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러댄 Aug 23. 2019

부모님이 자취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느덧 자취 4년 차에 접어들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기 시작한 건 이제 5년째. 첫 1년은 할머니 언니와 함께, 그리고 그 후 3년은 언니와 둘이 살다가 올해 초 언니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사실 내가 자취를 하게 된 것은 보통의 이유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내 또래들이 자취를 한다 치면 일자리를 위해 직장 근처로 거처를 옮기거나, 꿈을 이루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등의 이유가 보편적이지만, 우리 가족은 좀 달랐다. 나는 자취를 '통보' 받았다.


모처럼 평범한 날의 아침이었다. 교회 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출발하기 전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워 먹고 있었는데, 답지 않게 엄마와 아빠가 갑자기 할 말이 있다며 언니와 나를 앉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통보했다. 둘은 고향에 가서 살기로 했다. 이미 집도 구해놨다며.


그땐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들어간 지 3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근로계약서 잉크도 다 마르지 않았던 시기. 부모님은 갑자기 귀향 아닌 귀향살이를 선택해버린 것이다.



응?


처음엔 장난치지 말라며 웃어넘겼고, 상황 파악이 된 후엔 낯빛이 잿빛이 되었다. 언니도 내 동태를 살피더니 덩달아 심각해졌다. 나는 그럼 우리는 서울에 그냥 두고 가는 거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고 했다.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표정의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너희끼리 살아라 하면 그냥 살아지는 건가.


근 며칠을 화만 냈던 것 같다. 부모님만 보면 화가 났다. 나는 아직 부모님과 같이 살고 싶었고, 보살핌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순천이라니, 안 봐도 훤한 자취생활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은근히 개인주의에 독립적인 성향을 갖고 계셨다. 내려감은 곧 생고생과 생이별의 시작임을 직감했다.


팽팽한 의견 대립이 10일 차에 접어들던 때. 외출 후 돌아오는 엄마를 쏘아보며 나는 악을 썼다. 처음으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머리로는 그러지 마 했는데, 고함은 순식간이었다. "엄마는 왜 본인 생각만 해? 싫어 짜증 난다고! 진짜 이기적이야."


아차.




엄마를 보았다. 눈은 슬펐고, 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엄마는 씩씩대는 내 옆으로 와 차분히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내 손을 가져가 본인의 손에 포갰다. 방금 뱉은 그 말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지만, 괜한 자존심에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리 봐도 이건 실수한 게 맞다.


운을 뗐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 너희가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니, 여태 조금은 잊고 지냈던 삶을 다시 시작해 봐도 좋지 않을까? 엄만 사실 도시가 싫어(웃음). 난 엄마의 말에 눈물이 줄줄 났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왜 지금 고향으로 내려가려 하는지. 다만 엄마의 사정보다 내 사정이 더 중요했달까. 그저 어린 나이의 딸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 기억 속의 부모님은 단 둘이 여행 한 번을 간 적이 없었다. 둘이서만 재미있는 데이트를 즐긴 적도,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모습도 내 기억엔 없었다. 근데 이제 자식들을 어느 정도 사람 구실 할 정도로 키워냈으니, 원 위치로 돌아가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이삿짐 트럭을 불러 한 달도 안돼서 순천으로 떠났다. 나는 보내주었고, 지금은 합의적 별거 중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내게 충분히 하셨다.


순천에서 엄마는 자그마한 가게를 내셨고, 아빠는 근처에 직장을 잡으셨다. 집은 여느 신혼집 부럽지 않게 꾸민 채.


우리는 현생을 살아내기 바빠 1년에 두어 번 정도 얼굴을 본다. 부모님이 행복해하시니 그걸로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밥은 유일하게 잘해줄 수 있었던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