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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거운물 찬물 Oct 21. 2021

<옥케이, 벨라이스>10부 학교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실내화 주머니   

 

1983년 3월 2일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날 입학식에는 엄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다 말고 서둘러 참석했다. 나는 학교라는 곳을 왜? 가는지 모른채 엄마의 손에 끌려갔다. 1~8반 총 여덟 개의 깃발이 운동장에 서 있었고, 나는 취학통지표에 나와 있는 1학년 3반 깃발 뒤에 줄을 섰다.      


어떤 나이든 아줌마가 깃발 앞에서 아이들에게 '앞으로 나란히'를 외치며 큰소리를 쳤다. 엄마를 포함한 부모님들은 운동장 건너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 할아버지가 단상에 올라. 아주 길~게 말을 하셨고.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는 풀려날 수 있었다. 중간중간 휘청이는 아이들도 있었고, 오줌이 마려워 다리를 “베베” 꼬는 여자아이들도 많았다. 그래도 그 할아버지는 말씀을 그치지 않았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부모님들이 각자의 아이들에게 몰려왔다. 나의 엄마도 곧 나를 찾았는데. 엄마의 손에는 네모난 가방이 들려있었다. 엄마는 허리를 반쯤 수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1,500원짜리 실내화 주머니야. 500원짜리, 1,000원짜리도 있는데. 우진이는 최고로 좋은 1,500원짜리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고 학교에 다녀~. 제일 좋은 실내화 주머니 가지고 다니니까. 공부도 최고로 잘해야 한다. 내 아들~”     



#받아쓰기 


“내일은 8시 50분까지 등교하세요”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은 똑똑히 기억했다. 다음날, 나는 혼자서 늦지 않게 학교에 갔고, 8시 50분 전에 학교 운동장에 '등교'해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분명 8시 50분까지 등교하라고 해서 어제 그 자리에 등교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때 등교가 운동장 모이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1학년 첫 , 첫 수업은 바른생활 시간으로 시작했다. 선생님이 “솰라~ 쏼라~” 뭐라고 얘기를 하셨는데 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긴 왜 학교에 오는지도 모르는데, 학교 수업이 들릴 리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4명의 아이가 호명되고 칠판 앞으로 나갔다.      


“자~ 태극기를 칠판에 써 보세요”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나머지 3명의 아이는 쏜살같이 글씨를 썼다. 그런데 나는 분필을 들고 멍~하니 서 있다가. 선생님과 반 아이들의 눈치를 쓱~한 번 보고. 분필은 칠판에 댔다.      

“쓰~윽, 쓰윽. 쏵! 쏵!~~ 찍!! 찍!!!!…."     


”너 그게 뭐지? 태극기를 쓰라고 했지, 누가 그리래?“

”우~하하하하하.우하하하하하“     


담임 선생님은 나를 혼냈고, 반 아이들은 배꼽을 잡았다.     


나는 '까막눈'이었다. 한글을 모르고 학교 가서 첫 수업 시간에 조롱거리가 됐다. 당연히 1학년 1학기 내내 받아쓰기를 ”0“점을 받았고,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매일 맞았다. 가끔은 뺨도 맞았다. 그녀의 손은 내 얼굴보다 커서, 나의 뺨을 향해 날아오는 손이 솥뚜껑만 해 보였다.


 "뻥~~~" 소리가 어찌나 큰지 고막이 얼얼했다.    


            

#소풍          


5월 어느 날,     

"다음 주 수요일 관악산으로 봄 소풍을 가니까. 엄마랑 김밥 싸 오세요"라고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나도 소풍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나는 너무나 설레어서 일주일 내내 잠을 설쳤고, 소풍 전날에는 밤을 ”꼴딱“ 샜다.

