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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슨니 Mar 31. 2022

1. 나와 나를 이루는 있는 관계들

그 기록의 시작

"우리 서로에게 좋은 환경이 되어주자"는 말은, 지나가듯 봤던 글을 조금 더 내 것 삼은 문장이다. 그리고 작년 말, 친한 친구 두 명의 생일 편지에 내가 적은 문장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 수록, 삶이란 걸 더 마주할 수록, 스스로 선택한 것에 의해 삶을 일궈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선택당한 것,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의 오묘한 조화속에서 삶이 형성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나를 이루고 있는 '환경'을 잘 가꾸고 다루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주어진 것 자체를 바꿀 순 없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색하는 것은 나의 몫임으로.


24살, 만으로 22년간 살아오면서 다양한 공동체와 사람을 경험했다. 나보다 더 많은 삶을 살고, 다양한 사람을 만난 이들이 들으면 "과연 그래?"라고 되물을지 모르겠지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람과 마주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사람을 만나는 데 진심'이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내 또래 구성원들이 경험하는 '4인 가족'이 아닌 '6인 가족'에 몸담으며, 태어나서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가족의 형태에 대해 배우며 "대가족인 친구는 손 들어 보세요"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와 친구 두 명 남짓이 손들었던 기억이 있다. 남들과는 조금 더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고 있다는 걸 감각하게 되는 첫 경험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집보다 크기가 커도, 인원수는 늘 그보다 많았고, 때문에 내 룸메이트는 부모님일 때도 있었고, 할머니일 때도 있었으며,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친구일 때도 있었다. 나란 존재의 세계는 시작부터 '혼자'라는 것과 거리가 멀었고, '멀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숙명이라고 해야 하려나?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좋아하는 탓에 늘 '마당발'을 자처하며 다양한 사람을 부담 없이 만났다. 그런 마음은 사람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때론 상처로 돌아오곤 했지만, 또 그렇게 나는 성장해갔다. 중고등학생 때는 기숙형 학교를 다녔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오직 나를 위한 '방'이 생겼다.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리는 것조차 어색했던 스무 살의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거사를 치뤘다. 정규 수업이 밀리고, 학교 건물 앞에는 컨테이너가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수업이나 수강 신청, 교내 채플을 거부하고, 텐트에서 수업을 들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오던 나의 시야가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책임감이란 단어를 무겁게 지기 위해 노력했던, 좋은 어른이 만들어준 틀 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살 수 있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듯했다.


그 시간은, 다른 이들이 겪지 않을 법한 일을 내가 너무 빨리 겪어낸 것 같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한 개인이 얼마나 큰 파장력을 일으킬 수 있는지 몸소 배우게 했다. 아빠는 내가 마주한 세상의 처참함에 대해  "한 사람이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에는 그 주변인들 중에 그의 행동이 잘못됨을 알려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부터 나와 나를 이루고 있는 환경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조금은 무해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유해함을 최대한 덜어내기 위해. 조금은 강박적으로 삶을 대하게 됐다.


나라는 존재의 시작을 지켜본 이들부터, 변화와 성장의 시기를 함께 보냈던, 그리고 여전히 내 곁에 자리하며 목격해주는 이들과의 관계성을 묶어 풀어내 보려고 한다. 어느 정도의 목차와 내용을 생각해 두었지만 시간에 따라, 또다시 새롭게 정의되고 쌓이는 추억에 따라 조금씩 글의 방향성이 달라질 순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진심인 마음 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손절'이 참 쉬운 세상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에 의의를 두고 살아가는 삶, 서로의 변화에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용기를 지닌 삶에 대해. 기록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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