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라는 말
"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가 되어 가고 있다. 저소득층의 경우 굉장히 큰 결심을 해야만 결혼이 가능해졌다."
지난해 방영된 tnv <알쓸인잡> 2화에서 소설가 김영하가 한 말이다. 하아.. 작가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제가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의 한 마디로 지금껏 비혼을 선택했다는 내 말은 중산층이 아니라 결혼을 못하는 것의 완곡한? 표현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참석한 프리랜서 모임에서 이어진 수다의 끝에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의 여성 멤버 4명이 남게 됐다. 4명 모두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던 터인지 자연스럽게 수다의 주제가 파트너와의 관계로 옮겨갔다. 아마 ‘나는 이렇게 사는데, 남들은 어떻게 살지?’라는 궁금증 때문이었을 거다. 그 수다의 방점은 한 문장이 찍었다.
‘상대가 짠해 보이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놓을 수 없다’
엄마와 아빠는 1982년 11월 14일에 결혼했다. 당시 간호조무사였던 엄마는 부모가 큰 식당을 운영하기는 했으나 마땅한 직업 없이 한량처럼 지내던 아빠와 사실 헤어지려고 했다고 한다. 이런 마음이 있던 차에 아빠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됐고, 그 마음이 들어버렸다. 얼굴에는 온통 상처가 난 채로 입원실 침대에 누워있던 아빠를 본 순간 ‘짠한’ 마음이 들어버린 것이다.
‘짠하다’의 사전적 의미(안타깝게 뉘우쳐져 마음이 조금 언짢고 아프다.)는 차치하고, 전라도 사투리로는 ‘가엽다’는 의미다. 엄마는 병실에 누워있는 아빠를 보고선 당신 마음이 더 아팠다. 약해진 모습에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고,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이 짠한 마음은 꽤 오래간다. 매몰차야 하는 매 순간 이 가여웠던 모습이 떠올라서 해야 할 말을 삼키게 되는 최면에 걸려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아빠가 짠해 보이는 덕?에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기로 결심했고, 엄마가 다니던 성당에서(이 결혼을 위해 아빠는 천주교 교리를 들어야 했다) 혼인 미사를 올리며 부부가 됐다. 색이 바랜 결혼사진엔 수녀님이 만들어 준 부케를 들고 있는 엄마와 교통사고로 생긴 얼굴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커다란 잠자리 선글라스를 쓴 아빠가 팔짱을 낀 채 나란히 서 있다.
엄마와 아빠를 케이스 스터디한 내가 보고 배운 바로는 이 ‘짠함’이 있다면 혼인 미사를 올릴 수 있다. 내게 상대를 향한 짠함은 결혼의 충분조건인 것이다.
나는 내 동거인(이하 '가또')이 꽤 짠하다. 지난해 심장 수술을 받고 가슴 중앙에 꿰맨 흉터를 단 채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선 나도 그 최면에 걸려버린 것이다. 약해질 대로 약해져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수술 후 소변줄이 제대로 꽂혀있지 않아 난감했다며 울상을 짓는 타이밍엔 그 소변줄 앞으로는 내가 잘 꽂아주리라는 다짐까지 했다.
프로 헤어질 결심러인 내가 그 후로는 싸움을 해도 ‘하 헤어지자고 하면 우리 가또 불쌍해서 어떡하나’라는 마음에 차마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없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계속 지지고 볶으며 살게 되는 건가? 싶은 마음이지만 엄마처럼 결혼할 결심은 하지 않았다. 결혼할 조건이 충분했음에도 결혼하지 않기로 했기에 나는 내가 비혼을 선택했다고 굳게 믿었다. 김영하 소설가의 위 발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계약에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관계를 지향하며 희생을 담보해야 하는 소위 ‘정상’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삶보다 개인의 삶에 집중하고 싶다는 것. 그것이 내가 동거는 하면서도 결혼은 하지 않은 채 비혼의 삶을 사는 이유라 생각했다. 그러나 김영하 소설가의 말에 따르면 중산층 이상의 문화인 결혼을 하기에 저소득층인 나는 큰 결심이 필요하고 이 큰 결심을 위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거다.
결혼할 결심이 서려면 아무래도 2억 9천이 필요한가 보다. 2022년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발표한 ‘결혼 비용 보고서’에 따르면 결혼에 필요한 총비용은 2억 8,739만 원이다. 혼수, 예식홀, 예단, 신혼여행 등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2억 9,000만 원에 가까운 비용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결혼을 원하는 커플들이 서바이벌을 벌여 우승하면 2억 9,000만 원의 결혼 자금을 상금으로 탈 수 있는 <2억 9천: 결혼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을 시작하기도 했다. 2억 9,000만 원이라니. 정말 전쟁이 아닐 수 없다.
2억 9,000만 원 중 2억 4,000만 원가량이 신혼집을 위한 비용이다. 이 수치만 놓고 보자면 월세살이를 하는 우리는 결혼의 조건에 한참 미달이다. 세부적인 수치로는 신랑과 신부의 결혼 비용 부담률은 6:4 정도이고 주택 비용 부담률은 각각 65%, 35%라고 한다. ‘월세든 전세든 결혼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내 생각과 달리 주택 비용 부담률이 높은 부류인 가또는 집이 없다는 이유가 비혼의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다. 미디어의 말이야 그들 생각이고 실제의 부부는 어떤지 궁금해 일단 주변 친한 지인부터 살펴봤다.
최근 1~2년 사이 결혼한 지인들은 모두 자가 혹은 전세의 주거 형태였다. 그중 두 커플은 최근 아이를 낳아 한창 육아 중인데 최근에 본 저출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둘째를 낳을 수 있는 커플은 중산층’이라는 내용이 생각나 넌지시 둘째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 모두 둘째 계획이 있다고 했다. 아 역시 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인가?
비혼이 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결혼이 아니면 비혼이라는 선택지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거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우리가 비혼 동거라는 형태를 선택했을까? 아직 사회 제도나 정책에 어두운 내게는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지만 충분히 많은 논의가 되어 봤을 법한 주제라는 건 충분히 알 것 같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오기에 제도는 게으르다지만 가족과도 같은 관계로 우리의 마음이 닿는 만큼은 서로를 보호해 주고 지켜주면서 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허용되는 게 아직도 결혼 계약이나 입양뿐이라는 게 조금 허망하긴 하다.
동거 중인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게 됐을 때 이 아이에게 적합한 혜택을 주며 키울 수 있는 방법이 결혼 외에 있다면 우리는 임신을 지금처럼 재앙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친족이 아니라도 수술동의서에 사인할 수 있다면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멀리 사는 가족이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지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미디어에는 2억 9,000만 원이 없어도 함께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는 게 게으른 제도가 그나마 제 속도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지식인은 짐짓 우려하는 척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발언은 굳이 안 해도 좋겠지 않나?
이 커플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