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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거운물 찬물 Nov 21. 2021

<옥케이 벨라이스>4부 질곡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마도로스의 하얀양복     


1972년 봄,

설희 한 살, 인영이 6살, 해권이 9살 때,     

두진이는 파푸아뉴기니로 원양어선을 탔다. 당시 분위기는 3년간 배를 타서 물고기를 많이 잡으면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갸름한 입술, 큰 콧구멍, 볼 그라진 광대. 포마드를 바른 2대8 가르마…. 그리고 해양대학교 출신의 마도로스가 입음 직한 하얀색 양복! 두진이는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고 부산으로 갔다.      


원양어선은 목숨을 건 작업이다. 망망대해에서 맹장이라도 터지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또 세상에서 가장 험한 일이기 때문에 군기도 상상을 초월한다. 선장은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이며, 보통은 간판장이 빠따를 친다. 두진이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한참 어린놈한테, 처자식이 있는 몸으로 맞았을 때가 가장 서러웠다고 했다.



#계오야


영님이는 자식 셋과 남았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당시 큰 배도 있고, 조합장까지 했던 둘째 형님을 찾아갔다.
 
 “돈 없으니 딴 데 가서 알아봐라”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많이 서운했다. 영님이는 지금도 “그때 돈 안 빌린 게 아주 잘한 일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빌려줬다면, 즈그들이 우리 식구를 먹여 살렸다고 할 판이다.”

세원이네 집을 봐라, 학교 때 등록금 몇 번 내주었다고 평생을 뜯어 먹었다.     


영님이는 고민 끝에 “계오야(계주)”를 잡아 목돈으로 잡화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곗돈은 여러 사람이 돈을 내고 돌아가면서 타는 품앗이다. 목돈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유용한 금융 수단이다. 그 중 계오야는 만약 누군가 돈을 내지 않고 도망치면 그 돈까지 갚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럼데 철수 할아버지가 돈을 떼먹고 야반도주를 해서 영님이는 그 돈가지 갚아야 했다. 


   

#목포행 영호


영님이의 장사수완은 탁월했다. 목포의 큰 시장에 가서 청산도에는 없는 상품을 사다가 팔았다.

모자, 가방, 각종 기기 등…, 한마디로 백화점이었다.

보루꾸집은 교통의 요지였고, 영님이의 물건도 매우 좋아 금방 자리를 잡았다.     


물건을 떼러 목포에 가는 날에는 갓 난 설희를 업고 가야 했다. 밤에 출발하는 삼영호는 완도를 거쳐 목포에 아침에 도착했다. 끼니를 챙길 겨를도 없이 목포 시장을 돌아다녔고 밤늦게서야 여관방에 올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돈 버는 재미에 견딜 만했고, 무엇보다 잔소리하는 해권 아부지가 없어서 좋았다.    

 

목포에 가지 않는 날에는 새벽에 명도산 넘어 풍막골로 무시(무)하러 갔다. 오로지 달빛에는 의지해서 험한 산길을 가야 하지만, 노랑이(진돗개)가 있어 무서운 줄 모르고 다녔다.   

   

“영님이 만한 며느리가 어딨냐?

남들은 신랑 원양어선 가면 바람나고, 난리굿인데, 영님이는 이 새벽에 무시를 해 온다야~,

기맥히다. 기맥혀.”     


두진이가 떠나고 얼마 후부터 가족불(월급)로 2만 원씩이 도착했다.

두진이는 안타깝게도 그물 사고로 다리를 다쳐 3년을 채 못 채우고 조기 귀국했다.



#서울 상경     


두진이는 귀국해서 금성호라는 '나가시키 배'를 사서 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어느날 해권이가 서울에서 내려 왔다.  


"아부지 저 서울공고에 합격했어요."
"뭐?? 이 새끼야 나가 너 공고가라고 서울 보낸 줄 아냐?"


갑작스러운 해권이의 공고 합격에 두진이가 대노하고 전 가족의 서울행이 결정됐다. 영님이는 많이 아쉬웠다. 장사가 자리를 잡았고,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와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봄

서럽디 서러운 완도행 뱃머리에서 영님이는 피눈물 쏟았다.

