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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거운물 찬물 Nov 20. 2021

<옥케이, 벨라이스>3부 빨갱이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해방 초기 정국은 매우 뒤숭숭했다.      


마땅히 처벌받거나 처형됐어야 할 친일파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을 쥔 ‘순사’가 됐다. “청산 없이는 반복된다”라는 말이 가장 정확히 들어맞는 시국이었다.      


그 당신 모든 일에 최우선은 “반공”이었다. 북한과의 대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북으로, 좌우로 편을 갈라 정치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해방은 됐지만, 일장기가 ‘성조기’로 바뀌었을 뿐 바뀐 것은 없었다.    

  


#손가락총     


“동네 사람들 애장(부역) 나오시오~~.”     


마을 꼭대기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도청리는 한 바퀴 돌고 다시 최 씨의 귀로 들어갔다. 최 씨는 육 발(발가락이 6개)이었다. 가난했지만 목소리 하나는 청산도 최고(最高)였다. 당시만 해도 마을의 부역(공동 노동)은 흔한 일이었다. 최 씨는 제사가 있는 집을 찾아가 먹을 것을 얻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었던 어느 날, 홍채와 용옥이가 순사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아랫동네 정규정이가 ‘빨갱이’인 것 같소, 한번 조사해 보시오.”


 빨갱이로 한번 몰리면 결백을 주장할 방법은 없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할 증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규정이은 며칠 내로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얘기를 듣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어차피 가면 죽는다. 야반도주는 선비의 절개가 아니다. 큰아들 효진는 이미 성년이고, 둘째 아들 충진이도 고등학생이다. 내가 없어도 갑심이와 동생들을 보살필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좋다. 나가 느그들 손에 죽느니 내 손으로 죽는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비상(수은)을 먹고 자결했다.


11살 두진이는 아부지 영전에서 밤새 엎드려 울었고. 3살 용진이는 병풍 뒤에 누워있는 아부지의 배 위에서 놀다, 자다 했다.      



#청산 없이는 반복된다.     


아랫동네에 규정이가 비명에 가고 윗동네 영님이네 집에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김해 김가 장손이었던 철학이가 손가락 총에 맞았다. 홍채가 철학이를 거짓 빨갱이로 밀고한 것.      


어느 날 아침, 철학이는 강진으로 끌려갔다. 가족들은 철학이를 수소문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강진 형무소에서 “다 죽게 생겼으니 데리고 가시오”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영님이의 엄마 '용업'이는 짚신 여러 개를 등에 지고 배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물어 물어서 철학이를 찾아갔다. 본래 철학이는 190cm의 거구에 잘생긴 외모였지만, 그때의 모습은 삐쩍 골아서 가죽만 남은 형상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용업이는 철학이를 ‘업다, 부축했다’를 반복하며 근처 여관방에 눕혔다. 철학이는 매일 밤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뚫어 누가 오나, 감시했다.      


그놈들이 나를 잡으러 온다.     

제발 때리지 마싱요….  



고향 집에 와서도 매일 밤낮없이 이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고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복수     


몇 년 후 두진이가 청년이 됐을 때 홍채와 용옥이가 아부지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사실을 알고 칼을 들고 그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진이의 복수는 실패했고, 그 당시 집 한 채 값인 300만 원의 벌금을 냈다.

용옥이의 아내는 훗날 영님이에게 “우리 때는 서로 우애 좋게 지내자”라고 말했다.      



# 조강지처 영님이


규정이가 죽고 효진이와 충진이는 군대에 갔다. 당시 군대는 5~6년씩 다녀왔다고 한다. 갑심이네 집에서는 일을 할 남자가 두진이밖에 남지 않았다.



두진이는 혼자가 똥장군(거름주기). 소띠끼리(소를 산에 풀어 여물 먹었기), 논밭에 물주기(청산도는 땅이 척팍해 비탈에 있는 논에 직접 물을 주어야 함) 등 한시도 쉬지 못하고 일만 했다. 그러나 곡식은 늘 부족해서 배가 고팠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보는 윗동네 처녀를 발견했다.     

 

“저 갈락이 어느 집 애라냐?”
 

친구 길호에게 물었다.   

   

“도청리 1구 옹곰례집 처자인데, 목포, 해남 등 친척 집으로 돌고 와서 나도 잘 모른다.”
 
그날부터 동네 총각들은 영님이를 두고 옥신각신하기도 했으며,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자기들끼리 난리굿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영님이가 해남으로 떠나버렸다. 두진이는 살결이 희고 키도 큰 영님이를 많이 좋아했었다. 그러나 떠나버린 그녀를 잡을 방법은 없었다.   

   

두진이는 두 행님네 배에서 뱃삯도 못 받고 일만 했다. 열 살 넘게 나이 차는 나는 효진이가 아버지인 셈이다. 시간이 흘러 21살에 군대에 갔다. 글씨를 잘 쓰고 성격이 싹싹해, 그나마 배가 덜 고픈 통신 연락병이 됐다. 강원도 대성산에서 근무하면서 이것저것 부대로 문서를 전달했다. 당시 군대는 장군부터 하급 간부까지 곡식을 빼돌려 병사들에게 오는 밥은 형편없이 적었다

      

상병이 꺾일 즈음. 집에서 전보가 한통속 왔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영님이네 집에 사상(사주단지)을 보내 결혼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두진이는 곧바로 청원 휴가를 내고 청산도로 내려갔다. 온 가족이 모여 처가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진이는 영님이의 손을 그날 처음 봤다.     


“손꾸락이 어째 그라냐, 어렸을 때부터 봤는데 몰랐다.”


“애기 때 돌막에 찡겼어요….”


“오메 어짜끄…, 아팠것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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