    

학교에 모여서 관광버스를 타고 20분쯤 달려, 낙성대 주차장에서 내렸다. 나지막한 언덕 같은 산속을 20분쯤 들어가니 넓은 공터가 나왔고, 우리는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친구들의 엄마들은 김밥, 과일, 과자, 간식 등을 펼쳐 놨다. 그런데 나는 시장에서 포장한 김밥만을 내놓았다. 창피하진 않았다. 그래도 내 김밥에는 프랑크 햄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엄마가 같이 오지 않는 1학년생은 전교에서 3명밖에 없었기에 좀 뻘쭘하긴 했다.      


밥을 먹고, 장기 자랑 시간을 가졌다. 친구들 저마다 춤이나 노래, 율동 등을 연습해 왔다. 나는 쑥스러워서 나가지 않았다. 사실 ‘등대지기’라는 동요를 연습해 왔으나, 용기가 없었다.     


소풍의 하이라이트 보물찾기 시간이 돌아왔다. 선생님이 자그마한 쪽지에 선물을 썼고, 반장과 부반장이 숲속 나무 사이, 바위틈 풀숲 등에 숨겼다. 나는 열심히 찾았고, 문화연필 한 자루를 받아서 너무 기뻤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소풍도 이제 마무리될 시간이었다. 엄마들은 종일 자녀들의 사진을 찍었고,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사진기로 단체 사진 촬영을 했다. 나는 오른쪽 구석에 엄마 없이 홀로, 손 무릎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내 생의 첫 소풍날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텅 빈 객석을 바라보는 배우의 심정이랄까. 소풍 이후도 늘 있던 수업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아직, 눈부신 소풍날에 취해 있었다.
      


#빵과 우유     


2교시가 끝나면 간식 시간이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우유를 신청한 아이들’, ‘집에서 빵 같은 간식을 싸 온 애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애들’.


나는 다행히 우유를 신청한 아이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간식을 싸 오지 않은 아이들은 매일 혼냈다. 손바닥을 때렸다.      


“너희 부모는 간식도 안 싸주니?”라는 날카로운 짜증과 함께 사랑의 매가 우리들 손에 떨어졌다.


나는 또 여지없이, 매일 손바닥을 맞았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는 너무 바빠서 빵을 싸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해, 엄마에게 간식을 싸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가 시켜준 우유는 시원하고 담백한 것이, 너무 맛났다.      


우리 학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1~2학년은 오전, 오후 반으로 수업했다. 1주일은 오전반, 다음 1주일은 오후반, 이렇게 한 주씩 번갈아 가며 등교했다.   

   

오후반이 된 첫 월요일, 1시까지 등교해야 하는데, 그만 낮잠에서 늦게 일어나 1시 5분에 교실 뒷문에 닿았다. 수업은 이미 시작됐고,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수업 시간 도중에 수업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매가 무서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 학교를 마친 설희 누나와 마주쳤다.    

  

“너 학교 안 가고 뭐 하니?”


 “어? …. 나 오전반이야!”     


누나는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고, 곧바로 엄마에게 알렸다.   

   

장사하다가 말고 대문을 박차고 엄마가 방에 들어섰다.     


 이놈의 새끼. 학교 안 가고 뭐 하냐? 빗자루로 맞아야 것 따.”    

  

엄마는 방 빗자루를 바닥에 세게 “딱! 딱! 딱!!” 내려치며 화를 내셨다. 엄마는 때리지 않았지만, 난 많이 울었다. 누나의 손에 이끌려 다시 학교 갔고, 선생님은 지각했다고 또 욕지거리를 하고 손바닥을 때렸다.      


     

#'개새끼'의 종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나이가 최소 60살은 더 돼 보이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하루는 체육 시간이었는데 나는 아이들과 쪼그려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이 우리에게 씩씩대면서 오시더니

 
“이놈에 개종자들이 떠들어? 역시 종자가 글러 먹었어! 종자가 글러 먹었어….”     


나는 그때 “종자”라는 말을 몰랐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물어보니 “아주 좋지 않은 말”이라고 하셨다. 나도 그 말이 욕이라는 것쯤은 그때도 알았다.      



