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다고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혼주의 동거커플, 동거집>
동거를 한다고 대외적으로 밝히니 동거와 관련한 질문을 받는 경우가 더러 생겼다. 결혼 계획이나 생활비 등의 조금 민감한 주제에 앞서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서는 가사노동이 단골 주제인데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상대방의 눈빛에 약간의 짓궂음이 서린다. ‘너희 가사 노동으로 트러블 있지? 막 서로에 대해서 불만 이야기하고 싶지?' 하는 눈빛 말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들 가사 노동에 있어서는 서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는 악랄한 마음이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그게 연애와 동거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설거지나 세탁 등 분야에 따라 각각 잘하는 사람이 나눠 맡으면 된다고도 하지만 대체로 설거지를 잘하는 사람이 세탁도 잘할 확률이 높다. 잘한다고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잘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걸로 나누는 게 맞다.
한때 ‘요섹남’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남성 셰프들이 TV에 나와 터프하게 조리하면서 섬세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섹시하다고 이르는 말이다. 그 모습이 멋진 이유는 내 집에는 없는 남성상이기 때문이다. 남성 셰프들이 냉장고를 털어 요리를 하던 프로그램이 나온 지도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더이상 요리하는 남성에 대한 특별함은 없다.
결혼한 친구집에 놀러 가 보면 당연한 듯 부부가 함께 요리하고 함께 치운다. 요리하는 남자는 더 이상 섹시한 남자가 아니라 내 집에 있는 가사 노동 협업자일뿐이다. 우리 집에도 있다. 요리를 도맡아 하며 나와 가사 노동을 나누어하는 가또(반려인)가.
처음 가또와 동거를 시작했을 때 나는 마치 새신부인냥 신혼 생활에 빙의해 요리를 했었다. 혼자 먹을 때 하는 소위 자취 요리가 아닌 엄마가 해주는 집밥마냥 시금치나물을 무치고 왜인지 도라지를 다듬어 무쳤다. 도라지는 다듬는 게 여간 고생스러운 게 아니었는데 가또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생각에 만드는 내내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혼자만의 행복.
가또는 내가 만든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맛없는 건 입에도 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먹어주는 시늉은커녕, ‘자기가 고생해서 만든 음식, 자기가 많이 먹어’라며 접시를 내 앞으로 슬쩍 들이밀었다. 나는 도라지 무침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체 이 도라지 무침은 누구를 위한 도라지 무침이었던가.
쓰레기통에 처박을 용기도 없어 냉장고에서 서서히 썩어가는 도라지 무침을 애써 외면할 때쯤 가또에게 이야기했다.
‘앞으로 요리는 오빠가 해’
알고 보니 가또는 먹는 것에 예민한 편으로 가리는 음식도 많고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욕이 대단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충청도에서 나고 자라 자리를 잡은 가또는 TV에 나오는 맛집이 대부분 서울에 있다는 사실에 서울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고 한다.
'나 때문에 서울로 온 게 아니라 맛집 때문이었어?'
'.......당연히 자기 때문이지 무슨 소리야....!'
나와 맛집은 그의 뇌 안에서 몇 퍼센트의 지분을 나눠 가지고 있을까? 동거 초반 가또는 신나서 이야기했다.
‘TV에 엄청 맛있어 보이는 맛집이 나왔어. 그럼 바로 먹고 싶지 않아? 그런데 지방에 살면 먹으러 갈 수가 없는데 서울에 살면 바로 버스 타고 가면 되잖아.’
서울에 산다고 한들 TV나 SNS에서 유행하는 맛집에 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가또가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동거 생활 초반 3시간의 웨이팅을 마다하지 않고 서울 맛집탐방을 했던 가또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이렇게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먹기 싫은 것도 많은 가또이기에 요리를 가또가 하는 건 마땅한 결과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십수 년간의 섭식장애를 겪으며 음식에 대한 나만의 철학이 있었다. '탄단지'의 균형 있는 조화와 규칙적인 식사. 어려워 보이는 이 미션은 냉장고에 버섯과 계란만 있으면 쉽사리 해결됐다. 갑자기 치킨이 먹고 싶다거나 달달한 케이크가 먹고 싶은 욕구가 내게 생기는 건 일 년에 서너 번 정도였다.
