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rch봄 May 07. 2020

짜증을 정리하며

‘짜증’이 만들어낸 글

어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올랐기 때문이다. 마치 아이처럼 짜증을 냈다. 아빠에게 전화를 해달라는 엄마에게, 방에서 미적대는 것도 싫은데, 내 물까지 쏟은 동생에게. 정말이지 동생에게는 크게 짜증이 났다. 소파에 뛰어들다시피 앉은 동생은 소파 위에 놓여있던 물을 쏟았고 ‘이 돼지야!‘라는 문장이 뇌까지 차 올랐지만 다행히, 내 입은 그 문장의 등장을 막았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다행이다. 그 말을 하는 대신 먹던 빵을 소심하게 집어던지고 쓰레기를 신경질적으로 집었다 놓았다. (생각해보니 참 소심하다) 내가 짜증이 난 이유는 사실 별거 없다. 어제 영어공부를 하며 문법을 시작했는데 범위도 너무 많고 자잘하게 모르는 것들이 많았던 거다. 평소와 똑같이 쉬고 똑같은 양의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제는 왠지 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에서 열이 났다. 그래서 가족에게 짜증을 냈다. 마치 고등학생 때의 나로 돌아간 것처럼. 하지만 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므로, 그 짜증이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도 그렇게 했다. 아직도 덜 큰 거지. 내가 짜증을 낼 때 아빠는 걱정을 한다. 어디가 아픈지, 힘든지, 하지만 무엇 때문에 힘든지 직접 물어보지는 않는다. 그저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뗄 뿐이다. 엄마는 회피를 하는 것 같다. 속으로는 걱정을 하는 것 같은데 겉으로는 나 대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 난 짜증을 내기 싫어 입을 꾹 다물지만, 항상 대답을 바라는 질문을 던지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난 아직 괜찮아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신호를 보내는데도, 엄마는 ‘괜찮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엄마만의 걱정의 표현인 것을 알고 있지만, 사실 꽤 오랫동안 쌓인 이 따뜻한 억압이 자꾸만 나를 누른다. 아직 덜 큰 나는 그게 맏딸에게 거는 기대라 생각한다. 왜 나는 항상 괜찮아야 하지? 조금은 버겁고 서운하다. 동생은 그냥 착하다. 나는 동생이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항상 퉁명스러웠고 가르치려 들었다. 그 애는 군대도 이미 제대한 다 큰 성인인데 말이다. 요즘 들어 조금 친해졌다. 생각보다 말이 통했고 재미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 짜증을 냈다. 착해서 싸우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난 야비하기도 하다.) 가족끼리 밥을 먹는 동안 눈물이 비질비질 나오려는 걸 힘들게 참았다. 가족의 따뜻함에 모든 것이 미안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투정이었을까. 결국엔 뛰쳐나갔다. 한강 가까이 산다는 것이 이럴 때 가장 감사하다. 15분만 걸어가면 한강이 나오고, 그 탁 트임에 어느새 내 한숨은 비명이 된다. 내가 나가는 시간은 항상 5시 30분에게 6시 사이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뛰면 차오르는 숨에 생각을 잘 못하니까 그냥 뛴다. 그렇게 뛰다가 더워지면 걷고, 그러다가 야외 운동기구들이 나오면 10분 정도 운동을 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잔디밭에 벤치들이 놓여있고 한강과 하늘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어제는 차올라 갇혀있는 짜증을 걷어내려 30분 정도 가만히 강 위에 비친 노을을 감상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 용쓰면서 산다’ 채용이 취소되고도 어느새 일어나 쉴 틈 없이, 버리는 시간 없이 살고 있는 이 거지 같은 상황에 신물이 난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억울하고, 언제부터 돈을 벌 수 있을지 막막하고, 대체 멋져질 수는 있는 건지 궁금해하며 노을에게 한탄했다. 어쨌든 그건 내 현실이고, 난 최악의 암흑을 걷는 중이며 그 걸음을 어떤 식으로 택할 것인지는 모두 나에게 달렸으므로 모든 게 어쩔 수 없다. 그냥 그런 거니까, 그런 날도 있는 거다. 어느새 짜증과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인정으로 바뀌고 구름이 더욱 빨갛게 타올랐다. 그 붉은색이 어두워질 즘 다시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집에 와서도 버거웠던 공부를 어쨌든 끝냈다. 조금 울면서 끝내기는 했어도 보람은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 아빠가 용돈을 식탁에 놓아두셨다. 저녁을 꼭 사 먹으라고. 그 용돈에 담긴 따뜻한 걱정들이 어제의 내 행동을 반성하게 한다. 감사하다 인사했다. 새벽 아르바이트를 간 동생에게도 힘내라며 사과의 카톡을 보냈다. 착한 내 동생은 당연히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주었다. 난 현재 고통 속에 살고 있지만, 사실 더욱 따뜻한 어느 곳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




Today’s Music


Schumann - 트로이메라이


https://youtu.be/cnSvUjwvZZs


누군가의 짜증 나는 하루의 끝에 따뜻한 음악이 함께 하기를.


작가의 이전글 비워내기의 끝자락에서 케이크 한 조각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