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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Nov 03. 2024

여덟과 여든 사이

내가 애증하는 동네에는 울음과 웃음이 함께한다.

'코끼리랑 코끼리가 싸우면?' 월요일에 만난 8살 아이가 쪽지로 물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넌센스 퀴즈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고민 끝에 ‘모르겠다 ㅠㅠ’ 라고 답을 적어 냈다. 쪽지를 받아 든 아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바라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환한 웃음에 나도 따라 웃었다. 인천 용현동에 사는 주민을 인터뷰하는 자리였다. 질문하는 사람이 셋, 대답하는 사람이 둘인 조금은 어색한 자리에서 엄마를 따라온 아이는 익숙한 듯 가지고 온 블럭을 만지고 놀았다. 질문에서 아는 장소가 나오면 동그란 눈을 굴리고 자기 경험을 얘기해주면서, 이 어린이는 금방 내 마음에 싹을 틔웠다. 다른 어른들이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 나는 일하는 중인 것도 잊고 넌센스 퀴즈를 주고 받으며 깔깔거렸다.


올해 봄부터 또래 청년들과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인하대 후문’으로 불리는 용현1·4동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오랜기간 용현동에서 살고 있거나 일을 하고 계신 분들의 인터뷰가 필요해 용현동에 계신 작가님께 인터뷰를 요청드렸다. “원도심에 사는 것에는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작가님은 “모든 게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또 필요한 게 다 있어요.”라고 답했다. 살고있는 동네에 대한 애증섞인 이 말이 원도심을 표현하는 데에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비슷한 애증의 감정을 화수동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문화예술창작공간 도르리’는 인천 동구 화수동에 있다. 화수동은 동인천역에서 10분 남짓 걷다보면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다양한 개성의 집과 사람들이 모여있는 동네다. 오랜기간 개발되지 않아서 1950~60년대에 지어진 흙집이 곳곳에 숨어있기도 하다. 화수동 집들은 나무의 나이테나 사람의 주름살처럼 집마다 여기저기 손보며 살아온 흔적을 가득 품고 있다. 골목을 산책하다보면 직접만든 울타리나 페인트칠 벗겨진 담장이 ‘나 여기 있어!’라고 말을 거는 때가 있다. 그런 때면 사진을 찍어 기록해 둔다. 가끔 마음 깊숙이 건물이나 사람의 이야기가 파고든 날에는 sns에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린다.


원도심 주택가에서 도르리는 문화예술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도르리는 ‘여러 사람이 음식을 차례로 돌려 가며 내어 함께 먹음’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자 순우리말이다. 각자의 업을 가진 창작자들이 모여 작업실 겸 문화예술공간으로 도르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름에 맞는 예술 활동을 고민하며 공간에서 도자기, 목공예 등의 예술 강좌를 진행하거나 근처 학교에 문화예술 강사로 수업을 나간다. 나는 가장 최근에 도르리에 들어와서 아직 2년을 채우지 못한 신입이라 주로 진행을 보조하며 사진과 글로 활동을 기록한다. 마을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기록하는 것이 일이자 일상인 셈이다.


오래된 마을이 으레 그렇듯 화수동에는 노인이 많다. 도르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열에 일곱은 70세를 훌쩍 넘긴 할머니, 할아버지다. 지팡이를 짚고 걷거나 걷다가 길 한쪽에 앉아 쉬거나. 변화가 거의 없는 마을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분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느리게 살아도 된다고, 내 속도대로 살면 그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진다. 도시의 개발 속도를 벗어나 나름의 리듬을 가진 이 동네에서는 제각각의 나이와 모습으로 살아가는 집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그런 집과 사람들이 가진 이야기가 좋아 도르리에 자리잡기로 했다.


화수동에 온 지 1년이 지난 요즘에야 깨닫는 사실이 있다. 이야기가 많은 동네에 있는 것은 낭만적이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폭염주의보가 뜨는 무더운 날이 이어지자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도르리에 자주 오셨다. 80살이 넘은 할머니는 “내가 그지(거지)가 다 됐어.”라며 운을 떼고 살아온 이야기를 주욱 해주셨다. 두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들었을까? “내가 이렇게 머리가 아픈 할머니야. 자주 찾아와서 귀찮게 하더라도 이해해줘.”라고 당부하셨다. 그날 나는 ‘이런 당부를 하는 어른을 미워할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용현동 인터뷰를 한 다음날, 할머니가 오셨다. “일하는 데 내가 방해하는 거 아니야?”라고 묻는 할머니에게 “괜찮아요. 저희 어차피 문닫을 때까지 계속 에어컨 켜두니까 편하게 쉬세요.”라고 대답했다. “나 뭐하나 물어볼게.” 할머니가 물었다. “뭘 먹어야 죽어?” 그 물음을 들은 나도, 옆의 동료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할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할머니 이렇게 힘든 거 자식 분들은 알고 계세요?” 동료가 대답했다. ‘이 정도면 잘 넘겼다.’ 고 생각했지만 집요한 할머니는 연거푸 같은 질문을 했다. 말문이 턱 막히는 그 질문을 듣고 있자니 아프고 화가 났다. 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할머니가 미웠다. ‘나도 할머니랑 같은 나이가 되면 그런 말을 하게 될까? 내일 할머니가 같은 말을 또 하면 어떻게하지?’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다.


마을에서 문화기획자로 일을 하다보니 8살 어린이부터 80살이 넘는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의 사람들을 만난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자극에 나를 노출시키는 것과 같다. 할머니의 말처럼 아픈 말을 들어 머리와 마음이 온통 흐트러진 날에는 어떻게든 뱉어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악의 말과 행동을 사람이 아닌 모니터를 앞에 두고 써내려 간다. 그렇게 적어 내려가며 어떤 말과 단어가 아팠는지, 다음번에 같은 자극에 노출이 되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생각한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매순간 깨지면서 배운다. 초등학교 수업을 나가 만나는 아이들이 때로는 80살 할머니보다 더 아픈 말을 할 때가 있다. 또 80살 할머니가 8살 아이보다 더 희고 환하게 웃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시간들이 모여 내 하루가 채워진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다양한 나를 만난다. ‘이런 이야기는 나에게 아프구나. 저런 이야기를 나는 좋아하는구나.’ 깨달아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어느 날은 깔깔대며 웃고, 어느 날은 울분에 차 잠 못 이룬다. 내가 애증하는 동네에는 울음과 웃음이 함께한다. 그런 순간들을 거르지 않고 솔직하게 쓰고 싶다.


코끼리랑 코끼리가 싸우면? 정답은 ‘끼리끼리’다. ‘코끼리랑 코끼리가 친하면이 더 맞는 질문 아닌가?’ 같은 생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 한바탕 크게 웃으면 된 것이다. ‘뭘 먹어야 죽는가?’ 하는 물음에는 애써서 ‘사람은 먹지 않을 때 죽는다.’는 대답을 삼킨다. 할머니가 정말 바라는 건 죽음보다는 웃음이 아닐까? 오늘 밤에는 할머니를 웃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고민하면서 잠들어야겠다. 부디 내일 같이 웃을 수 있기를. 만약 할머니가 또 같은 질문을 하면 그땐 속상하다고 엉엉 울어버려야지. 나는 아직 그래도 되는 나이다. 여덟과 여든 사이, 스물 여덟살의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쓰고 싶다.


2024년 8월 26일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글을 쓰는 나' 라는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그동안 동네를 걸으며 드는 생각들을 자주 올렸는데, 제가 어떤 이유로 동네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한번쯤 자세히 소개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쓰는 연습을 하는 중이라 아직은 어색하네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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