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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거운물 찬물 Oct 20. 2021

<옥케이, 벨라이스>7부 엄마와 딸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 청산도 "묵심이"



국민학교 아래 시골집 작은방에서 햇볕이 제법 따가운 1967년 6월에, 엄마는 보리가실을 마치고 온 후 오후에 나를 낳았다 한다.

    

할머니가 “딸이다~” 라고 아부지한테 얘기하자 "참말로 딸이요? 다시 한번 봐 보시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아들을 원했었던 에피소드도 있다.  

   

그래도 할머니는 지왕님께 매일 빌었단다. 하루에 똥 한 번씩만 싸고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달라고….

    

그래서인지 나는 먹방도 좋았고, 아직까지 크게 아파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히 잘 살아왔다.    

 

단지 타고나게 피부가 약하게 태어났고 피부층이 남들보다 좀 얇다.     


얼굴엔 실핏줄이 보이 게 붉었고 눈도 작은데다, 게다가 뚱뚱하기까지 해서 어디 데리고 나가면 '예쁘다'는 말을 못 들었다 한다.     


지금도 얼굴을 포함 몸의 모든 피부가 조금 추우면 금세 파래지고 조금 더우면 금세 빨개진다. 집안일도 고무장갑을 끼우지 않으면 손 피부가 갈라져 꼭 장갑을 끼고 해야 할 정도로 약하다. 그래도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나의 이런 상태를 잘 알고 있기에 항상 남달리 피부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간혹 피부미인이라고 남들에게 칭찬도 듣는다.

  

3살 무렵에 우리 식구들은 분가해 청산도 아랫동네 빨간 양철지붕을 가진 집으로 이사를 왔고, 엄마는 나를 업고 다니면서 처음엔 이것저것 품목을 바꿔가며, 시도한 끝에 타고난 장사수완으로 "잡화점식 전빵"을 운영했다. 농업과 어업이 주 종목이였던 청산도에서 장사로 인한 현금의 흐름을 쥐고 있었기에, 나름 유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 시절에 마침 교회부설 유치원이 하나 생겼는데, 유일하게  우리집에서 나만 유치원을 다녀 졸업했으니 엘리트인 셈이다.

   

호기심도 많아서 아부지를 조르고 졸라 '어장'도 따라나섰다. 그땐 "여자를 배에 태우면, 재수가 없고 어장을 망친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그래도 조르고 졸라 기어이 따라나섰다.

     

밤새 선원들이 그물을 치고 새벽녘에 그물을 다시 끌어 올릴 때, 나는 멀미로 계속 토하면서도 저 멀리 수평선 위로 고기들이 뛰어올라 다시 바다로 들어가고, 마치 자기들만의 향연을 펼치는 것 같은 모습을 본 걸,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어린 내 동심을 아름답고 순수하게 채워줬기에, 지금도 감사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 서울 상경


중학생이 되었고 국민학교와는 다르게 성적표가 ‘수우미양가’가 아닌 성적이 구체적으로 나왔다. 그런데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반에서 1등을 했다. 머리는 그저 보통인데 다른 아이들이 공부를 못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가야 하는데, 전라도 지역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오빠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마땅한 거쳐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고생하고 있었고, 또 대학가라고 서울로 보내놨더니 고를 지원하는 바람에(지금 생각하면 공고 갔다고 대학을 못 가는 건 아닌데…) 자식들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 엄마 아부지는 서울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79년 1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서울로 전학왔다. 말 그대로 시골 촌뜨기의 서울 입성이 시작되었는데, 그래도 기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적인 충격은 있었고, 현실 적응력은 빨랐으나 한창 공부에 전념해야 했었는데, 엄마 대신 집안일을 해야 했다. 


아부지의 '풀리지 않는 현실'로 집안 분위기는 무거웠기에, 내면에는 반항심도 같이 키우고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마음이 어두웠다. 수도여고를 다녔으나 무엇보다 왜 공부를 잘해야 하는지 목표가 없었고, 또한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연히 성적이 좋지 않으니 대학은 떨어졌고, 그래도 대학물은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재수를 했지만 공부는 하지 않았고, 이듬해 전문대 토목공학과를 지원 합격했었다,

    

그런데 "여자가 토목 공학을 나와서 뭐 하냐"며 자식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음에도 아이러니하게 '아부지의 반대'로 입학은 무산되었다.

     

나 또한 별 뜻이 있어 지원한 건 아니었기에 포기했었고, 아마도 그때의 우리 집 상황은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기에 이해가 가기도 했었다.   



