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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RG 그러라지 May 22. 2020

진정성이 없다고? 진정성이 뭔데!

앤드류 포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아날로그, 빈티지, 에코 프렌들리, 홈 스쿨링, 누디즘. 모두 ‘진정성’을 의미하는 낱말이다. 진정성의 매력은 작년쯤부터 이어지는 ‘뉴트로’ 혹은 ‘힙트로’의 유행으로 증명되었다. 블루투스 스피커엔 감성이 없다고? 턴테이블을 들여놓자! 아이폰 카메라에 질렸다고? 필름 카메라를 써보자! 진정성을 위해서라면 불편함과 비용을 감수하고 과거로 힘차게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무엇이 어째서 진정한가에 대한 물음에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2007년, 조그비 인터내셔널의 설문조사에서 ‘진정성’을 가장 잘 정의하는 단어를 고르라는 질문에 응답자 61%가 ‘진실한 것’, 19%가 ‘실재인 것’을 택했다고 한다. 알다시피 진실과 실재는 엄연히 다르다. 저자에 따르면, 진정성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며 진정하지 않은 것을 직관적으로 가려낸다. <싸구려 커피>로 솔직하고 눅눅한 자취생의 일상을 노래했던 장기하가 실은 자취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에 배신감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실보다는 진실처럼 느껴지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진정성의 속내다.



우리는 세속주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과 근대가 야기하는 문제들로부터 때 묻지 않은 진정성을 찾는다. 진정성을 찾는 행위는 원시사회의 평등하고 비 착취적인 공동체의 가능성을 되찾는 행위다. 그러나 문명화의 과정은 타락이라기보다 “서로 대립되는 요소들의 일정한 타협 과정”이다. 문명사회는 분명 편리함과 안락함을 제공한다. 가령 프랑스엔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 나체 상태로 식사를 즐기는 누드 레스토랑이 있는데, 이는 너무도 이율배반적이다. 진정한 ‘본연’으로 돌아간다면 포크와 나이프는 스테이크를 얻기 위한 사냥에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웨이터가 내온 스테이크를 썰어먹는 누디스트에게서 느껴지는 진정성이라곤 나체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래서 진정성이 뭔데!  라고 묻고 싶다.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책의 입장이다. 예술과 경제, 정치, 문화 등의 영역에서 진정성을 갈망하는 흐름을 읽어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진정하다면 아무것도 진정하지 않은 것이 되므로, 진정성은 지위 경쟁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비교 대상이 필요하고, 소외 현상을 초래한다. 이것이 진정성 추구의 문제점이다. 영화관의 vip 시사회를 떠올려보자. 무한한 복제와 소비가 가능해지면서 영화는 시사회라는 한정적인 경험을 제공해 진정성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한 경험은 초대권이라는 특권을 지닌 소수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어쩌면 진정성이란 특정한 자격이 있는 이들이나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개봉 전에 관람했다는 우월감이야말로 진정성의 폐해다.



작금의 레트로 유행을 거스르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전자책 대신 종이책을 집어 드는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되어 환경 오염과 같은 엄한 결과를 간과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는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 진정성을 요구해온다면, 어느 칼럼니스트가 그랬듯, “진정성이란 무엇인가?”하고 되물어주자. 어차피 그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진정성일 경우는 드물 것이므로. 이 글 분량만큼의 물음표를 안겨주고 자리를 뜨면 되는 것이다.





Not Only Books


영국 드라마 <Years&Years>

출처 : 구글 이미지

“IQ 70 이상인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줍시다.”


황당한 공약에도 정치인 ‘비비안 룩’의 인기는 절정에 이른다. 부조리한 언행 역시 그의 인기 비결이다. 새로울 건 없다. 대중이 사석에서 즐기는 이야기를 ‘비비안 룩’이 그대로 읊은 것뿐이니까.


드라마 <years & years> 는 2019년부터 2034년까지 15년간의 영국의 근미래를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낸다. 한 정치인의 지지율이 높아질수록, 한 가족의 일상은 내려앉는다. ‘비비안 룩’이 권력을 잡자 언론은 마비되고 반지성주의와 차별주의가 극심해진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어째 세상은 점점 후진하는 것만 같다.


현재 한국의 상황도 다를 바는 없다. 타겟층을 공략해 선동과 막말로 환심을 사는 이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가. 심지어 그들은 젊은 층에서조차 밈(meme)화되어 호감을 얻기도 한다. ‘진정성 있는’ 후보가 되기 위해 본성을 감추는 정치인들은 재미가 없다. 대중이 진정성을 기대하다 보니 꾸며진 진정성 틈에서 나오는 ‘사이다’ 발언에 통쾌함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years & years> 가족의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저런 농담꾼과 사기꾼 광대 놈들을 조심해라. 우릴 웃기며 지옥으로 이끌 거야.”


영국이 굳이 예언하지 않아도 우린 이미 디스토피아를 맞닥뜨렸다. 앞으로 닥칠 시련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조금의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21대 총선이 다음 주 수요일로 다가왔다. 진정성보다 중요한 건, 어떤 미래를 꾸려갈지가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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