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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러댄 Aug 19. 2019

명함 한 장이 천금보다 무겁다

내 나이 23살, 대리의 직급을 달다. 타의 100%로.


두 번째 직장은 스타트업이었다. 게 중에서도 '초'스타트업. 회사가 설립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고, 마케팅 대행 스타트업 회사는 말 그대로 지천에 깔려 있었다. 수중에 돈은 항상 부족했고, 일은 닥치는 대로 물어와야 하는 곳. 나는 그곳에 발을 들였다.


직책은 대리입니다. 앞으로 잘해봐요 우리.


첫날은 브랜드 공부와 업무 파악으로 정신없이 흘러갔고, 둘째 날 대표님에게 나의 직급을 전해 들었다. 사실 면접 때부터 궁금했지만, 어차피 사원이겠거니 하고 굳이 안 여쭤봐도 되겠지 생각했던 것도 있었다. 내 경력은 1년도 되지 않은 생 초짜였기 때문에. 근데 대뜸 나보고 대리를 달고 일을 하란다. 실로 '앵'스러운 상황이었다. 처음엔 황당했고, 그다음은 의아했다. 대체 왜?



그것에 대한 답은 출근 일주일 만에 깨우칠 수 있었다.

1. 회사에는 나를 포함해 직원이 총 5명밖에 있지 않았다.

2.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나보다 더 어렸던 여자 직원은 이 직장이 첫 직장이다. 고로 경력 없을 무.

3. 나는 굵직한 메이저 브랜드를 담당하게 되었으므로, A부터 Z까지 모든 일을 일당백으로 처리해야 했다.

4. 당연히 광고주와의 커뮤니케이션 및 미팅이 필수이므로 어느 정도 직급을 달고 일해야 했다. (광고주 입장에서는 사원 나부랭이한테 일을 맡긴다는 불쾌함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23살에 타의적으로 대리가 되었다. 명함에, 전자 서명에, 메일 인사말에는 항상 이름 옆에 '대리'의 직책이 따라붙었다. 처음 명함을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가벼운 종이 한 장에 내 책임감과 부담감은 천금보다 무거워졌다. 저 두 글자가 내게 가져온 변화는 실로 놀라웠다.



직책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나는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예민 쟁이가 되었다. 일을 함과 동시에 배웠다. 모르는 일은 일단 겪어가면서 나름대로의 기준을 적용시켜 내 것으로 만들었다. 실수를 없게 하기 위해 한 번에 넘길 것을 세 번씩 다시 봐가면서 수정을 거듭했다. 덕분에 야근은 늘고, 워라벨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심장은 항상 열렬한 bpm으로 리듬을 탔고, 내 업무 스킬은 정말 단기간에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3개월 안에 내가 맡은 광고주는 3개로 늘었고, 제안서 프로젝트에 참여해 새로운 광고주 체결에 기여하기도 했다. 콘텐츠 기획은 물론 디자인, 광고 집행 모두 최전방에서 실행단으로써 열심히 싸웠다.





물론 나는 이직한 다음 회사에서는 나이와 경력에 맞는 '주임'으로 내려갔지만, 현재는 다시 대리라는 직책으로 복귀하여 일하고 있다. 사실 다시 저 때로 돌아가서 일 할래? 물어오면 망설임은 분명 있을 것이다. 내 젊음과 청춘과 뒤바꾼 지옥 같기도 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결국엔 그럴 거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천천히 올라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일단 상황이 주어지면 사람은 적응한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때로는 직책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다만 어떤 마음을 먹고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당신의 결과는 달라질 것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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