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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거운물 찬물 Nov 21. 2021

<옥케이, 벨라이스>5부 장남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대통령은 박정희, 급장은 정해권     


1964년 나는 청산도 윗동네 집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네 혜련이, 해라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나만 혼자 아들이라서 이쁨을 독차지했다. 아부지는 첫째가 아들이라서 엄청나게 기뻐했다고 들었다. 내 이름은 해권(海權), "바다의 권세"라는 뜻이다.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닐 팔자였던 것일까?    

 

어머니의 잡화점으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풍족하게 자랐다. 우리 집은 도청리의 길목 삼거리 코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청산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 집을 거쳐서 집에 가야 했다. 한마디로 “교통의 요청지”였다. 아이들과 깰딱벗고(나체로) 등대에서 방파제로 수영치러 다녔고, 비석 치기도 내가 제일 잘했다.   

   

엄마가 목포로 물건 하러 갈 때 따라가서, 고무신이 아닌 ‘플라스틱 신발’을 신고 와 아이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아부지의 친구이자 군대 전우여서 4학년까지 급장을 도맡았다.


그 당시 급장의 권한은 막강했다. 아이들에게 청소도 시키고, 잘못한 아이들을 선생님 대신 혼내는 선생님의 '분신' 이었다. 아이들도 급장에게는 순순히 복종했다. 마치 “대통령은 박정희, 급장은 정해권”이라는 공식으로 아이들은 길들여졌다.  



#유학    


4학년 겨울 방학을 마치고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으로 유학을 떠났다. 충진 큰아버지네 집에 얹혀살았는데 방이 세 개였다. 방 하나는 큰아버지 내외, 작은 방은 금진 고모가, 나머지 방에는 흥부네 집처럼 혜옥, 해광, 해국, 해영, 해라, 나와 용진 삼촌(작은아버지)이 살았다.


한 살 차이는 해광, 해국행님은 공부를 지지리도 하지 않았다. 특히 해광이 행님은 싸움에 휘말려 고등학교 졸업을 못 할 뻔했다. 아부지가 선생님은 찾아가 무마했다고 들었다.


두 행님들 모두 190cm에 가까운 큰 키와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나 사춘기의 호르몬을 이기지는 못했다. 해국이 형은 권투 등 무술?을 배워와 나와 해영이한테 대충 가르쳐주고 시합을 하자고 했다. 당연히 죽도록 맞았다. 그 당시에서도 매우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해국이 행님과는 서먹한 관계다.


작은 아부지는 단벌신사였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양복을 입고 대학교 배지를 달고 다녔다. 서울대에 떨어진 작은 아부지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경희대학교 한의학과를 입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애들이 많이 몰려 있으니까, 우리 애들 공부를 못 한다”라는 명분으로 큰 어머니가 이문동 집을 팔아 버렸다. 나는 졸지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됐고, 금진 고모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금진 고모 남편은 장성한 아들이 있는 40대 홀아비였다. 금진고모 인생도 심하게 꼬인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와 말씀하셨다.      


“청산으로 돌아갈래? 서울에 있을래?”


 나는 가만히 생각해 봤다. 서울까지 어렵게 왔는데 다시 청산도로 가는 건 좀 창피스러웠다.  

    

“저는 서울에 있을게요.”     


며칠 뒤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 이문동에 5층짜리 낡은 아파트 전세를 구해주셨다. 금진 고모에게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시고 내려가셨다. 금진 고모부는 결핵 환자였다. ‘콜록콜록’ 제 몸 하나 건사할 힘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금진 고모가 배 아프다고 뒹굴기 시작했다. 모두 당황했고 병원으로 데려갔다. 나는 유미를 데리고 집에서 기다렸는데, 얼마 후 고모와 고모부가 돌아왔다. 아파서 병원에 갔으면 죽더라도 병원에서 죽어야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그날 밤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4살이었던 유미는 고모부 손에 이끌려 청산도 우리 집으로 갔고, 나는 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고모는 없지만 고모부 집에서 나는 혼자 밥해 먹고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공부는 특별한 것이 없어서 첫 시험에서 국어 1개를 틀려서 전교 2등을 했다.      


얼마 후 사촌 형인 춘기 행님네 홍제동 신혼집에 빌붙기 시작했다. 이문동과 홍제동은 거리가 꽤 멀었으나 차비가 없는 날이면 걸어서도 몇 번 갔던 길이다.     


중학교 공부는 신경을 써야 했지만 나는 공부가 하기 싫었다. 누가 공부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냥 놀고 싶었다. 방학 때 청산도에 내려가면 아부지가 항상 성적표 검사를 하셨다. 그때 나를 째려보는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아부지는 내가 5학년인 1973년, 파푸아뉴기니로 원양어선을 가셨다. 3년 계약이었으나 무릎 부상과 조업 난조로 2년 조금 넘어 귀국했다. 매달 가족불로 한 달에 2만 원씩을 보내왔고, 엄마가 그돈을 모아서 아부지에게 줬다. 아부지는 그 돈으로 금성호라는 나가시키배를 구매해 삼치 어장에 나섰지만 역시나 돈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재수     


중학교 2학년이 되자 큰외삼촌에 아들 승기 행님과 동서를 시작했다. 승기행님은 광주일고 수재였지만 안타깝게도 서울대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고 있었다. 승기행님은 공부를 무척 열심히 했다. 밤12시까지 자리에 앉아 공부만 했다. 나는 너무너무 괴로웠다. 공부는 하기 싫은데 몇 시간을 책상에 앉아있어야 했다. 하루는 교과서에 슈퍼맨과 원더우먼의 야한 그림을 그렸다가 승기행님에게 종아리를 흠뻑 두들겨 맞았다.

     

인창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인문계와 실업계의 기로에 섰다. 그 당시는 대학교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고 꼭 가야하는 애들이 가는 것이고, 웬만하면 실업계 진학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상고만 나와도 은행장까지 갈 수 있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도 상고 출신이다.      


나는 서울 공고에 지원하겠다고 아부지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무언의 승낙”이라 생각하고 공고에 원서를 넣어 합격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합격 통지표를 들고 청산에 내려갔다.      


그런데 집안이 난리가 났다.      


“공고?? 내가 너 공고 가라고 서울로 유학 보낸 줄 아냐?”


“이런 한심한 놈아”     


아버지는 나의 뱃데지(복부)를 힘껏 때리셨다.      


아부지는 급하게 배와 그물을 헐값이 처분하고 서울로 같이 올라오셨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서울행을 택한 것이다.     


봉천1동 우물집에서 아부지와 둘이 살았다. 인문계 재수는 너무 쉬운 일이었으나, 아부지는 충무로 ㅇㅇ학원을 끊어주셨다. 나는 재수생이 된 만큼 처음에는 공부를 좀 했다. 중학교 공부도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첫 시험에서 2개를 틀려서 갑자기 “특 우수반”으로 밤을 옮겼다.       

    


#백구두     


하루는 밥을 하기 위해 연탄불을 갈다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뜨거운 연탄불을 아부지가 아끼던 백구두 옆에 놓아서 구두가 오그라든 것.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는 몇 시간이 지옥처럼 길었다.      

아부지는 결국 백구두를 발견하셨고, 나는 아부지의 날아 차기를 맞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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