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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거운물 찬물 Aug 14. 2019

<옥케이, 벨라이스>8부 아줌마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조선의 여자들은

노새보다 못 한 대접을 받고 산다.


 - 구한말 조선에 온 선교사가 쓴 책 中-



◆ '응팔 덕선이'와 제5공화국


"며느리는 죽으면 새로 얻으면 된다. "


내가 태어난 날은 비오는 72년 5월 어느 날 새벽이었다. 아부지는 나가시끼배(통통배) 선장이고 엄마는 그냥 엄마였다. 아홉 살 오빠와 다섯 살 언니가 있었다. 엄마는 나를 혼자 았다고 들었다. 진통을 느껴 할머니에게 오빠를 보냈지만 “할아버지 제사가 돌아와 부정 타니까 애기 낳은 방엔 안 들어갈란다”란 답장이 돌아왔단다.   


나중에 들은 오빠 말은 우장(도롱이·짚으로 만든 옛날 비옷)을 두르고 큰집에 할머니를 모시러 다녀왔는데 정개(부엌)로 들어와 방문을 열어보니 신문지위에 애기가 태어나 있었고 엄마는 기진맥진해 겨우 일어나 앉으셨다고 한다. 오빠가 있었지만 아부지는 아들을 더 원했고 '딸'이라는 소리에 휙 돌아나가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셨다고 한다.  


엄마는 혼자, 밤새 방바닥을 구르다 어금니에 금이 갈때 쯤 나를 낳고, 탯줄을 자르고 걸레로 닦고서야 할머니가 정개에 끓여놓은 미역국을 한 술 떴단다. 챙피시러 사람들이 적은 새벽에 국민학교 옆 꼬랑에 나가 ‘피걸레’를 빨고 있는데 아직 배가 불러 있던 어머니에게 동네 아주머니가 물으셨단다.

  

“애긴 안낫쿠 뭐하러 꼬랑에 또 나오냐.”


     

“….”


     

“(웃으며)…, 인자 나야지요.”

   


학창시절 우리 반은 70명이 훌쩍 넘었고 내 기억엔 78번 친구도 있었다. 한 학년에 17~18반이 있었고 교실 뒷자리가 남지 않아 게시판에 등을 대고 앉을 정도였다. 중학생 때 우리 학교에 밴드부가 생겨 트럼펫을 배웠다. 당시에는 고등학교에 고적대가 있었고 동두천여상 고적대가 유명했다.

     

80년대 중반 5공화국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엔 오전수업만 하고 여의도로 태극기를 흔들러 가야 했다. 단지 수업 일찍 끝내 준다고 좋아하면서 태극기 대열에는 서지 않고 햄버거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대통령은 순식간에 지나가 보지도 못했지만.

     

우리 학교는 ‘오애(五愛) 교육시범학교’였다. 반공 교육과 함께 ‘국기, 국가, 국화, 국토, 국어’ 오애교육을 매일 방과 후에 받았고 국기그리기, 국화그리기 시험을 쳐야 했다.

   

토요일에 학교를 가야 했던 우리는 오전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가 몇 시간을 기다려 ‘토토즐’(TV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을 봤다. 당시는 프로농구가 없고 대학농구가 유행해 장충체육관으로, 잠실로 응원을 갔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 88올림픽이 열렸다. 팔리지 못한 표가 자의반 타의반 강매됐고 학생들을 동원해 빈 관중석을 메꿔 학교는 텅 비기도 했다. 나는 친한 친구들과 '땡땡이'치고 명동으로 가 1300원짜리 돈가스를 사먹었고 다행히 걸리진 않았다.

 

  

◆여자는 죽고
    언니, 엄마, 아줌마로 태어나다

    

졸업 후 별 꿈 없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 아부지는 오빠와 남동생에겐 명문대에 가야한다고 늘 말씀하셨지만 언니와 나에겐 별다른 말씀이 없었고 나 역시 자연스레 대학을 포기했다. 첫 직장에서 한 달을 일하고 25만 원을 받았다. 주야간을 근무하면 30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지만 어려서 그랬는지 놀고 싶었다.


 우연한 기회로 ‘가든’일을 시작했다. 식당에서 처음 들은 내 호칭은 ‘언니’였다. ‘열씸’ 돈 벌고, 열심히 잘 놀며 20대를 보내던 중 97년에 IMF가 터졌다. 동료들은 일자리를 잃고 월급은 동결됐지만 그나마 난 홀 관리 책임자로 인정받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다.

     

열심히 저축해 부모손 빌리지 않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해 늦지 않게 아이를 가졌다. 우리는 요즘 말로 흙수저였고 부모 도움 없이 자그마한 빌라 전세부터 시작했다. 그 당시 신혼부부들은 우리처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요즘 젊은이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가난했어도 낭만은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30대는 출산, 육아만으로  한살 한살 늘어나는 나이를 세어본 기억이 없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즐거웠지만 '나'라는 사람이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나의 하루는 오롯이 남편과 아이에게 맞춰져 있었고 아이를 재우고 밤늦게 마시는 술 한 잔만이 위로가 되어주었다.

