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무 번째 절기, 첫눈이 내린다고 하여 소설이라고 한다.
서른네 번째 소설을 맞이하는 해였다. 겨울을 싫어하는 나는 코끝이 시리기 시작하면 더더욱 집 안으로 꼭꼭 숨어들어 자취마저 감추곤 했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는 겨울을 보낼 거라 생각한 해였다. 여전히 섭식장애에 시달렸고, 불안정한 서울살이 중이었다.
그해 여름에는 조금 아팠다. 뭐라도 해야지 싶어 큰맘 먹고 간 수영장에서 물 알레르기가 생겨 한밤에 응급실에 간 후로 항생제와 스테로이드를 꽤 오래 달고 살았다. 온몸에 울긋불긋 열꽃이 오르고 손 가는 대로 긁어댄 피부에서는 피와 진물이 섞여 나왔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처음 겪는 몸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마저 일으켰다.
통제할 수 없는 몸
지금껏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선택적이었다. 다이어트와 성형, 시술이나 제모를 하거나 염색을 하는 등의 각종 미용 관리라 불리는 행위들. 모두 스스로 선택한 예측할 수 있는 통제하에 있는 변화였다. 빨간 얼룩말이 된 것처럼 피부가 울긋불긋해지는 두드러기와 가려운 증상, 붓기 그리고 두피와 안구마저 가렵게 하며 바깥에서 안으로 침투하는 알레르기 증상은 전혀 예측할 수 없던, 통제할 수 없는 몸의 변화였다. 처음 섭식장애가 시작되었던, 식욕을 통제할 수 없던 십여 년 전의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몸이 통제를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에서 20대의 나는 음식을 탐했다. 밀가루와 설탕과 크림이 잔뜩 들어간 케이크, 위에 새빨간 딸기가 올라간 딸기 케이크는 절대 한 조각에서 멈출 수 없다. 두 조각, 세 조각, 분명 포크로 조금씩 떼어먹었는데 어느새 판 위의 케이크는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는다.
십여 년이 흐르고 30대가 된 나는 섹스를 탐했다. 탐하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성욕이 강하지 않은 나는 이성을 만나기 위해 가는 술집이 어디인지, 인터넷 커뮤니티는 어디에서 찾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때 마침 ‘틴더’가 한국에 론칭했다. 끝도 없이 나오는 프로필 카드를 넘기며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는 ‘like’를 누른다. 나도 누르고 그도 누르면 매칭. 대화가 시작된다. 섹스를 탐하고 싶었던 나는 아주 간편하게 대상을 찾을 수 있게 됐다.
몇 명의 이성을 만나 데이트하고 그중 몇 명과는 섹스를 했다. 마치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성공한 여성들의 일과 사랑’ 고등학생 시절 비디오 가게에 있던 영화 소개 잡지에서 봤던 문구다. 나는 성공도 안 했고 사랑도 안 했지만 도시에서 섹스를 했다. 주인공 캐리의 커리어 성장은 따라 할 수 없었지만 매번 엉망진창으로 끝나던 그의 망한 이성 관계는 따라 할 수 있었다.
소개팅앱에서 만난 관계가 연애로 발전하길 기대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애정에 목말랐던 나는 한 번 몸을 부대낀 상대에게 사랑을 갈구해버리고 말았다. 모든 관계는 캐리만큼 엉망진창으로 끝났고,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먹던 항생제를 중단한 후에는 질염과 자궁경부 염증으로 다시금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다.
섹스가 재미없어졌다. 자기학대적인 섹스에서 남는 건 질염뿐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달 정도 틴더에 빠져 지낸 시기를 지나 가을에는 일에 빠져 지냈다. 마침 팀을 옮기게 됐다. 새롭게 소속된 팀에서는 여행 잡지를 만들었다. 글에 맞는 적당한 사진을 찾다가 새벽을 맞기 일쑤였고, 작가가 써 준 여행 에세이 원고에 등장한 파리의 카페가 진짜 그곳에 있는지, 아직 영업 중인지 확인하기 위해 구글을 뒤졌고, 외래어 표기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국립국어원 홈페이지는 24시간 모니터에 열려 있었다. 멋진 화보를 만들고 싶어 패션 잡지 에디터가 되고 싶었는데 글만 쓰는 잡지 피처 에디터로 일을 시작했고, 이제는 글도 쓰지 않는 에디터가 됐다. 그래도 1년 동안만 열심히 일하면 정직원의 기회를 준다고 했다. 1년 동안 잘해 왔으니 1년 더 잘할 수 있겠지?
새롭게 바뀐 팀의 옆자리는 영상PD의 자리였다. 가끔씩 '프리랜서로 지금 하는 만큼 일했으면 지금 월급보다 훨씬 많이 벌었을 거'라고 얘기했던 그에게 '여기 있는 사람 모두 프리랜서로 일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많이 벌었을 거다. 회사에 소속된 만큼 얻는 것이 있다'라고 팀장님은 말했다. ‘프리랜서 상근 에디터’로 일했던 나는 프리랜서가 버는 만큼 벌지도 못했고 정직원이 받는 복지와 퇴직금도 보장받지 못했다. 받는 만큼 일하는 영상 PD는 6시 퇴근을 철직으로 삼은 듯했다. 야근 거리를 만들지 않고 시간 안에 업무를 마감하는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팀은 항상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 자리엔 대부분 부장님도 함께였다. 그리고 대부분 부장님이 결재하셨다. 식사 후에는 근처의 적당한 카페에 가서 아주 쓴 커피를 마신다. 왜 회사 근처 카페의 커피들은 그렇게나 썼는지 알 수 없지만 나른한 오후를 버티게 해 줄 만큼의 쓴 맛이다. 밤바람에 코끝이 시려질 때쯤엔 카페에 딸기 케이크가 보이기 시작한다. 겨울이 진짜 시작되는 느낌이다. 쓰디쓴 커피에 딸기 케이크를 나눠먹고 있는데 부장님이 내 옆자리 PD에게 물었다.
‘00이는 스노보드 탄다고 했지? 어디에서 타니?’
‘웰리힐리 파크요!’
응? 무슨 파크? 잘 알아먹지도 못할 만큼 생소한 이름을 파악하려 노력하는데 PD가 방긋 웃는 얼굴로 스노보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응? 그게 그 정도로 재밌는 건가?
그 뒤로 종종 스노보드에 대한 걸 그에게 물었다. 대화거리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다소 새침한 느낌의 그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어서일 수도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마다 그는 방긋 웃는 얼굴이 되어 스노보드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 문화는 어떠한지 그리고 자신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게 그 정도로 재밌는 건가?
궁금했다. 도대체 그게 뭐길래 한 사람을 이 정도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해 나는 스노보드에 입문했다. 옆자리 영상PD와 함께 스노보드숍이 모여 있는 학동역 근처에서 장비를 사고, 중고로 데크를 장만했다. 스키장 시즌권까지 끊었다. 그리고 스키장이 개장하는 11월 22일 생애 처음으로 스노보드를 탔다. 처음으로 바람을 가르며 내달리는 느낌에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내 꼬리뼈는 골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