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법
2019년 5월 가또는 박스 6개와 함께 내가 6년째 살고 있던 월셋집으로 이사 왔다.
달랑 박스 6개 안에 들어가는 그의 살림살이를 보고서 나는 ‘이 사람은 참 미니멀리스트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박스 속 물건을 살펴보니 피규어나 종이 부품을 연결해 만드는 과학 기구 등 미니멀리스트의 그것이라 보기에는 어려운 물건들이 많았다.
‘음… 뭔가 이상한데?’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가또는 이사오기 전 6박스의 3배 정도의 물건을 전부 버리고, 작은 우리 집에 들어갈 만큼만 짐을 싸 온 것이었다.
든 자리는 티가 안 난다고 했나? 가또의 살림살이 6박스는 내가 쓰던 옷장 한 켠과 서랍장 한 두 개 비워주는 정도로 적당히 티 나지 않게 수납되었다. 문제는 가전제품이었다. 물론 가또와 함께 온 6박스에는 가전제품이 없었다. 이사오기 전 그는 풀옵션 원룸에 살았기 때문에 굳이 가전제품을 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집으로 이사와 며칠을 지내보니 필요한 가전제품이 생긴 듯했다. 그건 바로 공기청정기.
연애를 시작하고 가또가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러 서울에 왔을 때, 그는 해방촌의 좁은 비탈길을 달리는 마을버스가 우리 옆을 지나자 인상을 쓰며 코를 막았다. 서울살이 16년 차, 길거리를 걸을 때면 코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굳이 의식하고 살진 않았다. 배기가스의 존재감마저 지우는 미세 먼지까지 자욱한 서울에서 마을버스의 매연이란 말 그대로 티끌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을버스 매연에 몸서리치는 가또의 모습은 내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건 단순히 매연이 싫다기보다 내가 사는 환경에 대한 부정과도 같았다. '넌 무슨 이런 곳에서 사니?'라는 말을 표정으로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보며 내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말을 표정으로 했다. ‘이 사람 과연 서울에서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가또는 스무 살까지 충북의 작은 시골에서 살다가 대학 진학 후 나를 만나기 전까지 청주에서 쭉 살았다. 거기다 가또의 꿈은 우주요, 목표는 천체 관측으로 그의 작장은 산속에 있는 천문대였다. 가또의 일상에서 손 대면 닿을 거리를 스쳐가는 마을버스가 내뿜는 매캐한 매연이란 아주 낯선 존재였다.
거기다 오버스럽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또의 콧구멍은 상당히 크다. 대체 얼마나 크길래 이런 공개적인 글에서까지 말하냐 싶겠지만 거의 ‘오픈형’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는 넓은 평수의 콧구멍을 가졌다. 가또의 콧구멍으로 유입되는 매연의 양은 작고 귀여운 내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매연의 양보다 단연 많을 수밖에 없다. 아, 물론 나는 콧구멍의 크기만큼 오뚝한 가또의 코를 좋아한다.
가또의 오픈형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게 매연만은 아니었다. 반려묘 두 마리와 함께인 우리 집은 집안 곳곳에 고양이 털이 쌓여 있었고 햇빛이 집안을 밝힐 때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고양이 털을 보며 털멍을 때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 공기 중을 떠다니던 털들은 가또의 날숨에 멀어졌다 들숨에 더 강력한 힘으로 가또의 콧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양이 털 입장에서는 그곳이 우주의 블랙홀과도 같은 지점일 것이다.
나는 싫었다. 가또와 함께 우리 집에 들어온 공기청정기가 싫었다. 공간을 먹어치우는 듯한 가전제품의 존재감이 싫어 집에서 한국인의 필수품인 밥솥도 없애고, 자취생의 필수품인 전자레인지도 없앴다. 그렇게 식습관까지 바꿔가며 비워둔 공간을 가또와 함께 공기청정기가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싫지만 싫다고 할 수 없었다.
가또에게 공기청정기란 마치 냉장고나 세탁기처럼 가정집이라면 으레 구비해야 하는 ‘백색 가전’ 중 하나였다. 35년 동안 코로 어떤 공기가 들어오든 이 또한 매연이고, 저 또한 미세먼지려니 생각하며 살았던 나와는 달랐던 거다. 실내 공기의 깨끗함에 대한 생각도 이렇게 다른데 함께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것에서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게 될까?
나는 가또와 ‘함께’ 사는 것을 무엇이라 생각했을까?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내가 원하지 않는 물건이 집에 있는 것이며 앞으로 늘어날 거라는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내가 집에 들여놓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 온전히 내 의사로만 물건의 존재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건 통제가 아닌 서로에 대한 배려다. 한 집에서 함께 산다는 건 그런 거다.
동거 초반, 내가 쓰던 공간의 일부를 가또에게 내어주었던 시기를 지나 우리는 함께 가구를 사게 되었고, 그 가구에 물건이 적재되는 기준은 소유자가 아닌 사용 빈도수였다. 내 물건, 가또의 물건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의 물건이 집안을 채우게 됐다. 그만큼 나의 삶과 가또의 삶의 경계도 흐릿해지고 각자의 삶이 섞여 우리의 삶이 되었다.
공기청정기를 산 이듬해 가또는 제습기를 집에 들였다. 공기청정기는 4년이 지난 지금도 딱히 크게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제습기는 달랐다. 그 여름, 그 제습기가 빨아들인 공기 중의 수분은 빨래를 꼬들꼬들하게 말려주었고 욕실의 냄새를 없애주었다. 어떻게 지난 세월 제습기 없이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제습기 이후의 삶은 이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삶인 거다. 어쩌면, 우리가 불의의 상황으로 헤어지게 되면 나는 남은 생 동안 제습기를 쓸 때마다 가또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제습기를 들여놓은 사람. 내 인생의 습기를 제거해 준 사람으로.
동거를 시작한 후 타인과 함께 집을 공유하는 것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내 취향이 전혀 아닌 물건을 들여놓는 것, 내가 쓰지 않은 컵을 치우는 것, 내가 입지 않은 옷을 빨고 개켜 정리하는 것. 나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또 또한 자신이 쓰지 않은 것을 치우고 청소기로 바닥의 긴 머리카락을 빨아들인다. 희생 같은 게 아니다. 배려심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우리의 단위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