   

변변한 능력은 없고 아이는 어리고 그냥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부업과 알바를 하며 나름 열심히 살았고, 우연찮은 기회로 알바 갔던 가게를 우리아들 초등4학년 때 인수했다. 내 나이 마흔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강박이 있었고, 지금 하지 않으면 더 늦어 아무것도 못해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외벌이로 힘들게 가정을 책임져온 남편은 식당으로 얼마나 벌겠냐며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그만두라 큰 소리 쳤지만, 그 말에는 나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함께 섞여있다는 걸 안다.

 

  

◆갱년기, "이제 늙어가는구나"

◆호르몬의 순리(順理), 모순(矛盾)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내 청춘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서른 살을 지나 마흔마저 넘어 “아, 이제 늙어가는구나”를 실감하는 첫 길목엔 ‘노안’이 있었다. 40대가 되면 한살씩 나이를 먹을 때 마다 다르다는 엄마의 말이 이해됐다. 50이 되면 매년 다르고 60이 되면 매월, 70에는 매일 다르다는 아부지의 말은 사실일까.

     

오십을 바라보게 되자 갱년기와 마주쳤다. 몇 년 전부터 생리불순이 시작돼 지금은 자다가도 열이나 벌떡 일어나고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잔다. 같이 사는 사람들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갱년기가 온 거 같다”고 선포했다. 마음에 화가 많고 짜증이 차 있다는 느낌이 들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같이 사는 남자들은 밤에 춥다고 투덜거리지만 그래도 이해는 해준다. 남편에게도 갱년기가 왔는지 요즘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질색하던 드라마를 즐겨보기도 하고 예전의 욱하던 성질은 어디 갔는지 한풀 꺾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하다.

     

“내 나이가 낼모레면 쉰이다”라고 큰소리치던 아부지 목소리가 들리고 마흔 여덟살의 젊은 엄마의 얼굴도 떠올랐다. 힘들게 장사해 세금내고 혜택도 많이 못 보는 구멍가게 주인. 학교친구보단 동네아줌마들과 ‘남편흉’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위로받는 ‘아줌마’.

     

동네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오십이 넘은 사람들은 자기고집이 생겨 다른 사람 말을 안 듣는다”며 동네 언니들 흉을 본다. 우린 그런 50대가 되지 말자며 그땐 서로 꼬집어 주자며 한바탕 웃는다. 전생에 나라를 한두 개쯤은 구해야 할 수 있다는 주말부부로 사는 친구를 부러워하고 출장도 없는 우리남편 저 멀리 시베리아쯤 보내놓고 또 한 번 웃는다.

    

아직은 한참 더 자식을 뒷바라지해야하고 남은 인생 열심히 살아야하기에 쳐다보지도 않던 건강식품도 챙긴다.

부쩍 커버린 아이들은 부모보다 친구가 더 좋은 나이가 되었고, 아이들 없이 부부끼리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동지애 때문인지 부부 사이는 단단해진 것 같다.

    

     

◆“내가 오십만 묵어도 조컷따”

◆100세 시대? 잘 늙기만을…

     

칠순잔치를 해 자랑하듯 밥 먹으러 오라는 동네 어르신을 보고 마음 한쪽이 좀 먹먹하다. “엄마는 절대 늙지 말구 이대로 있어”라고 말하던 7살 우리 아들이 이제는 큰 키와 덩치로 엄마를 안아주고 위로해준다. 업어줄 수 있을 때 많이 업어주라던 할머니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우연히 남편의 귓가도 쭈글쭈글 주름진 것을 보니 힘들게 온 지난 세월에 마음이 짠하다. “여기까지 힘들게 왔구나” 생각하면 볼을 흘러내린 주름이 더욱 깊이 패어 보인다. 대학, 취업준비, 결혼 등 아직 아이들 뒷바라지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직장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남편을 생각하면 솔직히 안쓰러운 마음보다 걱정이 앞선다. 여자들은 신랑이 불쌍하게 봐진다지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참 나름 열심히 살아왔구나,하고 생각하면 한편으로 대견스럽기도 하다. 때론 “난 아직 서른아홉”이라고 말하는 그가 귀엽다.  


우리는 부모 도움 없이 시작해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지만, 자식에게는 생활기반을 마련해주고 우리의 노후는 독립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세대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은 욕심에 오늘도 힘들어하는 남편을 격려해 내보낸다.

     

내가 오십살만 먹어도 좋겠다던 팔십 우리 엄마 말처럼 나는 아직 젊다. 인생다리 절반을 넘었지만 아직은 할 일이 많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성실히 모나지 않게, 건강히 큰 걱정 없이 가족 모두가 잘 되길 기도한다. 100세 인생 ‘그냥~’ 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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