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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거운물 찬물 Aug 14. 2019

<옥케이, 벨라이스>2부 엄마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청산도 처녀는 시집가기까지 쌀 ‘서 말’을,
여서도 처녀는 쌀 ‘서 두’를 못 먹는다.
- 남도 속담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청산도(靑山島)
남해의 섬,
뭍에서 떨어진 은하수처럼 흩뿌려진 섬,
그 중 사람이 사는 “섬” 청산도가 있다.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하며,
우리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5분 50초 롱테이크(Long take)를 촬영한
<서편제>의 당리 황토 “길”
소리꾼 유봉의 의붓딸 송화와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던 길.

삼다(三多)의 제주가 지척이라
바람, 물, 여자가 많고,
거친 땅, 모진 해풍, 산이 많아,
뱃일 말고는 퍽퍽한 가난의 섬 “청산도”


#1947년 : 일곱 살 영님이 

     

     왜 갈락은 안 된다요?


일곱 살 영님이는 아침밥을 제일 먼저 먹고, 국민학교 운동장에 가서 아이들과 흙장난을 하고 놀았다. 그러다 9시가 되면 같이 놀던 아이들은 교실로 들어가고 영님이는 혼자 남는다.


가끔은 몰래 복도에 가서 창문 너머로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교실 안에막(남자)들의 까까머리가 촘촘했고 갈락(여자)은 거의 없었다. 영님이는 교실 안 아이들이 너무너무 부러웠다.


“아부지, 지도 학교에 보내주면 안 될까요, 왜 갈락은 안 된다요?”


학교를 보내달라 졸랐지만 동갑내기 조카 상기까지, 애들이 열댓 명이어서 계집아이까지 학교 보낼 형편이 못됐다. 다행히 국민학교가 끝난 교실에서 오후에 열리는 2년제 공민(公民) 학교를 다니며 한글과 산수를 배울 수 있었다. 13살 많은 언니 영례는 이마저도 배우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친구들이 빠진 운동장에서 소꿉놀이라며, 큰 돌을 애기처럼 업고 다니다가 넘어졌다. “쩍~!”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 엄지에 번개가 쳤다.


입은 크게 벌어져 있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숨을 실 수도 들이마실 수도 없이 시간이 멈췄다. 얼마 후 큰 울음소리가 영님이의 고막을 찢었고, 실눈을 뜨고 천천히 곁눈질로 오른손을 봤다. 엄지는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고, 살갗이 벗겨져 흐른 피와 흙이 범벅이었다. 7살 영님이도 알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왼손으로 오른손을 부여잡고 허리를 반쯤 수그린 채 울며불며, 집으로 가는 도청리 1구 언덕을 올랐다. 어른들이 밭일 나간 집은 텅 비어 있었고, 홀로 대청마루에 웅크리고 한참을 울다가 어머니의 인기척을 들었다.

어~~엄, 마~…

지옥에서 신(神)을 만난 듯 울음이 북받쳤고 당황한 어머니는 영님이를 아주셨다.


“영님아, 어째 그라냐?”
“오메~ 손이 이게 뭐다냐.”


병원이 없는 청산도의 치료는 된장을 바르는 것이 전부였다.


훗날 영님이의 오른손 엄지는 바깥 심줄이 닝깨져 오그라 들었고, 본 궤도로 자란 안쪽 빼딱이 살과 자라서, 결국 90도로 꺽였다. 으스러진 손톱 부근은 왼쪽 엄지 손톱에 비해 짤막하고 두꺼워졌다.

한마디로 짤뚱, 굵은 기억자 '낫' 모양이 됐다.


 그 엄지는 평생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감싸진 , 또 그 위를 손으로 덮여 2중 포장됐다. 손가락에 부목이라도 대서 댕켜놨으면 영님이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여자 영님이에게 손가락은 흉터나 상처가 아니라 한(恨)이 됐다.



#1953년 : 이팔청춘 영님이


     구한말 조선 노새의 '' 김영님


유교의 조선은 망했지만 유교의 제사, 적장자, 가부장 문화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골은 더 했으며 배타고 들어가는 청산도는 육지보다 조선과 20년은 가까웠다.


