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부지의 고향인 청산도에 선산이 있습니다. 가는 길이 멀어 발인은 내일 밤 12시에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나는 ‘호로새끼’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배가 고팠고, 졸음이 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난 그런 놈이었다. 액센트를 타고 짐 가지러 집에 갔다가 10분쯤 눈을 붙였고, 육개장과 편육은 맛이 좋았다. 3일장을 버티려면 술은 조금만 먹으라고 선배들이 말했지만 소주도, 맥주도 맛나서 이 자리, 저 자리 옮겨가며 퍼 마셨다.
조의금 봉투를 꺼내 돈을 세고, 새벽 4시쯤 바닥에 누워 거꾸로 사진 속 아부지의 얼굴을 봤다. 나보다 한 살 많은 33살 멋쟁이 형, 포마드를 발라 윤기가 자르르한 2대 8 가르마, 짙은 눈썹, 쌍꺼풀 선한 살짝 들어간 눈, 솟은 광대, 의외로 갸름한 입술….
무엇보다 멋쟁이의 상징인 하얀 양복은 청산도 촌놈을 해양대학교 나온 원양 선장으로 바꿔 놓았다. 1972년 원양어선 떠나기 전, 갓 난 선영이 누나를 엄마가 안고 행님, 큰 누나와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마도로스의 꿈을 안고 떠난 33살 젊은이의 양복이, 35년이 흘러 68살 할아버지의 수의(壽衣)가 됐다.
오전 10시쯤 장례식장 관계자가 입관한다고 가족들을 불렀다. 지하실로 들어섰다. 망자들이 잠깐 머무르는 아파트처럼, 스테인리스 사각 냉동고가 촘촘했다.
아부지는 트렁크 팬티를 벗고 노란 모시옷을 입고 누워 있었다. 냉장고 앞에서, 냉동고 안에서 꼬박 이틀을 지낸 아부지의 얼굴은 냉동식품처럼 거무튀튀했지만 반질 윤이 났다. 반쯤 뜬 눈이 감기지 않아 장의사는 연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이고~ 아이고~” 엄마의 울음소리가 공명을 울렸고, 모두 울었다. 인영이 누나가 아부지 얼굴을 쓰다듬자 겨우 감겼던 눈이 살짝 떠졌다. 다시 관자놀이를 눌렀고, 감겼다 떴다를 반복하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장의사가 “마지막으로 인사하세요”라고 말하며 수의 모자를 씌웠다. 나는 “아부지 잘 가시오”라고 말했고, 식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훗날 돌이켜 보니 그것이 아부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땅에 묻기까지는 아직 많은 일들이 남아 있었지만, 아부지의 얼굴은, 그 순간이 마지막인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알았다면 껴안아 비비고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미처 몰랐다.
둘째 날 저녁은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친척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여러 차례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서둘러 장례비 정산을 마치고 밤 12시에 버스에 올랐다. 같이 내려갈 친척들이 많아 45인승 관광버스를 빌렸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다란 리무진 차량은 청산도가 너무 멀어 일정상 오지 못했다. 아부지가 누워있는 관을 버스 아래 짐칸에 싣고 그 바로 위 자리에 내가 앉았다. 아부지 배 위에서 잠자고, 발 비행기 탔던 3살 때를 떠올리며 나는 그 위에 앉았다.
전화기가 울렸다. “형 어디세요? 밤 새려고 집에 들렀다 지금 왔는데, 지하 1층 201호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요” 친한 동생 광수였다.
“응, 청산도가 멀어 일찍 출발했어.” “정말요? 여기 서성이는 형 친구 같은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 전화오겠지, 와 줘서 고마워, 잘 모시고 올게.”
버스는 밤새 달려 새벽에 완도 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추적추적 비가 왔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자는 사람도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이런저런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를 두드려 사람 숫자대로 우비를 사 왔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청산도 가는 '삼영호'
첫배가 뱃고동을 울렸다. 아부지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청산도 배가 비와 파도를 갈랐다. 엄마는 여객실 바닥에 옆으로누워나즈막히 읊조렸다. “그라고 가고 싶었던 고향으로 죽어서 가네~ 죽어서 가네~.”
약 한 시간이 흘러 도청리 방파제가 보였다. 선창에는 서울까지 올라오기 힘든 친척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버스가 선창에 들어서자 순진 고모가 차 옆구리를 두드렸다.
“아이고, 무심한 어른 놀보야, 너 뭐하러 이리 빨리 가냐? 아이고 원통해라 오빠야, 너 뭐하러 이리 빨리 가냐? 먼저 간 행님네 보러 가냐, 엄마 아부지 보러 가냐, 아이고 놀보야, 놀보야~”
청산초등학교 뒤편 선산은 이미 만석이었기 때문에 약방 큰 아부지가 사놓은, 지리가는 길 언덕 위 밭에 아부지의 묏자리가 결정됐다. 아부지는 생전에 그 곳을 마음에 들어했다. 바다가 보여서였을까?
철수 할아버지가 인부들을 불렀고 마을 어른들도 모자와 수건을 둘러쓰고 산을 올랐다. 전날부터 포클레인이 길을 텄지만, 농사를 안 지어 나무와 긴풀로 메꿔진 산은 울창하고 위험했다.
이미 파 놓은 구덩이 주변을 약 30명 정도가 둘러싸았고 요란한 통곡 속에 아부지의 관이 제자리로 들어갔다. 자식과 조카들이 한 삽씩 덜었다. 돗자리에 차려진 제삿상에 술을 따르고 절을 하고, 곧이어 제문을 읊었다.
“고무래 정(丁)씨 금성파 42대 손, 학생(學生) 두진~”
땅으로 돌아가는 아부지를 마지막으로 봤다. 인부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흙을 덮었고, 그 위로 떼(잔디)가 올려졌다. 사람들은 원을 그리며 땅을 밟아 단단히 굳혔다. 맷둥 바로 옆 업자들이 걸어 놓은 새끼줄에는 저승가는 노잣돈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정신이 없었다. 그냥 스쳐가는 풍경을 천천히 빙~둘러봤고, 반쯤 감긴 눈에 지리 바다의 하늘이 비췄다. 그 하늘위로 어릴적 내 손을 잡고 선산에 올라 조상님들의 맷둥 하나하나를 설명하던 아부지의 모습이 뿌려졌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냥 어금니를 살짝 깨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번득 정신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이 생각나 주섬주섬 가방을 찾아 열고, 집에서 가져온 아부지의 ‘틀니’를 꺼냈다. 맨질맨질 윤나는 아부지의 이빨을 옷자락에 슥슥 문질렀다. 아부지는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칼주름 잡힌 백바지를 즐겨입던 멋쟁이였기 때문에 한 치도 소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스댕으로 만들어진 아부지의 밥그릇으로 맷둥 머리맡을 50센티미터 쯤 팠다. 오른쪽 눈을 왼 손가락으로 천천히 비비며 고개를 반쯤 기울인채 틀니와 밥그릇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