#짐승의 손등     


3학년 겨울.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우리 반 모든 아이에게 걸상 위로 올라가라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손등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너는 손톱 깎고 와!”     


“너는 손에 땟국물이 흐른다. 너희 엄마가 안 씻어주니?”    

 

...  ...  ...    


그러다가 내 차례가 됐다.     

 

선생님은 내 손을 보자마자 눈살은 찌푸리더니, 교탁 앞으로 나가라고 했다.    

  

교탁 위에 손을 올렸다. 선생님은 지휘봉으로 내 손을 비린내 나는 생선 만지듯, 엎치락뒤치락 했다. 나는 친구들이 보고 있어서, 몹시 당황했고, 창피했고, 무서웠다.      


“이게 짐승의 손등이냐? 악어 등가죽이냐?”     


“교탁에 올라가!!!”     


나는 종아리를 걷었고 피가 철철 날 만큼 얻어맞았다.     


“10살 남자아이가 한겨울에 손을 씻지 않아, 손등이 새까맣게 트는데. 이렇게 맞을 일인가?“     

 

맞으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종아리에 피가 날 때 즈음, 그런 생각도 없어졌다. 그냥 너무 아팠다.  


         

#허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     


우리 학교에는 남자 선생이 드물었다. 4학년에 올라가자 드디어 나에게도 남자 담임 선생이 기다리고 계셨다. 반백의 ”율부리너“를 닮은 허 선생님은 인상이 참 좋았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인자함이 풍겼다. 아이들이 수업이 지루해지면 늘 하는 말. “선생님~ 재미있는지 얘기해 주세요?”라고 하자.    

 

선생님은 칠판에 ‘고려, 신라, 백제’를 쓰셨다.     


”고려의 주몽은 알에서 태어나서…, 신라의 박혁거세는 또 어떻게 태어났고, 백제 의자왕의 '삼천궁녀'사실 조작된 역사다….“ 등등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시간 그자리'로 달려갔고 함께 말을 타고 전쟁터에 나갔다.    

지금도 나는 내 생의 가장 즐거운 수업은 허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라고 확신한다.     



#뽀리 클럽     


“5교시에 반장 선거 있지? 우진이 너 잘하면 되겠다. 일단 공부를 잘하니까 후보에 오를 거고, 후보에만 오르면 당선은 거저이지 않을까?"


나도 생각했다. 나는 공부도 잘했고, 싸움도 잘했고, 특히 브레이크 댄스와 노래를 잘해 학교에서 유명했다. 무엇보다 뽀리 클럽 '캡'이라는 타이틀은 반장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5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됐다. 4명의 뽀리클럽 친구들은 쏜살같이 우리 반 복도로 달려왔다.     


“반장 됐냐? 됐지?” 모두 같은 질문을 했지만, 나는 창문 너머의 칠판은 가르쳤다. 남자 5명, 여자 5명의 반장 선거 후보에 정우진은 없었다. 성적순으로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선생님이 뺀 것이다. 


“뽀리 클럽 없는 반, 담임 선생님들은 너무 좋겠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그녀는 내가 나를 미워했고, 째려봤고, 때렸다. 배 속에 아이도 있으면서 말이다.      


# 누명     


나는 4명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우리 독수리 오형제는 늘 붙어 다니며 종일 놀았고. 목욕탕도 같이 가고, 서로의 집에서 하루 종일 놀았다. 우리 모임의 이름은 ‘뽀리 클럽’이다. 동네 슈퍼를 돌아다니며, 껌. 초콜릿 등 작은 물건은 슬쩍해서 나눠 먹는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물론 나쁜 일이지만 그땐 잘 몰랐다.


어느 날 허인영이라는 친구가 전학을 왔다. 하얗고 넓적한 얼굴에 아주 연한 갈색 눈을 가진 아이였다. 인영이는 우리 뽀리클럽과 친해지려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는 등 노력을 했다. 우리는 별 뜻 없이 친구로 받아줬고. 그 후로 같이 몰려다녔다.      