막연한 서울이라는 곳에 아무런 연고나 기술 없이 간다는 것은, 지금의 미국 이민보다 훨씬 더 두려웠을 것이다. 


   

#해물 가게의 늪     


서울에 와서 보니 봉천동 현대시장 가장 구석 자리에 가게 자리를 두진이가 사놨다. 저녁 장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물건을 사기 때문에 물과 얼음으로 가득 찬 해물다라(고무대야)를 들고 100미터 쯤 떨어진 길거리로 날아야 했다. 그때부터 영님이의 허리와 다리가 닝께(으스러지다)지기 시작했다. 



#구둣방     


두진이는 영등포에서 구둣방을 했으나, 선천적으로 장사를 할 성격이 못돼 장사는 신통치 않았다. 아니 집에 돈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망한거나 다름없었다. 

     

두진이는 구둣방을 그만두고 중부시장에서 멸치 장사를 하려 할 때, 영님이에게 같이 하자고 했으나, 영님이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둘 다 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절망, 포기     


두진이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구두 도매상을 조카 해국이와 같이 했다. 아이템은 괜찮았지만, 영업이 잘 안 되고, 자본금도 부족했다.     

어느 여름날 해국이가 두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부지, 저도 처자식이 있습니다. 이대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아직도 그날에 풍경을 정확히 기억한다. 해국이의 왼손에는 포도가 든 검은 봉다리가 들려 있었고. 오른쪽 손에는 봉고차 키가 있었다. 무릎을 꿇었던 해국이는 천천히 일어났고, 두진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그대로 앉아있었다.      



#동명파레스     


해국이가 떠나고 아부지는 술만 마셨고 새로운 일에 도전조차 하지 않았다.
 
“죽으면 다 그만인데, 이생에서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      


”조상님들 벌초와 묘비관리를 잘해야 한다.“     


아부지는 그날 이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됐다.   

   

밤마다 영님이와 인영, 우진이를 괴롭혔다. 매일 밤새도록 잔소리를 했고 우리는 자지 못 했다. 역정이 심한 날이면 우리 셋은 집에서 도망쳐 지하 주차장에 있던 ‘액센트’에서 잠을 잤다.      



#아부지의 질곡 그리고 쥐     


어느 저녁에 집에 와 보니 엄마가 집앞 아카데미 타워 1층 복도에서 맨발로 앉아있었다. 미쳐 신발도 못 신고 도망 나온 모양새다. 엄마랑 이런저런 얘길 하는데 가끔은 맨발로 현대시장(도보 1시간)에 가서 잠을 잤다고 했다. 여자 혼자서 ‘쥐’들과 함께….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아부지의 폭정은 하루하루 늘어갔고 우리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 도피시켰다.

동명파레스에는 아부지 혼자 남았고, 영님, 인영, 우진, 치코는 지하 단칸방에 숨어 살았다.   

   

점점 끝을 향해 간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난 일주일에 1~2번씩 동방파레스에 들러 반찬을 놓고 아부지의 생사를 확인했다. 몇 달마다 엄마가 혈압약을 타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부지가 보라며 병원에서 몇 시간씩 엄마를 기다렸다. 하지만 엄마의 약은 내가 대신 받았다. 그렇게 2년 6개월이 흘러갔다.  

    

2007년 10월 후배랑 동방파레스에 들렀다가 우연히 1층 엘리베이트 앞에서 아버지를 봤다.


“추석 때 행님이 얼마줬소?”
“50?”
 

“아니다.”     


“진짜 50도 안 줬소?”
“3년 만에 집에와서 50도 안 줬다고요?”

“썩을 놈”     


아부지는 손사래를 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것이 내가 아부지를,


아부지의 살아있는 습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날 늦은 밤


“여보세요.”


“503호 아들이죠? 경비실인데요.”    

 

“아~아저씨, 안녕하세요.”


“우편물도 좀 찾아가시고…그리고 아버지가 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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