# 김포 공항


그러다 고졸 출신인 내가 운이 좋게 88년도 4월 19일에 공항 검색 요원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비록 대한항공이나 항공사의 정식 직원이 아닌 용역 회사의 파견 사원의 형태이긴 했지만, 천직으로 여길 만큼 근면과 성실함으로 무장하고 '프라이드'를 갖고 근무 했었다. 그랬더니 한 부서의 리더가 되었고, 10년이 지난 뒤에는 공항 검색대의 여자 총책임자인 리더가 돼 었었다. 저절로 된 건 아니고 서비스 마인드로 정말 중무장을 하고 많은 노력 끝에 얻어진 결과였다.

   

그러다 이젠 더 이상 높이 올라갈 진급의 자리도 없었고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을 때쯤, 용역 회사였던  본사로  보직을  옮기게 됐다.

  

의료사업팀에 소속되어 병원에 파견된 사원 관리업무를 맡았었는데 생각보다 사람 관리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사무 행정 능력이 갖춰지지 않았던 컴맹인 내가 컴퓨터로 해결해야 할 일들도 많았고, 일일이 남에게 물어서 처리해야 했기에 어려웠었다. 디지털의 역습이기도 했다.     


그래도 자존심상 못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 적성에 안 맞고 어려운 업무를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나중 건강상에 무리가 왔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였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사직을 결심했고,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사회생활은 정리되었다.

 


#찬란한 젊은날의 사랑

   

한창인 20대를 지나 30대 초반이었던 터라 나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나의 "첫사랑"은 잘 살고 있을까?

"두 번째 나의 님"도 잘 살고 있겠지.

"세 번째 나의 연하남"도 잘 살고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 세 명의 남자들과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 백화점


그 후 아주 우연한 계기로 작품보석을 만드는 쥬얼리 디자이너를 만났다. 디자이너의 브랜드가 백화점에 입점된 터라, 그의 상품을 판매하려 백화점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렇게 판매직 사원이 되었다.

     

음악도 흘러나오는 쾌적한 환경과 예쁜 물건들로 둘러싸인 백화점 생활은 무엇보다 내 적성에 잘 맞았다.

    

그리고 천부적인 세일즈 능력이 나에게 잠재돼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내 역량이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맘에 드는 브랜드 회사를 선택, 옮길 수도 있는 구조가 맘에 들었다.

     

서서 일해야 하는 힘든 면도 있었고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판매가 나의 적성과 잘 맞았으므로 선택했던 브랜드마다 최선을 다해 근무했었다.


그러다 욕심이 생겨 월급쟁이가 아닌 회사의 중간 관리자로 사업자 등록을 내고 매장을 직접 꾸려나가게 되었다.

     

쉬지 않고 일했던 터라 힘은 아주 많이 들었지만, 오너의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고, 또한 그 무렵엔 실제로 내가 우리 집 가장이기도 했었기에 정말 악착같이 일했었다.

    

그러다 2008년 리먼 사태로 경제 파동이 왔고, 우리 매장 매출도 반토막이 됐다. 

  


# 방송대

  

일단 다시 기회를 찾고자 퇴사로 매장정리를 했고, 고졸이라는 핸디캡을 벗고자 2004년에 입학한 방송대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고 퇴근 후 천근 만근 된 체력으로 힘들어서 미뤘던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치사하게 나에게는 돈이 별로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주머니가 궁해졌고 2010년 같은 브랜드에 재입사를 했다. 이번에는 사업자의 형태가 아닌 월급쟁이로 입사를 했다.  

   

왜냐면 다시 입사한 브랜드 상품군은 프랑스 본사 사장님이 바뀌면서 상품 디자인 컨셉이 크게 달라져, 한국 시장에서 고객들한테 호응을 잃어가고 있었던 터라 사업자 등록은 부담이 되었고 그냥 안전하게 월급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그 무렵 "우진이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누나가 직장도 없는 백수라 하면 사돈댁에 창피하기도 할 거 같아 입사를 결심했다.  

   

‘열심’으로 1년 정도 다시 근무 돈을 모았고 이번에도 나머지 방송대 공부를 끝마치고자 퇴사를 했다. 혹자는

직장과 같이 "병행"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게 방송대인데  같이 해야지 왜 휴직까지 하면서 그러느냐고 반문도 한다.  

   

나 또한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하루 종일 서서 고객들에게 판매를 해야 하는 백화점 생활은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현실의 방송대 공부량은 정말 방대했다.   

  

또한 '완벽주의자인 내 성격'은 하나를 하더라도 대강대강 넘어가지를 못한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는 한데 사람들은 타고난 성향과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했고 그걸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마 병행했었다면 병이 나서 건강을 헤쳤을 것이고, 생계인 백화점에서의 근무가 평판이 나빠져 생명력이 짧아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 절망의 시작


그렇게 공부와 요가를 병행 하던 중 오빠의 한정식집으로 인해 집을 담보로 한 대출이 있었고, 진행 과정과 결과가 좋지 않았다. 