영님이의 꿈은 청산도를 벗어나 도시에서 사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서 자식 많이 낳고, 평생 농사를 짓는 여염집 청산 여자의 삶이 너무 싫었다.  


“어머니, 나 큰 고모네집 가서 살라요. 애기도 봐주고 밥도하고 그라고 싶어요.”


열네 살 영님이는 어머니를 졸라 목포 큰 고모집으로 식모살이 나가며 청산도를 탈출했다. 그때가 이팔청춘 영님이의 유일한 봄날이었다.


고모집 주인 아저씨는 평소 인사성 바르고 참하던 영님이를 예뻐했다. 방학 때면 광주에서 대학교 다니던 주인집 아들이 내려왔다. 키가 작고 외모는 잘 생기지 않았지만 성실하고 내성적인 오빠였다.


“나가 오랫동안 지켜봤고 니가 맴에 든다. 나 곧 미국으로 유학가니 결혼해서 같이 가자. 아부지도 허락하셨고 니만 좋다면 느그 집에 청혼을 넣는다고 하신다. 같이 가자 영님아.”


어느 날 그가 청혼을 했다.


결혼이요? 생각을 안 해봐쓰라. 전 아무 준비도 안됐고 나이도 어리고…, 난중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스무 살 영님이는 같이 사는 큰 고모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그 오빠가 성실하고 좋은 사람인 건 짐작되었지만, 연애를 해보지 않았고 갓 스물에 결혼해서 아줌마가 되는 것도 주저됐다. 또 부모형제 놔두고 이억만 리 미국 땅에 혼자 가는 것도 두려웠다. 무엇보다 그가 모를 엄지손가락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생각을 해 봤는데 자신이 업쓰라…, 미안해요.”


그 후로 영님이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1963년 : 엄마 영님이


      영님이는 죽고 '엄마'로 태어나다


스물세 살이 된 영님이는 큰 고모애들이 커, 더 이상 목포에 있기 어려웠다. 따라다니던 두진이가 군대 갔다는 소식에 잠깐 청산도에 돌아왔다.


영님이가 온 소식을 들은 두진이의 큰 형 호진은 영님이네 집에 사상 단지(청혼 단지)를 보냈다.


5명의 오빠들과 남동생 모두가 극렬히 반대했다.


“두진이한테 시집보내면 절대 안 돼요. 그놈은 승질이 불같고 술도 원 없이 묵는 '놀보'요.”


“정가네가 뼈대 있는 집안이고 또 행님네도 양반이지만, 두진이한테 시집가면 등꼴 빼 묵소"


그러나 영님이의 아부지는


“여식(女息)의 삶이 다 그란거다. 두진이가 어른 그렇게 되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고생하며 승질이 급해진 것이다. 내 보기엔 불량하지 않고 어른 공경하고 주위 사람 챙길 줄 알더라”며 결혼을 허락했다.  


조선의 관례는 사상을 받았는데 거절하면 앞으로 안 보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영님이는 청산도를, 두진이를 피해 목포로 도망쳤지만 결국 그 자리로 돌아왔다.


“새벽 배를 타고 도망칠까, 어디로 가야 하나, 뭍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목포 큰 고모밖에 없는디….”


그때는 여자 혼자, 그것도 처녀 혼자 살아가기에는 세상의 손가락질이 심했고, 위험했다. 영님이는 며칠 밤을 새우며 고민하다가 “손가락도 이런데…”하며 ‘운명’을 받아들였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두진이와의 혼례가 치러졌다. 하얀 한복에 손수건만 한 면사포를 두르고 친정집 앞마당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배경인 풍병은 친척들이 들고 서 있었다.


첫날 밤 두진이가 영님이의 손을 처음 봤다.


“손꾸락이 어째 그라냐, 어렸을 때부터 봤는데 몰랐다.”

“애기 때 돌막에 찡겼어요….”

“오메 어짜끄…, 아팠것따.”


