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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혜 Dec 12. 2023

Day 10 다시, 맑은 하늘

비엔나장로교회, 뮤지컬 레베카, 알베르티나 미술관

정신없이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보다는 몸이 훨씬 나아졌지만 아직도 조금 무겁다.

원래 계획은 일요일 오전 예배 전까지 한 군데라도 구경 하려 했지만 그냥 숙소에서 쉬다가 나가는 게 낫겠다.

오늘 아침도 성경으로 영혼을 먼저 채우고 일용할 양식으로 육신을 채워봅시다.

어제 장 봐뒀던 과일과 밤 맛 요거트를 먹고 발포비타민B12도 물에 타서 먹었다. 밤 요거트에는 진짜 밤 덩어리가 들어있고 고소한 맛이 났다. 아침 먹고 나서 일기도 조금 쓰고, 천장에 달린 달걀같은 조명과 액자도 쳐다보면서 뒹굴뒹굴 하니 참으로 한가롭다. 맨날 눈 뜨면 짐 챙겨서 나가기만 바빴지 이렇게 여유로운 아침은 또 오랜만이네.

주황색 과일은 약간 멜론 같은 식감이었고 노란색은 망고, 블루베리.
달걀 조명과 알프스 산맥 같은 그림

충분히 쉬고 나서 밖을 나서니 흐렸던 어제와는 딴판으로 새파란 하늘이 나를 반겨준다. 한인교회를 찾아 가는 길은 늘 설렌다. 일요일 오전인데 지하철도 한적하다.

자전거를 많이들 타고 다녀서 횡단보도에 꼭 자전거 신호등이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여행자를 감싸안아주네요.
지하철 내부의 노약자석 표지가 귀여워.

오늘 예배 드릴 비엔나 장로교회는 빈의 서쪽에 위치해있는데 어엿한 간판도 있는 걸로 봐서 교회 단독으로 사용할 정도로 유서깊은 교회인 것 같았다. (많은 유럽 한인교회들은 현지 교회 건물을 빌려 쓴다) 처음 뵙지만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반갑게 맞아주시는 성도님들과 설교 말씀 속에서 행복한 주일 예배를 드렸다. 약간 예상은 했지만 성가대의 찬양이 특히 멋졌다. 아마도 음악 유학을 오신 분들이 많아서일 것 같다.

광고시간에는 여행 중 딱 한번 들를 뿐인데도 처음 왔다고 선물도 주시고 환영해주셨다. 예배 마치고 목사님께 인사드리니 여행자들에게 홍보 많이 해달라고 하셨다. 비엔나장로교회는 여행하는 나그네들에게 주일 예배와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고 하셨다. 말만 들어도 너무 따스한데, 점심으로 무려 소고기국밥을 주셔서 이미 냄새를 맡았을 때부터 심박수가 빨라졌다. ;;

교회의 청년 분들과 나란히 함께 앉아서 국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거의 모든 청년 분들이 음악 유학을 위해 오셨더라.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하러 오신 분도 계셨다. 어젯밤 내가 보았던 오페라를 보셨던 분도 계셔서 그 공연 난해했다고 공감하며 웃고 있노라니 마치 한국 교회 같다. 소고기국밥에는 달큰한 무와 넉넉한 소고기들이 국립 오케스트라 급으로 절묘한 하모니를 이뤄서 그릇에 코를 박고 먹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먹는 소고기국밥이라니! 이 국밥을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팔면 대박 날거라고 했더니 다들 까르르 웃으셨다. 한그릇 다 비우고 나니까 감기 몸살 기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여행자의 비상 식품 초컬릿을 선물로 주셨다
즉시 효력 감기약이자 향후 10년은 잊을 수 없는 그 맛 ㅠㅠ

감사 인사를 드리고 200% 충전된 몸으로 오늘의 여행 시작, 한국에서 미리 예매해둔 뮤지컬 레베카를 보러 간다.  멋진 스트리트 아트 작품들, 동그라미 벤치들을 구경하며 걷다보니 라이문트 극장에 도착. 낮 공연은 처음이고 과연 독일어 뮤지컬 + 영어 자막으로 잘 감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뮤지컬 박사인 대학 동기가 보내준 자료로 줄거리와 내용은 미리 익혀놨다.   

'브레맨의 음악대' 가 떠오르는
음악의 도시 다운 스트리트 아트군요
라이문트 극장 / 앞 마당

뮤지컬 레베카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를 원작으로 하고 히치콕의 영화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오스트리아 뮤지컬이다. 초연(가장 처음 열린 공연)도 오스트리아 빈에서였다고 해서 여기 온 김에 보고 싶었다. 일요일 오후 2시 공연이었는데 2층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1층 전석이 꽉 찼다.

