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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거운물 찬물 Nov 21. 2021

<옥케이, 벨라이스>9부 서울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1980년 봄, 내 나이 5살, 나는 청산도를 떠나 서울로 이민 왔다.

     

보루꾸집 앞마당에서의 물장난도, 3대나 망가뜨린 말자전거도, 2살 때 행님이랑 사진 찍었던 청산사진관도 모두 안녕이었다. 그리고 나의 셋째 누나 유미누나와도 안녕이었다.


유미누나는 금진 고모의 유일한 딸이었으나 4살 때 고모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우리 집에 살았다. 유미누나는 우리 엄마를 숙모가 아닌 엄마라고 불렀다. 4살 때부터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얼마나 슬펐을까? 가족이 자기만 버리고 서울로 가버린 10살 유미누나에 심정이 가늠조차 가지 않는다.

부모와 형제가 또 나를 버렸구나



새벽 6시 경영호가 닻을 올렸다. 내 손에는 벽걸이 시계가 들려 있었다. 완도행 배는 파도를 갈랐고, 엄마는 뱃머리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무심한 ‘대묏산’아~”      


완도에 도착해 큰 짐은 이삿짐센터에서 서울로 붙이고, 행님을 제외한 우리 집 다섯 식구는 육지행 뗏목에 몸을 싫었다.      


완도에서 광주까지 울통불통 비포장 산길을 7시간 달려, 광주 공용터미널에 도착했다. 또다시 40분을 걸어서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서울까지는 고속도로가 있어 4시간 반이면 도착했다. 처음 짐을 푼 곳은 행님이 자취하던 봉천1동 우물이 있는 집이었다.     


엄마는 매일 아침 우물에 비친 달님게 소원을 빌었다. 며칠 후 우리집은 봉천10동 석우네 집으로 이사갔다. ‘L’자형 옛날 양옥집이었고 집주인은 따로 살았다. 우리 집식구들은 넓은 2개 방에 세 들어 살았다. 엄마가 처음 산 가전제품은 냉장고였다. 주인집 냉장고에 김치 냄새 풍기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봉천동 현대시장


아버지는 성팽이 오춘과 염천교에서 구둣방을 하셨고 엄마는 현대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건어물 장사는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에게 친절한 시장 사람들도 드물었다.    

  

“아~ 이러다가 굶어 죽겠구나!”     


엄마는 당시 100만 원어치 건어물을 처분하고. 해물 장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섬 출신 엄마의 해물 가게는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는 5살이었다. 누나 2명과 행님은 학생이었고, 부모님은 새벽에 나가 밤늦게 오셨다. 내 밥을 챙겨주고, 같이 놀아줄 사람은 없었다.      


동네 아이들도 나에게 조금씩 경계를 풀었다. 나는 온종일 놀이터나 집 앞 공터에서 놀다가 배고프면 엄마의 가게로 가서 “100원”만을 외쳤다. 나는 대략 하루에 500원 이상은 까먹었다.    

  

너무너무 심심해서 혼자 공을 차고 막는 놀이도 해 봤다. 하루는 담벼락에 걸터앉아 거울 속에 비친 나와 내기를 한 적도 있다.      


“누가 더 빨리 움직이나?”
 
 “휘~익! 쓰윽,휙! 쓱!”     


아무리 빨리 내가 움직여도 거울은 나보다 한 발 먼저 움직였다.      


“동시에 움직여야 하지 않나?” 조금 이상했다!


     

# 아부지의 구둣방, 옥케이 벨라이스 


아부지의 구둣방이 영등포, 약수동, 을지로 3가로 옮겨 다녔다. 나는 한번 가본 길을 잘 기억한다. 아부지를 따라간 친척 집을 다음날 혼자서 간 적이 많다. 이유는 심심해서서다. 엄마의 해물 가게에서 종일 살다가 심심하면 아부지의 영등포 구둣방에 102번 버스를 타고 갔다. 영등포에 가면 항상      


“정박사 왔냐?”     


“짜장면 시켜줄까?”
 
“예! 아부지, 곱빼기로 시켜주세요."

    

"옥케이 벨라이스 (Ok~Very nice)"


"정박사는 아이켐(Item)이 좋아~."


나는 짜장면을 무척 사랑했다. 그런데 5살 꼬마가 곱빼기를 시키면 주인이 안 주기 때문에, 항상 아부지와 같이 가서 먹었다. 아부지는 보통, 나는 곱빼기….    

 

하루는 짜장면 대신 고로께 빵을 사 놓으셨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울면서 뛰쳐나갔다. 주위를 서성이다 아부지 가게에 침을 뱉었다. 철부지 5살이었다.      



#제기동   

  

작은 아부지집은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이었다. 아부지를 따라 갔는데 그곳에는 세원, 유리 두 명의 사촌 동생들이 있었다. 나는 청량리 성바오로 병원에서 태어난 세원이와 작은어머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1984년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나는 주말마다 제기동에 갔다. 차비도 없이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갔다. 그 당시 땟국물 흐르고 차비도 없는 나를 유괴할 만한 정신이 나간 어른은 없어서 다행이다.


나는 제기동 한옥 앞에서 몇 시간씩 서성였다. 초인종을 누를 용기는 없었다. 9살 어린애도 그다지 자기를 반기지 않는다는 눈치는 있었다. 보통 저녁때가 되면 장보러 작은어머니나 유미누나가 밖으로 나왔고, 나는 우연히 '발견'되었다.


유미누나는 우리 집이 서울로 올라와, 약방 큰집에서 살다가, 중학생이 되어 작은 아부지네서 살기 시작했다. 유미누나는 듀란듀란의 ‘존 테일러’를 무척 좋아했다. 방 한가득 존 테일러의 사진이 도배되어 있었다. 유미누나는 한 살 동생 선경이 누나랑은 친구처럼 지냈다.     

 

사촌 동생인 세원이와 유리는 착하고 똑똑한 아이들이었다. 작은엄마가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둘 줄에 누가 공부를 더 잘할 것 같니?”     


친척들 모두는 장남인 세원이가 서울대에 갈 것이라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센스있고 예술적 감각이 있는 유리가 서울대에 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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