며칠 후 두진이는 복귀하고 남편 없는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셋째 며느리 영님이는 새벽부터 우물가서 물 르고 나무 떼서 밥하고 국화리·풍맛골·청계리·신흥리로 땔감하고 돌아와, 밭일하고 거름 나르고 또랑에서 빨래하는 중노동을 했다. 청산도 여염집이 그렇듯, 하루도,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덕대(덩치) 크고 타고난 성질도 사나운 여자였으나 남편을 억울하게 보내고 더 억척스러워졌다. 욕지거리는 기본이고 며느리에게 손찌검도 서슴치 않았다. 본래 큰 형님이 있었는데 시아부버님 군대 갔을 때 애 업고 친정으로 도망갔다는 것이 이해됐다. 나이차이 많이 나는 큰 성님과 저금(독립)난 둘째 성님의 시집살이도 혹독하긴 마찬가지였다. 반면 영님이네 친정은 20명이 넘는 대가족이었으나 형제간의 우애가 좋았고, 욕 소리 나일이 없는 소문난 양반집이었다.

  
아부지가 자식 아홉을 두고 자살한 집의 살림은 짐작이 갔으나, 친정집에서 나름 유복하게 자랐던 영님이는 혼란스러웠다. 장깡(장독대)에 있는 얼마의 쌀은 제사를 위한 것이었고, 점심은 언제나 감자 두 덩이였다.

  

“왜 점심을 안 묵냐?”


“가슴이 시려 못 묵꺼써요. 어머니 더 자시요.”


무심한 시어머니도 영님이가 점심을 굶는 것을 알았고, 가끔씩 식은 밥 한 덩이를 내어 주었다. 팔순이 된 영님이는 지금도 감자를 먹지 않는다.
 
예배당 길 옆 우물에 가는 어귀에서 우연히 친정어머니와 마주쳤다. 일곱 살 때처럼 껴 앉고 울고 싶지만 영님이는 애를 썼다.


“어머니, 잘 지내셨지라, 아부지는 잘 계시지요?”


어머니는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구석으로 영님이를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 그라재…."


"많이 힘들재? 정서방 오면 좀 나아질거여, 시집살이가 다 그란거다.”


모녀는 손을 꼭 부둥켰다. 별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눈물이 비출까 영님이가 먼저 눈을 깜박여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어머니, 고무신이 구멍났는데 돈이 없어요.”


어머니는 몰래 고쟁이에서 쌈지돈을 꺼내 손이 쥐어 주셨다.


몇 달 후 입덧이 났다.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고 시집살이가 고달파 도망치고 싶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며칠을 고민하다 애를 지우러 동부의 야매 의사 장 씨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뭍에 나가 없었고 몇 달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배는 불러왔고 결국 아들을 낳았다.


영님이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자식이라는 ‘궁지’에 갇혔다.


두진이는 제대해 형님의 나가시키배(나무로 만든 어선)에서 일했다. 열 살 넘는 동생이기에 임금의 개념은 없었다. 그래도 어장이 잘 돼 얼마의 월사금(월급) 줬을테지만 두진이는 집에 돈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것이 청산도의 인습이었다. 애들의 등록금은 ‘폼나게’ 아부지가 주지만 시시콜콜한 먹거리와 생활비는 엄마의 몫이었다. 농사지어서, 바느질해서, 장사해서, 물질(해녀)해서 엄마가 알아서 애들과 먹고사는 것이다. 조선의 그것처럼…


“아따, 참말로 딸이요? 다시 한번 보시오!”


“암만 봐도 딸이다”


둘째 인영이를 낳았다. 첫째 아들이 있었지만 두진이는 역정을 내며 밤샘 술 먹고 다음날에나 들어왔다.

인영이는 쌍꺼풀이 없고 눈이 작아 인물 좋다는 얘기는 별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묵심이’라 불릴 만큼 아픈데 없이 잘 먹고 잘 자랐고, 머스막들에게도 지지 않는 체력과 깡다구가 있는 갈락이었다.


인영이를 낳고 얼마 후 두진이네 네 식구는 저금 날 준비를 했다. 영님이는 큰 집에 있는 배 두 척 중 한 척을 떼어줄 수 있다고 기대했다. 두진이가 10년 넘게 뱃일을 했고, 큰 집 살림도 넉넉해 내심 기대했으나 두진이에게 돌아온 몫은 꼬랑 끝 작은 양철 지붕 ‘보루쿠’ 집이었다.  