티켓 가격이 3만원 정도다. 한국 공연의 5분의 1 정도 되는 가격일 게다.
외투 맡기고 받은 초록색 번호표 / 프레첼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

스릴러가 가미된 스토리에 배우 분들이 연기와 노래를 너무 잘하시고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훌륭해서 한 순간도 눈을 못 떼고 집중했다. 보기 전 염려했던 대사 이해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극이 흘러가는 상황과 배우들의 표정과 제스처만으로도 아, 이런 뜻이겠구나 예상하고 자막을 보면 십중팔구 맞아 떨어졌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뮤지컬은 '눈을 뜨고 꾸는 꿈'과 같다. 현실에서 만나기 힘든 이야기와 상황들이 화려하고 신기한 무대 세트로 구현되고,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과 노래에 푹 빠져들게 되니까.  언젠가 내가 만든 스토리로 뮤지컬을 만들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행복한 꿈을 꾸고 돌아갈 수 있는 스토리로.   

내 자리에서 본 시야, 딱 좋았다.
무대 인사 하는 배우들, 조연 프랭크역을 맡은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계신 분은 한국계 분이시라고 한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4시 반 정도였다. 내일은 빈을 떠나야 해서 아쉬운 마음에 시간이 촉박해도 미술관 한 곳을 더 가보기로 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인데 이름난 화가들의 초기작 등 작품이 많은 곳이다. 미술관에 도착하니 관람 종료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40분! 초스피드로 관람했는데 물론 여유있는 관람이 좋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재밌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이국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의 폴 고갱 작품
강렬한 색을 써서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앙리 마티스의 작품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그는 자연 풍경과 정원을 사랑했고 수련을 그린 작품만 250점일 정도로 많이 그렸다. 말년에 백내장에 걸려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판정받았는데도 끝까지 그림을 그렸기에 작품 색채를 보면 어느 정도로 시력이 약화되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잘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그 인상을 그대로 남기고자 했던 열정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이 작품 만큼은 속성으로 볼 수가 없었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
꽃다발을 선물 받았을 때처럼 행복해지는 모네의 작품
발레 무용수를 많이 그렸던 드가의 작품
피카소의 작품 설명을 번역해보고 빵 터졌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깃든 호안 미로의 작품
어딘가 피폐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으로 유명한 에곤 쉴레의 작품들. 초기에는 귀여운 작품도 있었군.
샤갈을 특히 좋아한다. 몽실몽실한 꿈결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서다. / 아기에게 젖 먹이는 엄마를 그린 작품
음악을 들려주는 것 같은 칸딘스키의 작품

4층의 회화 작품을 다 보고 내려가다가 만난 전시는 정확하게 주제를 파악 못 했는데 방 마다 화려해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보니 마치 궁정 무도회장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스트리아 왕가의 초상화인 듯

단기 속성으로 미술관 관람을 끝내고 2층 테라스로 나오니 어젯밤 인터미션 때 도망(!)쳤던 국립오페라극장의 야경이 보인다. 한국인 관광객 두 분이 계셔서 사이좋게 사진을 서로 찍어드렸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앞에는 핫도그 맛집인 비트징거 라는 가게가 있다. 소세지 안에 치즈가 쏙쏙 박힌 메뉴를 포장한 후 크리스마스 마켓 가서 따뜻한 음료와 함께 먹어야지. 하여튼 먹는 것에 관해서 두뇌 회전이 참 잘 된단 말이지.

어젯밤 혼미한 상태로 방문했던 국립 오페라극장의 야경
핫도그 맛집 비트징거. 성수기에는 길게 줄을 선단다.
핫도그 포장해서 슈테판 성당 앞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내가 안 가본 지역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구경해보자 싶어서 핫도그 소중히 품고 슈테판 성당 앞으로 왔다. 지구 천장을 찌를 듯 높다란 고딕 양식 성당 앞에도 예쁜 불빛의 크리스마스 마켓들이 반짝거린다.

디자인이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음
길바닥까지 끌리는 대박집 영수증 꼬리
깜찍한 장화 잔에 어린이용 음료로 한 잔 마심.
초콜릿 공예품들
손톱만한 핀 하나에 2,3만원이라 남은 일정의 여비가 염려되어 사진만 찍었음
아기 예수님께 바칠 선물을 가지고 온 동방박사들과 마구간 동물 친구들
줄지어 나란히 전시된 장화 잔들 너무 귀여워

내친 김에 암호프 광장에서 열리는 마켓까지 가봤는데 여기는 약간 소규모였다.  일요일 밤인데도 이렇게 다들 밖에 나와 놀아도되나? 싶을 정도로 밤늦게까지 북적이는 사람 구경도 하고.

Am Hof 라는 곳에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
깊은 밤에도 북적북적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학원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열심히 강의하는 분과 열중해서 듣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누군가는 여유롭게, 또 다른 누군가는 치열하게 보내는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들이 한 데 모여 도시 비엔나를 이룬다. 나도 때로는 자유로이, 때로는 집중하는 유연한 여행자가 될 테야.  

누군가는 일요일 밤에도 열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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