반면 가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먹고 싶어 했다. 단순히 배를 채운다기보다는 ‘먹어보고’ 싶은 것에 가깝다. 경험해 보고 싶은 것이다. 음식은 가또가 그 안에 강하게 자리 잡은 미식과 탐구(가또는 과학분야에 종사한다)라는 욕망이 만나 미식에의 끝없는 도전을 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어제만 해도 집에 천혜향 한 박스가 배송되어 왔다. 한라봉 한 박스가 배송되어 온지 채 3일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라봉이 아직 있는데 천혜향은 왜 산 것이냐 물으니 ‘지금 이 시기의 한라봉과 천혜향 맛을 비교해 보고 싶었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먹고 싶은 것이 많고 자신이 먹을 것은 스스로 공수하는 가또이기에 요리를 가또가 하는 건 마땅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자취를 처음 시작한 순간부터 내 욕망은 드레스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라 옷방이라 부르는)에 집중되었다. 패리스 힐튼 같은 거대한 드레스룸을 원한 것이 아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가진 침실 옆에 붙은 자그마한 옷방을 갖는 것은 내 오래된 로망이었다.(물론 그 방에 있는 옷과 구두의 가격은 절대 자그마한 규모가 아니다)
20대 초반 자취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나 원룸에서 투룸으로 이사를 가는 그 순간부터 겨우 1인용 이불 한 장 깔 만한 크기의 방 한 칸은 무조건 옷방이 됐다. 상의와 하의, 외투의 섹션을 나누고 액세서리와 구두도 마치 편집숍인 것마냥 디스플레이했다. 효과적인 수납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패션 아이템과 내가 물아일체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지금은 패션을 접고 옷에 대한 욕망도 소멸했지만 옷방의 질서만큼은 여전히 유지하고 싶다. 같이 쓰는 공간임에도 옷방만은 내 권한이 절대적으로 큰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권한을 유지하려면? 질서를 유지하면 된다. 그러니까 옷 정리를 잘해야 한다는 얘기다.
내 옷방에는 적당히 대충 옷을 던져놓을 공간이 아주 적다. 한 번 입은 옷은 세탁하거나 섬유탈취제를 잘 뿌린 후 건조해 항상 행거의 제자리로 돌아간다. 대충 걸어놓을 새가 없기 때문에 그런 공간 자체가 불필요했다. 반면 가또는 여러 벌의 옷을 대충 걸어놓고 외출할 때는 그 옷들 중 하나를 입는다. 입었던 옷을 세탁한 옷 사이에 걸어놓을 수 없다는 가또의 질서가 있지만 내 옷방의 질서와는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정리할 수밖에 없다. 가또가 대충 걸어놓은 옷 중 세탁해야 할 옷들은 빨래통으로 넣어버리고 빨기 좀 애매한 옷은 섬유 탈취제를 뿌린 후 제자리를 찾아준다. 여름에는 대부분 빨래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좀 수월하다.
이렇듯 우리의 가사 노동은 각자의 욕망에 기반하고 그만큼 많은 부분을 담당하기에 일정 권한을 갖기도 한다. 잔소리할 권한 말이다.
그 외의 노동은 대부분 보상으로 이뤄진다. 요리를 한 가또에게 보답하고자 설거지는 내가 하고 설거지가 주방 청소로 이어질 때쯤 가또는 청소기로 온 집안의 먼지를 빨아들인다. 그리고 옷방을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린 내게 보답하고자 세탁 완료 소리가 들리면 가또가 먼저 가서 빨래를 넌다. 그리고 다시 가또가 요리할 때쯤 그냥 있기 미안한 나는 빨래를 걷고 개킨다. 상대방의 가사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특별히 이로 인한 트러블은 생기지 않는다.
처음부터 ‘어디에서 어디까지 언제’ 등을 정해 너의 일과 나의 일의 경계를 구분해 놓으면 같이 사는 집의 가사임에도 남의 일을 대신해 주는 기분이 든다. 다행히 나와 가또는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가진 터라 미안하게도 가사 노동으로 인한 트러블이 있을 거라는 짓궂은 기대에 부흥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완전히가 아니고 대부분인 건 그와 나의 속도의 차이 때문이다. 성격이 급한 나와 느긋한 가또의 시차 정도는 트러블이라고 하기에는 귀엽지.
아무튼 우리의 가사 노동은 각자의 욕구의 크기로 결정된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 갖기. 만약 상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노동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의 문제니 관계를 점검해 봐야 할 시점일 수도 있다.
>함께 노동하는 우리의 모습이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