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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Feb 07. 2024

나는 나와 있는 게 좋았다

고독이 밤을 삼길 때

동지

스물두 번째 절기.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때이다.


깜깜한 밤이 좋았다. 밤이 긴 겨울이 좋다. 잠을 잘 때는 모두 혼자니까. 나만 혼자라는 생각이 조금 위안이 됐다. 밤이 긴 겨울밤에는 이런 위안을 조금 더 오래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동이 트고 사람들이 잠에서 깨면 그때부터는 나만 혼자라고 느껴진다.  


사랑을 믿지 않은지는 오래됐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말하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상림>이 내게 가르쳐 주었고, 사랑이란 감정은 옥시토신에서 나온다고 '호기심 천국'이 가르쳐주었다. 아니, 딱히 배우지 않더라도 내 안에 사랑이란 감정이 없었다. 그게 대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은 뭘까?


나는 나와 있는 걸 좋아했다. 외로웠다. 그러나 타인과 함께 하는 불편함보다는 외로운 게 좋았다. 그래서 그저 나와 함께 있었다. 나와 둘만 있을 때 나는 대체로 우울하다. 해야 할 것들은 항상 쌓여있고, 그 일을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나를 가볍게 감싸고 있었다. 슬프지 않고 무섭지 않았지만 대체로 심심했다. 심심함이 쌓이고 쌓이면 고독이 된다. 아주 견고한 고독.


 기억을 더듬어 봐도 거기엔 항상 나만 있었고, 그때의 나는 대체로 우울했다. 가벼운 농담에 제대로 웃지 못하고, 인사치레 말도 쉽게 하지 못하는. 미간에는 항상 미세한 주름이 잡혀있는 예민한 사람. 외로움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이상한 말을 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이상한 선택을 하게 만든다. 나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와만 있는 게 좋았다. 견고한 고독으로 견고한 방어막을 세웠다. 몇 번 허물어졌던 이 벽은 지난 몇 년 동안은 어떤 사람도 들여보내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튼튼해졌다. 잠들기 전 불을 끄면 이 벽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공간을 밀고 들어왔다. 가끔은 이 벽이 영화 <튜브>에서처럼 안으로 밀고 들어와 그 안에 있는 나를 소멸시켜버리는 건 아닐까 상상했다. 그래도 벽 안이 좋았다. 어느 누구도 내 세계로 들여보내지 않으리. 내 세계로 들어와 침범하고 할퀴고 찌르게 두지 않으리.


아침에 일어나 출근길의 버스에서, 정류장에서 회사까지 가는 길에서, 모닝커피를 살 때도, 일을 할 때도 항상 주변엔 사람으로 가득했다. 매달 다른 내용의 기사를 쓰며 새로운 스텝들을 꾸리며 새로운 사람을 알아간다. 카톡의 친구목록은 점점 늘어나지만 정작 나는 혼자였다. 그 어느 순간에도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세상엔 나 말고 다른 이는 없었고 내 삶이란 항상 심심하고, 고통스럽고,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그저 견뎌내는 것. 그런 내게 스노보드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내 견고한 고독의 벽으로 세어 들어오는 아주 작은 빛. 오랜만에 비집고 들어온 빛이 기꺼워 나는 막 문고리를 붙잡은 참이었다. 조심스레 열어젖힌 문 너머에는 눈이 시린 눈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설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거기엔 예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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