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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거운물 찬물 Nov 29. 2021

<옥케이, 벨라이스>6부 회피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나는 영등포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공부는 신경을 많이 써야 해서 공부를 않던 나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다.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도 친했고, 싸움을 잘하는 애들과도 친했다. 나는 태어나서 팔씨름을 거의 져본 일이 없던 통뼈여서 싸움도 잘했다.      


우리 학번은 낀 세대다. 교복은 입었으나, 머리는 기를 수 있어서 졸업사진을 보면 좀 웃긴다. 2학년까지 내신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 목표했던 서울대에 들어갈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반대하셨고, 결국 재수생이 됐다.     


1980년 봄 우리집 식구들이 전부 이사를 왔다. 우물집에 며칠 있다가 석우네 집으로 짐을 옮겼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부지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집에 들어갔다. 아부지의 잔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서울역 정일학원에서 공부해서 대학을 갔다. 1984년의 캠퍼스는 온통 최루탄 가스로 메워졌다. 학교 안에는 사복경찰이 돌아다녔고, 광주 민주화운동의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는 동아리들도 많았다.      


“소리통! 소리통!”     


“전두환은 물러가라~ 울라~울라~”


 ‘독재 타도! 투쟁!“     


나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아부지가 주무시는 것을 확인하고 집에 들어왔다.  

    

1987년 ”6월항쟁“은 민주화 물결을 타고, 쓰나미가 되어 독재 정권에 밀어닥쳐,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나는 NL(민족해방)이었다. NL, PD(민중민주)가 지금 와서 보면 무슨 차이인가 싶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30년이 지나니까 모두 추억이 됐다. 그때 들었던 쇠 파이프와 화염병은 어딨을까? 


에피소드가 있다. 우리 때는 군대에 가기 위한 신체검사를 자기 본적지에서 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재수생이었다. 그런데도 총 600명의 친구 중에 재수생인 나의 학벌이 3등이었었다. 그만큼 그때 시골은 진학률이 형편없었다.   



# 백색가전의 명가(名家) LG전자


22살 다시 늦은 나이게 군대에 갔다. 공군을 가면 휴가도 자주 나오고 근무도 덜 빡시다는 소리를 듣고 공군에 지원했다.


나는 통신(전산)병이 될 줄 알았는데, 육군으로 치면 “일빵빵”인 헌병 보직을 받았다. 난 군견반에 배속됐다. 짬밥(?)을 많이 먹은 능숙한 군견들은 초보 신병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쫄병의 임무는 절대로 군견에게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견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됐다. 시작과 동시에 내 군견은 준비된 장애물을 딱! 돌았고, 서야 할 곳에 딱! 딱! 섰다. 심지어 그는 하품까지 했다. 그 똑똑한 수컷 셰퍼드의 이름은, 제대할 때까지 나와 살 부비며 살았던 “치코”다.      

    

대학을 졸업하고 LG전자에 입사했다. 나의 소속은 해외지원팀이었다. 가깝게는 일본, 멀게는 유럽, 아프리카, 멕시코, 아프리카, 남미 등의 컴퓨터 전산망을 관리했다. 나는 새로운 기술 습득이 빨랐다. 새로 나온 컴퓨터 서적도 대충 훑어보 듯해서 하루 한두 권씩 봤고 그렇게 본 책이 천장 높이보다 높았다.     


“정해권은 차기 임원감이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을 만큼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나는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새로운 가정을 꾸며 아부지와 나 같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다.   

  

어느 날 독일 파견이 결정됐다. 총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 파견이 결정됐다.      


“오히려 잘됐다. 어머니에게 죄송하지만, 아부지와 안 마주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라고 생각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 도착해 LG전자의 유럽 전산망을 그리고 만들고 운영했다.      


외롭고 심심해서 독일의 작은 한국 교회를 다녔다. 거기서 박미진이라는 학생을 만났다. 처음에는 서로 호감을 가지고 데이트를 했는데, 나중에는 마치 아내라도 되는 듯 나를 옥죄였다.


숨이 막혔지만, 나를 너무 사랑하는 것이 느껴져 42살 늦은 나이에 결혼식을 올렸다.      


독일 생활이 6~7년쯤 됐을 때 이미 미진이는 향수병에 심하게 걸려있었고, 나도 내 인생을 독일에서 끝내기 싫어서 많은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한국행을 결정했다.      



# 수랏간


서울로 돌아와 트윈타워와 문래동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 1살 어린 후배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트윈타워 지하 한정식집을 새로 개업하는데 권리금 없이 같이해 보자는 것이었다. 난 의심이 많은 성격이지만 딱히 단점을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친구는 이런 식당을 여러 개 운영해본 경험이 있어 신뢰가 갔다. 처음에는 인테리어 비용 2억 원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점차 금액이 불어나더니 마지막에는 어머니의 집까지 담보로 넘어갔다.      


가게 운영도 엉망이었다. 메뉴 선정도 문제가 많아 주방장도 여러 번 교체했지만, 900만 원의 월세와 인건비를 합치면 최소 월 5천만 원은 벌어야 하는데 매달 적자가 났다. 나중에는 인영이가 매니저로 합류했지만 이미 배는 기울었고, 엄마의 집도 날아갔다.


내 인생에서 맛본 최대, 최고의 패배이자 쓰라림이었다. 갈 곳이 없었다. 미진이가 있는 집은 상상하기도 힘들어서, 동명파레스 소파에 누워있었는데, 인영이가 소리를 질렀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어머니와 인영이에게는 동명파레스가 전부다. 어머니의 등골을 뽑아 만든 집이고, 결혼 안 한 인영이의 노후 보금자리가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우진이가 자기 집을 팔아서 경매로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을 식구들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냥 되는 것”은 없다. 제수씨와 우진이에게 미안하다. 앞뒤 상황판단도 덜 됐으면서 성질부터 내는 인경이가 안타깝다. 남편, 자식도 없고 의지할 곳이라고는 형제·자매뿐인데, 먼저 성질을 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묵심아! 너만 자존심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너무도 운 좋게 나를 좋게 봐주시던 부사장님의 추천으로, 다시 멕시코 지사장으로 임명 돼 한국을 떠났다. 평생을 아부지를 피해 도망쳤다가 돌아와서 대형 사고를 치고 또다시 해외로 도망갔다. 어머니에게 죄송하고, 장남 노릇 제대로 못 해서 동생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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