   

잠깐의 수랏간 "지배인"도 나에겐 색다른 경험이였었고, 이제는 흐려졌지만, 지도자 자격증을 목표로 했던 요가는 지금 나에게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는 선물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오빠의 외식사업은 실패로 끝났고 나는 아직 졸업  마무리를 못 했는데, 집을 담보로 한 대출 빚을

감당해야 했기에 2014년에 다시 백화점에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근무했으나, 회사의 구조적 결함으로 두 달밖에 근무 못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절망감은 커졌고 대출 빚의 압박은 나를 짓눌렀다.    


그래도 다행히 예전에 근무했던 브랜드가 다른 회사로 영입되면서, 그때의 경력을 인정받아 곧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통업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에 언제 생명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런데 15년 전에 근무했던, 나를 아주 아주 비싸게 인정해주셨던 여사장님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녀의 죽음으로 그 브랜드는 문을 닫았고, 나중 내가 늙어서  나를 받아줄 브랜드가 더 이상 없을 때, 언제고 손을 뻗어서 그녀의 브랜드로 입사 의뢰를 할 수 있었던 그 여사장님의 죽음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마치 마음속 보험 같은 그물망이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리고 6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는데, 아무것도 남부럽지 않을 조건을 가진 그녀의 죽음이 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하는 계기도 됐었다.

   

그럴 즈음 2016년에 동명파레스가 팔렸고, 엄마의 청산 행이 결정되었다.   

 

틀린 선택은 없다!! 언제나 순간 최선을 다했을 뿐…

     


빌라였지만 최초의 서울 우리 집이였고, 곳곳에 너무 많은 추억이 묻어 있었기에 지금도 아쉽고 지나가다 쳐다보게 된다. 경전철이  들어온다고 알고도 있었는데 직장이 불안한 나로서는 대출 빚이 버겁기도 했고, 엄마 또한 이렇게 됐으니 "청산에서 살아보는 거 또한 마지막 소원"이라고도 했다.

          

엄마와 나는 '52년'을 동거한 가장 오래된 사이였는데 이사가 이루어졌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2017년에 우리 매장이 회사와 백화점 간의 알력 다툼으로 백화점에서 빠지게 되었다.


상실감이 어마어마했다. 아마 내 인생에서 최고의 외로움을 맛봤던 거 같다.

     

엄마와의 헤어짐…, 직장의 상실

     

물론 젊었을 때는 독립을 꿈꿨었지만, 그때마다 엄마의 붙잡음으로 나는 같이 생활할 수밖에 없었고 나를 붙잡는다고 투덜거리기도 했었는데, 막상 헤어지고 나니그동안 엄마에게 보이지 않게 내가 엄청 의지하고 있었던 거 같다.   

  

문득 현실의 나를 돌아보니 남의 집 전세를 살고 있었고, 돈 모아놓은 것도 없었고, 원하던 요가지도자 자격증도 취득하지 못했고,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나의 '네 번째 사랑"과도 경제력이 없기에 다시는 만날 수 없어 많이 슬프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 노후 준비


그래도 주변 평판이 좋아서 근무 제의가 들어왔고, 여러번 옮기기는 했어도 일자리가 없지는 않았다. 옮기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요가자격증들을 준비했다.

    

내 뿌리를 찾아 청산도에서 살 생각으로 민간자격증이지만 '동화구연과 베이비시터 자격증'을 취득했고, 노인 인구가 많음을 감안해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과  '웃음 실버지도사', '행복 웃음 명상 요가 지도사' 등을 취득했다.

    

그리고 나중 나의 고객이 될 수가 있는 엄마를 염두에 두고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이건 국가 자격증이라, "내가 늙어서도 써먹을 수"도 있을 거 같다.

         


# 졸업


그러던 중 2019년에  드디어 '졸업장'을 받았다. 물론 근무로 인해 졸업식엔 참가 못 했고 학사모도 못 써봤지만, 포기하지 않고 15년 만에 우수상을 받으며 졸업했다는 거에 대해 내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러던 중에 '다섯 번째 나의 동창 친구'와의 만남…. 아직은 인연이 아닌가 보다.    

      


# 갑질


2020년 코로나의 출현으로 직장 상실…. 판매의 부진에 따른 인원이 감축되고 근무시간도 줄어들었다. 오너들은 완전 '갑 중의 갑'이 되어 말도 안되는 급여를 책정했고 지금도 열악한 처우로 대접한다.



# "After Corona"   

  

나는 다시 꼭 백화점에서 근무해야 하나 마나 하는 또 다른 귀로에 서 있다. 아직은 방향 설정을 못 했지만, 방향만 설정되면 속도를 내는 건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내 이름은 "정인영"이니까!

     

'67년생 정인영'     

짐승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처럼,


정인영이라는 이름에 명예를 걸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직 솔로다.


못 간 그것도 있고 안 간 그것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란 좋은 것이다. 최근엔 많은 외로움을 겪으면서

지금은  결혼에 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나는 내편이 되어줄 내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사랑도 다시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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