보루쿠집은 단열이 되지 않아 벽에서 바람이 스몄다. 게다가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 돼서, 문짝이 너덜 해 웃풍이 심했고 구들도 반쯤 막혀 불을 때어도 추웠다. 영님이는 서운하고 아쉬웠지만 그래도 7년 시집살이를 마치고 내 집이 생겨 신이 났다. 영님이는 첫 보금자리를 고치고 쓸고 닦아 반질반질 윤을 냈다.



#1970년 : 천붕지통(天崩之痛)

      

      하늘이 무너지는 참척(慘慽)한 슬픔


1970년 11월 셋째이자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두진이는 아들 형제가 됐다고 좋아했다. 영님이도 건강한 아들을 낳아 기뻤고 더 이상 애를 낳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도했다. 셋째는 첫째 해권이를 닮아 눈썹이 짙고 머리털도 많았다. 낯선 사람들한테도 잘 웃는 아침햇살 같은 아이였다. 시집 안 간 고모들은 이삐다며 서로 업고 봐주겠다고 실랑이를 했다.


양철 처마 끝에 열기가 식지 않은 어느 날, 여태 비가 오지 않아 가물은 땅의 퍽퍽함마저 가시지 않는 밤이었다.


낮부터 달아오른 셋째의 몸은 식을 줄 몰랐고 아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보루꾸집 좁은 방에 8~9명의 어른들이 애기 둘러싸고 앉아 뭔가를 하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할 재주는 없었다.


둥가 둥가 어르고 달래고, 깰딱(알몸) 벗겨 젖은 수건으로 닦고 스담해도 보챔은 더해갔다. 해권이와 인영이는 방구석에 쭈그리고 누웠으나 잠이 올 리 없었다.
 
“울 애기, 어째 그라냐?”

“아야, 눈 떠봐라, 아가”


100일이 지난 아이의 몸은 불덩이가 됐고, 혼비백산한 영님이는 펄펄 끓는 아이를 앉고 큰 집 약방 문을 두드렸다.


“아주버님, 너무 뜨거워 경기를 일으키요.”


두진이의 첫째 형 호진이는 호야(호롱불)를 켜고 하얀 약절구에 해열제를 빻았다. 약을 재빨리 숟가락에 덜어 물과 함께 새끼손가락으로 으깨 아이의 입에 가져갔다. 흰자가 반쯤 보이는 아이의 눈은 초점을 잃어갔고, 약 숟가락에 입을 벌릴 힘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두진이가 입을 열었다.


“해권아(영님이를 부르는 이름), 우지 마라, 지미~.”

“아따, 행님, 우짜요! 뭐시던 해 보시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해열제 주사 램프를 깨고 아이 팔뚝만 한 주사기를 엉덩이에 꽂았다.

영님이는 천지신명께 닭똥 내가 나도록 빌며 중얼거렸다.


“하나님, 부처님, 님, 달님, 울 애기 눈 뜨게 해 주시요. 나가 이렇게 비요. 차라리 나를 데려가시오….”


새벽 3~4시경, 영님이의 원통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아이는 얼마 후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두진이와 오춘은 아이를 안고 나갔고 영님이는 방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깨어있는 해진이와 인영이도 동생의 죽음을 알았고, 동이 틀 때까지 이불속에서 울었다.


죽은 아이는 청산도에 풍습대로 해변에 반쯤 묻혔고 그 위로 큰 돌이 올려졌다. 파도에 씻겨가라는 것이다. 아이를 땅에 묻고 묘를 만들면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경전(經典)에는 없는 미신이 있었고, 수많은 핏덩이들이 그렇게 고기밥으로 돌아갔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새벽녘 지리 해변을 찾아간 영님이는 돌에 눌려 쑥 들어간, 검게 변한 얼굴의 아들을 앉고 돌아왔다.


해진 아부지, 제발 묻어주시오.


두진이는 삽과 아이를 들고 '모레짐’ 근처 산자락으로 향했다. 훗날 두진이와 영님이는 누구에게도 그 아이의 이름과 묻은 장소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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