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
TV를 보다 보면 채널을 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브로맨스'란 자막이 띄워질 때가 그렇다. 두 남성 간의 케미스트리를 지칭하는 이 용어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 없다. 남녀 간 연애 서사에 신물 난 이들을 붙잡아 놓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기에, 퀴어적 상상력을 자극하긴커녕 남성 연예인들의 분량만 늘려줄 뿐이다. 남성 정치인들을 브로맨스로 엮는 관행은 어떠한가. 트럼프와 아베의 브로맨스를 떠올려보자. 누가 공이고 누가 수란 말인가. 이런 방식으로 가시화된 동성애는 오히려 해롭기만 하다.
남성에게 동성애적 로맨스를 부여하는 문화는 10대 여성 청소년에겐 다르게 읽힐 수 있다. 많은 여성들이 '흑역사'로 치부하는 '팬픽'이 그러하다. 소녀들의 소수자 감수성이 예리했다기보다는, 단지 '오빠들'을 다른 여성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심리로부터 팬픽은 시작되었으나, 되려 감수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팬픽 문화가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앞서 브로맨스를 공과 수로 나눴듯, 이성애를 토대로 동성애적 관계를 이해하고, 성적인 묘사가 중심이 되는 팬픽의 특성은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때의 소녀들이 팬픽을 매개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항구의 사랑>에서 아이돌에 드리우던 사랑은 소녀들 서로를 향하기 시작한다. 2000년대 초, 팬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동경하여 동성애자를 모방하는 '팬픽 이반' 문화가 유행했듯 그들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주인공 준희는 남자를 흉내 내는 듯한 인희를 냉대하지만, 마음속엔 동아리 선배 민선을 품었고, 사랑으로 달궈진 10대 시절을 보낸다. 대학생이 되자 준희를 비롯한 여학생들은 과거를 외면하고 살아간다. 주류의 사랑을 따르면서 오빠들과 팬픽을 향한 애정은 유치한 것이 되었고, 짧은 치마를 입고 남자를 만나 세련됨을 인정받았다. 성인이 된 준희는 유년 시절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그땐 다 미쳤었어."
2020년을 사는 준희의 생각도 그대로일까? 아득한 존재부터 너무나 친밀했던 관계까지, 애틋했던 그의 사랑은 미친 게 아니라 명확한 감각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대면하고 자신의 일부로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준희가 유년을 되짚어보게 된 것은 레즈비언인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다. 그는 이제 인희를 이해한다. 남성성을 대변하는 듯한 옷차림은 자기표현의 방법이었음을 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여성들에게 느꼈던 끌림과 사그라드는 감정에 관한 안도감은 정상성의 범주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이었음을 안다. 인희를 떠올리며 출발했던 소설은 10대 시절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준희로 귀결된다.
지인과 함께 신촌을 걷다 전 애인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마주친 적이 있다. "그때 저기서 펑펑 울었어. 데이트가 끝나는 게 싫어서." 그는 "다 부질없는 거야."라고 답했다. 그 부질없음에선 뭐랄까, 어쩔 수 없이 성숙해진 자의 위엄이 느껴졌다. 이미 지나온 감정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쿨해 보이기도 했다. 당시의 감정을 완전히 복기할 순 없지만, 찬찬히 돌이켜보면, 먼저 부끄러움이 스민다. 사랑을 느꼈던 대상에 대한 것일 수도, 서투르거나 지나칠 줄 밖에 몰랐던 자신을 향한 것일 수도 있겠다. 견딜 수 없어 '흑역사'나 '부질없음'으로 간단히 정리해버리더라도 지질했던 나의 모습은 내가 거두어야 한다. 그때의 눈물이 있었기에 나는 이제 마무리를 아쉬워하지 않게 되었으니. 적어도 '브로맨스'가 줄 수 있을 만한 교훈은 아니다.
Not Only Books
영화 <벌새>
'소녀'하면 흔히 떠오르는 수식어가 있다. 수줍다거나 발랄하다거나. 그런 살랑거리는 형용사들과는 동떨어진 소녀, 은희가 <벌새>의 주인공이다. 사랑을 찾아 벌새처럼 분주했던 은희와 같은 학교 후배 유리는 우정과 사랑 사이 강렬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유리의 사랑은 한시적이었고, 은희는 자신을 좋아했지 않느냐 묻는다. 그리고 유리는 영화를 빚낼 명대사를 남긴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항구의 사랑> 속 사랑을 갈망했던 준희와 <벌새>의 은희가 겹쳐졌다. 상투적인 이미지 뒤에서 그들이 간직했던 이야기들을 읽고 보며, 우리의 유년을 다시금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두 이야기 모두 여성 창작자의 자전적 서사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