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
우리 집 아이들은 명절에 용돈을 받으면
본인들이 원하는 만큼을 떼 주고 나머지는 적금 통장으로 넣어 준다.
(아이들과의 신뢰를 쌓기 위해 이체 내역을 꼭 보여 준다.)
이번 추석에는 15만 원의 용돈을 받았는데
첫째 아들내미는 늘 그렇듯 적금 통장에 올인하기로 하고,
둘째 딸내미는 평소 갖고 싶던 카메라를 사고 싶다며 39,900원이라는 가격까지 이야기했다.
대화를 자주 하는 편임에도 딸내미가 '평소 갖고 싶어 하던 카메라'가 있는 것도 놀라웠고
쿠팡에서 가격까지 알아본 것도 조금 놀라웠다.
돈을 쓰는 소비 기준은
용돈을 주기 시작한 5년 동안 철저히 주입시켰기 때문에
본인이 주도권을 갖게 하고 있어서 그러자고 했다.
어제 로켓배송으로 주문을 했고
오늘 바로 받아볼 수 있었다.
딸내미는 바로 카메라를 사용해보고 싶은 마음에
공원에 가고 싶다고 했고
집돌이인 아들내미는 집에 있고 싶다고 하여
남편과 셋이 공원으로 나섰다.
공원을 가는 길은 선선과 쌀쌀 그 어느 중간이었다.
외투를 걸치고 올 걸 그랬다며 둘째가 투덜거리길래
내가 입지 말라 그랬냐고 투덜거렸더니
딸내미 하는 말이,
'엄마, 외투 입어?'
했더니
'더우니까 안 입어도 돼.'
라고 했단다.
딸내미가 물어온 건 기억이 나는데
내가 그런 답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새하얗게 기억이 나지 않을 땐
조금 무섭다.
공원을 가는 길은 아파트 단지를 거쳐서 가게 되는데 도심 속에서 볼 수 없었던
난생처음 보는 예쁜 새가 날아다녔다.
(나중에 인터넷에 찾아보니 물까치라는 엄청 흔한 새였다.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건지, 정말 처음 본 건지 알 수가 없다.)
딸내미가 얼른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새를 찍으려고 노력했지만
새가 워낙 잽싼 탓에 찍으려면 도망가고 찍으려면 도망가니 당최 찍을 수가 없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기분이 지하동굴까지 내려가는 아이라 괜히 두려움이 나서
나라도 사진에 담아 보자 싶어 얼른 휴대폰을 켜고 사진을 찍었다.
둘째와는 180도 반대로 감정기복이 잘 없는 정승 같은 남편도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길래
혹시 나와 같은 마음인가 싶었다.
예상과는 달리 딸내미는 생각보다 아쉬워하지 않았고
그 이후 참새떼샷도 실패했다.
공원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공원은 나를, 사람들을
여유 있어 보이게 만들어 준다.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공 차고 자전거 타고 보드도 타고.
그걸 앉아서 이렇게 구경이나 하면서
가볍게 커피를 한 잔 하기도 하고 과자 같은 간식도 먹고.
건강해지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공스장 기구와 한 몸이 되어 운동도 한다.
그들과 어우러질만한 위치에 남편과 자리를 잡고 앉아
"엄마, 아빠 여기 앉아 있을게 가서 쭉 찍고 와."
라고 했더니 딸내미는 쭈뼛 거리며 서, 너번을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같이 가고 싶어."
라고 했다.
남편과 둘이 오손도손 앉아 있고 싶어 한 번 더
"아니 이렇게 혼자 가서 쭉 찍고 와서 보여줘 봐 봐."
라고 했더니 다시 또 몇 번을 서성이며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시 와서는
"엄마랑 같이 가고 싶어."
그런다.
아, 왜 자식새끼는 이렇게 못 이기겠는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며 딸내미와 함께 사진을 찍으러 슬렁슬렁 출발해 보았다.
귀엽다.
둘째는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물구나무서서 봐도 귀엽다.
미치도록 귀여워서 미치겠다.
그래서 사진을 자꾸 찍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이제는 사진을 찍기 싫어한다.
왜 그러냐고
이 소중한 시간을 담아서 간직하고 싶다고 아름답게 포장해 봐도 절대 못 찍게 한다.
이유는 내 미친 마음이 가닿았는지
'부담스러워서'라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뒤에서나마 몰래몰래 찍어 놓는다.
그렇게 그 뒤를 쫓아다니다 보니 나도 사진이 찍고 싶어 졌다.
렌즈인척 하는 핸드폰 카메라 렌즈가
작위적으로 날려버린 포커스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사진을 찍고 돌아다니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행복했다.
딸내미도 그래 보였다.
집에 돌아와 딸내미가 찍은 사진들을 보는데,
아직 미숙해 보이지만
그래도 내 새끼는 다 천재로 보이는 이중적인 나를 또 한 번 발견하면서.
아, 행복했다.
하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