6학년 주번은 교무실 청소를 해야 했다. 인영이가 주번이었던 그 주 어느 날. 교실 벽에 걸려있는 스피커에서 귀에 익은 이름이 불렸다.      


서주원, 정인영, 김효곤” 지금 당장 교무실로 와라!   

  

수업하다 말고 교무실로 가니 다들 모여 있었다.     

학생 주임 선생님이 마대 걸레를 들고 있었다.      


허인영에게 선생님들 물건 훔쳐 오라고 한 놈 나와”     


우리 다섯 명은 어리둥절했지만,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알았다. 한 명씩 돌아가며 매타작을 맞았지만. 우리가 시킨 일이 아니니까 ,아무도 나서지 못했고 매질은 계속됐다. 마댓자루가 3~4개쯤 부러졌을 때, 내가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제가 시켰습니다.”     


그 뒤에 나 혼자만 계속 매질을 당했고, 마대가 5개쯤 더 부러지고 나서야 사건은 마무리됐다.      

그날 이후로 허인영의 갈색 눈은 나를 쳐다보지 못했다.           



#캡틴큐와 박남정     


6학년 가을 강화도로 1박 2일 극기 훈련을 떠났다. 생애 최초로 외박을 한다는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관광버스는 우리를 마니산 전망대에 내려왔다. 또 땅굴에도 데려다줬다. 숙소에 도착해 마당에 반별로 줄을 섰는데. 모자를 쓴 교관이 신체검사한다고 했다.      


“술같은 이상한 물건은 지금 내놔라.”     


아이들은 저마다 몇 개의 물건들을 내놓았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배짱을 부렸다. 저녁을 먹고 촛불을 켜고 소원을 빌자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기 자랑 시간이 돌아왔다. 무대에는 형형색색의 핀 조명과 싸이키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나는 다른 반 친구들의 공연을 보며 마지막 연습에 매진했다.      


드디어 내 차례,      


“왜 난 이리 널 기리는 걸까? 왜 내 모습 보이지 않는 걸까.”     


박남정의 노래가 사이키 조명과 함께 흘러나왔고, 나는 로보트춤을 추면서 등장했다. 객석은 아이들의 비명으로 가득하였고, 나는 더욱 현란한 춤을 선보였다.      


당연히 내가 1등이었고. 상품도 받았다. 마지막 캠프파이어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니 저녁 10시쯤 됐다. 우리는 몰래 숨겨 들려온 '캡틴큐'를 꺼냈다. 자는 척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우리 반 숙소 2층 침대에서는 화투나 트럼프를 치는 아이들이 있었고, 뽀리 클럽은 삥~ 둘러앉아 캡틴큐 뚜껑에 한 잔씩 돌려 마시기 시작했다.      


“캬~~ 너무 쓰다. 이런 것을 어른들은 왜 마시지?”
 
“토할 것 같아. 나는 못 먹겠다.”     


“술 먹고 조금 지나니 기분이 알딸딸해지네.”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될까?”     


저마다 말들이 많았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는 지끈지끈, 속은 울렁울렁했다. 아침 구보를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어쨌건 내 생애 첫 외박은 그렇게 끝이 났다.     

 


# 졸업


6년의 세월이 흘러 졸업식 날이 됐다. 아버지는 멋쟁이 양복을 빼입고 나의 졸업식을 보러 오셨다. 원양어선 다녀오시는 길에 들른 일본에서 사 온 라이카 필름 카메라로 많은 기념사진을 찍어 주셨다. 그런데 친구 대희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아버지는 부자야, 너희들을 모두 종로에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고 공책과 연필도 사주신대. 같이 가자~”

     

“그래? 와~!!진짜? 그래 다 같이 가자.”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부지에게 가서 말했다.


나는 친구 아빠 따라서 종로에 가서 짜장면 먹을 테니 집에 먼저 가시오



나는 지금도 교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생각하면 쓰디쓴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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