또한 삶의 여정이라 생각한다. 나는 내가 누군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사명은 무엇인지 모르면서 늘 꿈만 꾸고 있었다. 그 꿈이라는 것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과에 집착한 것이라 나는 늘 공허했다. 석사와 박사를 거쳐 30대 중반에 학위를 얻었다. 박사후과정(post-doctor, 포닥)을 준비하던 중, 그제서야 '이 길이 내 길인가?' 라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긴장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보기 시작하자, 온 몸에서 근육통이 시작되었고, 뜬 눈으로 지새는 날이 계속되었다.
인생에는 늘 전환점이 있다. 터닝포인트, 그것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우연히 갑자기 내 삶의 관심축이 바뀌게 되었다. 마이너스통장의 대출잔고를 확인하고, 재테크와는 거리가 먼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상거지!' 그때 내 마음속에 떠올랐던 단어다. 머리는 굵어졌지만 통장은 텅 비어있었다. 유학준비, 학회지논문게재, 원서책값 등 지금 생각하면 절대로 지출하지 않을 분야에 쓸데없이 돈을 퍼붓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환상에 빠졌었고, 현실감각없는 공부벌레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 내 주위의 선배들을 보게 되었다. 닮고 싶은 사람, 롤모델로 삼을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살면 나도 저들처럼 되겠구나!" 사는게 딱히 잼있지 않았다. 30대 중후반부터는 학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과 모임, 세미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물론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 손에 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지만, 괜시리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 내 삶에서 ' 그 시간은 참 아까웠다' 싶은 것이 석박사를 한 것이다. 그 시간과 돈을 다른 곳에 썼다면 더 가치있는 성과를 냈으리라. <<학교는 죽었다>> 를 집필한 에버레트 라이머의 충고를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후회가 남는다. '대학은 죽었다.' 그런 현실을 피부로 느끼로 해 준 사람이 현재의 000 교육감이다. 나의 연구점수를 제도적으로 0점을 만들어 준 덕분에 미련없이 학교를 떠날 수 있었다. 교육은 정치와 분리되어야 함에도, 가장 정치적인 사람들이 교육감을 하고 있다. 똑똑한 교사(?)가 필요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말 잘 듣는 교사가 필요할 뿐이다. 정치적인 교사들이 권력을 잡는 시대다.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최근 유명 정치인 자녀의 부정입학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여전히 법적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대학 졸업장은 언제부터 변질되기 시작했나? 다양한 인재를 발굴한다는 명목으로 학생부 종합전형, 학생부 교과전형, 논술전형으로 수시입학의 기회를 열었다. 여기서 틈새 비리가 시작되고 부모의 능력(?)이 자녀대학진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 나는 객관식 5지선다형 시험으로 대학을 진학했고, 임용고시도 객관식 시험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다양성이 공정성은 아니다. 나는 다양한 재능을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공정한 시험으로 늘 다음단계를 밟았다. 유명한 부모를 가지지도 못했고, 부자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학진학과 진로시험, 학위시험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다.
"오늘까지 명퇴서류 제출마감입니다.
관심있는 선생님은 연락주세요"
이 메시지를 받아본 순간, 단 5초의 고민도 없이 명퇴를 결정했다. 어쩌면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최선을 다했고 후회없이 근무했다. 그것으로 족하다. 공교육의 제도 속에서 성장의 한계를 느꼈기에 결단을 한 것이다. 더 크게 성장할 시장으로 나아가리라. 코로나덕분에 온라인교육사업으로 수익화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10년이상 축적된 투자노하우를 통해 경제적 자립을 원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프리랜서, 1인기업, 소상공인, 중소기업 이 분야는 적자생존이다. 시장경제논리에 따라 수익이 발생한다. 나의 성과가 고객의 나무에서 열리는 시장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성과를 기록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 게 무척 행복하다.
"그 좋은 직업을 왜 그만두셨어요"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직업의 뜻은 방학이 있고, 일찍 퇴근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며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것이다. 근데 나는 이 항목에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았다. 방학때 연수, 세미나 참석하느라 늘 바빴고, 야근하는 날이 더 많았으며,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주경야독처럼 공부랑 직장, 자기계발과 직장 이렇게 늘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느냐! 이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고 싶다.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하고 싶다. 비합리적인 제도속에 나를 끼워넣고 성장의 한계를 정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내 사업은 종류가 다양하다. 사람들은 한가지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고 강요했다. 나는 일단 시작하고 나중에 고민하는 스타일이다. 재테크노마드창업스쿨(이하 재노스쿨)을 만들고 사업자명과 스쿨이름이 달라서 톡채널 비즈니스 승인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속상했다. 첫 좌절을 맛봤다. 드디어 재노스쿨 상호명의 사업자를 올 8월이 되서야 만들게 되었다. 홈페이지 제작도 완료하였다. 이제 드디어 재노스쿨이 체계화되는 느낌이다. 최근에는 3p자기경영연구소에서 업무매뉴얼 제작, 오피스정리력을 배워 적용해보고 있다. 이재덕마스터님과 윤혜성, 홍지숙, 유미정, 권혜란선배님들께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나는 학교를 떠나 학교를 세웠다. 이 곳은 학력보다 실력이고, 실제적 경험을 통해 수익화를 만들어내는 학교다. 나는 재테크성공파트너다. 고객의 자산을 배가시키는 것을 돕고 있다. 이제서야 나의 존재가치를 깨닫고 있다. 오늘은 더샵 일산 엘로이 줍줍에 성공한 평생VVIP회원이 계약을 하러 간다고 연락이 왔다. 마치 내가 당첨된 것처럼 기쁘다. 전용 20평 이상의 아파트형 오피스텔이 인기있는 시대다. 전매가능한 단지에, 주택수 상관없이 대출이 가능하다. 투자는 시대에 따라 바뀐다. 재노스쿨에서 자산을 배가시키는 고객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