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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혜 Nov 07. 2023

여정의 시작

좌충우돌 39세, 프라하 상륙하다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일을 쉬게 되면서

귀중한 어른 방학을 보내는 동안

여행을 가야겠다 결심하고 3개월 전 프라하행 비행기 표를 샀다.

너무 먼 훗날 여행처럼 느껴지더니 어느새 이륙을 앞두었네.

부산인 나는 출국 전날 상경해서 유미언니네 집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공항철도 타기로 했다.


낮에는 대구에 들러서 오랜 멘토이신 오연택 목사님, 혜란 사모님과 태국음식을 먹으며 격려와 기도를 받았고,
저녁엔 서울 유미 언니네에 하룻밤 묵으며 정성스러운 환대를 받았다. 직접 만든 한식 밥상에 무려 안방 침대를 내어주고 (주인은 거실에 자고 손님이 안방에 자는데 이게 맞나..싶었지만 이 집의 룰이란다) 강아지 홀리는 낯선 내가 영 수상한 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으르르 거리다가 자기 장난감을 내게 갖다주고 놀아달라고 했다. 그렇게 따스한 시간을 지나 드디어 결전의 날, 6시반에 언니가 만들어 준 귤주스를 먹고 집을 나섰다.

된장국 두 그릇 드링킹


짐을 하나 부치고 비장한 마음으로 13시간동안 나를 수송해줄 비행기에 탑승, 비행기 뜨자마자 밥이 나오니 좋다. 나는 해산물 식단으로 특별식을 사전 주문해서 제일 먼저 밥을 받았다. 점심 메뉴는 오징어, 대구, 조개 관자, 아스파라거스 등등을 토마토소스에 볶은 요리네요.    
  


장거리 비행에서는 한 비행기에 탑승한 모든 이들이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 같다.
깜깜하게 소등한 분위기가 무서워서 으앙으앙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도,
내 자리를 탐내시다가(먼저 탑승하셨는데 복도쪽 내 자리에 앉아 계심^^) 이내 중간 자리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시고 옆에서 담요 뒤집어 쓰고 주무시는 백발 할아버지도.
기내에 번지는 라면 냄새에 질세라 신청해서 컵라면 드링킹 하는 나도.  
싫으나 좋으나 모두 함께 13시간을 견뎌야 하니까.
이 비행기에서 반나절을 함께 먹고 자고 같은 자세를 견디는 것만으로 약간 전우가 된 기분이 든다.

나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볼 뮤지컬 레베카 예습도 하고, 오프라인으로 다운 받아 둔 여행 가이드도 읽고 (트립플이라는 앱에서 다운) 이렇게 여행 일기도 쓰며 대륙들을 건너고 있다.  
아, 옆자리 할아버지랑 이야기를 나눠보니 프라하의 교수님이신데 한국 대학에서 20일 동안 포럼을 하고 (대전 한밭대학교, 시흥 어디 대학교를 가셨다고 함)프라하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한국 기념품은 비닐봉지에 싸인 초코파이 한 상자!


오늘 저녁에 프라하 도착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는데 기내에서 영화 <플로라 앤 손 FLORA and son>을 보고 나니 재즈 클럽에 가서 라이브 뮤직을 듣고 싶어졌다. 비긴 어게인, 원스의 감독인 존 카니가 만든 영화인데 어쩌면 이 사람은 이렇게도 음악과 인물의 삶을 절묘하게 배합하는지, 싱글맘인 플로라가 제프에게 온라인으로 기타를 배우면서 자아를 찾고, 늘 원수 사이던 사춘기 아들과도 함께 음악을 만들며 서로의 의미와 사랑을 깨닫게 되는 스토리에 배경은 또 나의 첫 유럽 여행지였던 아일랜드 더블린이라서 반가움에 소리지를 뻔 했다.
일단 도착해서 상황을 보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곳으로 가자구.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13시간이 끝나고 프라하 공항에 도착했다. 옆 자리 할아버지는 내가 걱정되시는지 체코는 한국보다 좀 덜 안전하니까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신 후, 쿨하게 굿바이 인사도 없이 내리셨다. ㅎㅎ 

4시ㅣ 40분이건만 한밤중처럼 깜깜하고 비가 쏟아진다. 당황스럽긴 하네. 공항버스 타고 40분 가량 숙소 쪽으로 이동하는데, 버스 앞에 질서정연히 줄 선 사람들은 한국인 관광객들 뿐, 버스 오자마자 외국인들은 그냥 새치기 작렬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겠다. 버스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니 어두운 가운데 묘한 기시감이 든다. 낯선 도시인데 낯설지가 않고 어딘지 모르게 아늑한 기분이 든다. 생각보다 공항이 으리으리하지 않고 시골 버스 터미널처럼 소박한 사이즈라서 그런가?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 분이 활짝 웃으며 버스타는 곳을 가르쳐주셔서 그럴까. 깜깜한데도 걱정도 되지 않고 편안하다.


이 블루맨이 호스텔 마스코트 같은데 엘베 탈 때마다 흠칫 놀랜다

숙소는 고심 끝에 기차역 근처로 정했는데, 관광지가 밀집된 올드타운 쪽 숙소들은 시끄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였고 빈대를 피하려고 최대한 깔끔하고 청소 잘 해주는 곳을 골랐다. 공항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만난 건 빗줄기와 돌바닥. 울퉁불퉁 돌바닥이 많이 깔린 프라하는 수많은 캐리어들의 바퀴를 아작낸 악명높은 곳이다. 다행히 숙소가 중앙역 코 앞이라 돌바닥은 짧고 굵게 끝났다. 맞은 생쥐 꼴로 체크인을 하면서 공용 키친 사용할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We have no Kitchen."

아, 내가 안일했다.

4년 전 두달 동안 아일랜드,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을 여행했을 때 호스텔에 가면 늘 공용 주방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공용 주방에서 장봐서 요리해먹으며 식비를 아낄 요량으로 캠핑용 프라이팬까지 사들고 왔는데... 이게 코로나를 지나는 동안 바뀐 시스템일 수도 있고, 동유럽 식일 수도 있고, 내가 그 부분ㅂ까지 체크하지 못 한 탓이 크지만,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또한 하나님의 큰 그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숙소에 짐 풀고 저녁을 먹어야될까 고민하다가 근처 마트로 가서 요거트랑 치약만 샀다. 요거트 종류가 어찌나 많은지 고르는 데 한참 걸렸는데 Bio 라고 붙으면  유기농 같은 그런 것 같아서 그걸로 골랐다.

유럽 마트에선 꽃을 항상 판매한다
요거트에 진심인 나라..이게 다 요거트
감 인가?
뚱뚱이 가지


근데 숟가락을 안줘. 한국은 기본으로 주시는데 ㅠㅠ 아무리 찾아봐도 일회용 숟가락은 마트에 없다.

일단 너무 지쳐서 숙소로 들고 와 최대한 마셔 보았다 ㅋㅋ

진하고 깔끔한 맛인데 컵에서 요거트가 잘 안 떨어져서 급기야 챙겨 온 젓가락으로 긁어서 어찌어찌 먹었더니 웃음이 난다.

요거트 젓가락으로 먹는 사람 나야나


안전하게 숙소에 잘 왔으니 그걸로 되었다. 오늘은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고 일찍 자는 것으로. 겨울의 유럽 숙소 하도 춥다고 말을 많이 들었는데 다행히 딱 적당한 온도다. 여기가 프라하구나, 내가 드디어 프라하에 왔다. 내일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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