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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슨니 Apr 06. 2022

2. 나의 첫 어른, 부모라는 세계

나의 나 된 것은 다 부모의 은혜라...

나의 세상은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고 앞 글에서 말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나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경쟁자인 ‘첫째’,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쟁자라기엔 사이 좋은(?) 우리 둘…

교양수업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사람의 성격은 태어난 순서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조금은 조용하고 묵묵하게, 성실히 자신의 길(학생에겐 공부)을 나아가는 오빠에 비해 나는 늘 그때그때 ‘증명’할 수 있고 행동하는 것을 해왔던 것 같다. 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친해지고, 장기자랑 시간만 있다 하면 나가서 춤추고 노래 부르는. “어쩜 둘이 저렇게 다를까?”에 대한 의문은 ‘이런 나의 근원은 부모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란 근거에 의해 해소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세상에 소환한 엄마와 아빠에 대해 찬찬히 풀어가 보겠다.


요즘식으로 엄마를 소개해 보자면, 엄마는 ESTJ의 엄격한 관리자형이다. 최근 종방한 ‘스물다섯스물하나’의 희도 엄마 MBTI가 ESTJ가 아니냐는 궁예 글을 봤는데, 만 22년간 쌓아온 데이터 베이스에 의하자면 매우 유사하다. 희도의 남자 친구인 이진이가 연애 중임을 고백하고 “제게 하실 말씀이 없냐”는질문에 “사이좋게 지내렴 ^^”이라고 대답한 것만 보아도, 싱크로율이 100%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기 일에 열심인 것도 똑같다.


엄마는 자녀 셋을 낳고 추가적인 출산 휴가 없이 짧게 몸조리를 한 후, 계속 일을 하신 커리어우먼이다. 더구나 아빠가 공교육을 ‘꿈과 소명을 찾아 떠난’ 이후 경제적 가장이 되셨다. 실제 몇 해 전에는 장학사가 되셨고, 이전보다 한층 더 바쁜 삶을 살고 계시다. 부모님 모두 세상이 ‘꿀 빠는 직업’이라고 말하는 공무원이셨지만, 어렸을 때부터 바쁘게 사는 두 분을 본 덕에 나는 그것이 편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누군가는 꿀을 빨고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본 대다수의 공무원들은 오히려 야근을 밥 먹는 듯이 하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자연스레 아빠 소개로 넘어가 보자. 아빠의 MBTI는 ENFP다. 이를 두고 엄마는 50대에 흔치 않은 MBTI라며, 자유로운 영혼인 아빠를 놀리곤 한다. 집순이이자 드라마 보는 게 취미인 엄마와 달리 아빠는 완벽한 밖돌이에 취미 부자다. 50대 중반임에도 페이스북과 인스타를 모두 사용하는 트렌디함도 갖췄다. 그는 매 해 와인을 담그고, 핸드드립으로 내려 먹을 원두를 볶는다. 시간이 날 땐 직장 동료분과 자전거 일주를 다녀오고, 친구들과 고기를 잡으러 낚시도 다닌다. 손님이 오면 대접할 ‘아빠만의 고기 굽는 레시피’도 있고, 매주 읍내 테니스장에 가서 레슨도 받고, 일요일에는 교회 식구들과 축구를 한다.  


나열하면 더 있겠지만 주로 하는 것들을 모아 보면 이렇다. ‘어떻게 저걸 다 하고 사냐’고 한다면, 쉴 때 집에서 드라마만 정주행 하는 엄마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처음으로 만난 사회는 ‘정말 다르지만 상생하는 관계성’이다. 지금보다 나이가 어렸을 땐 잘 몰랐지만, 부모님을 우러러보며 존경하는 대상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일원’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 수 있는 상생구조였다. 어쩌면 내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살아야 함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가족이 시초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학교에 오시는 ‘공개 수업’ 때, 엄마나 아빠가 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같은 학교를 다녔던 엄마는 같은 학교 다른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해야 했고, 아빠 또한 다른 학교에서 수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하루쯤 빼먹을 수 있는 ‘현장 체험 학습’ 특권 또한 내게는 없었다. 내가 학교를 가는 날엔, 부모님도 학교를 갔기 때문에. 집에 오면 간식을 준비하고 있는 보호자는 없었고, 대신 받은 용돈으로 불량식품을 사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쉽게 손에 쥘 수 없는 ‘불량식품과 군것질의 자유’를 보다 쉽게 얻었지만 다른 면의 자유는 없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학창 시절(초중고)을 모두 부모와 같은 학교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아빠가 소명과 꿈을 찾아 공교육을 떠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지만 아빠는 떠났고, 그 일터인 ‘별무리 학교(별무리 학교는 초, 중, 고등학교 과정이 모두 있다)’에 나도 덩달아 재학하게 되면서 부모와 떨어져 학창 시절을 보낼 자유는 박탈(?) 당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 ‘무슨 일(그것이 친구와의 다툼일 지라도)이 생기면 가장 먼저 부모에게 전달가는 학생 신분’을 12년 간 유지했다.  


사실 이런  처음부터 부담되는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엄마가 종례를 하건 말건, 엄마의 교실  문을 활짝 열고 “엄마!  용돈!”이라고 외치는 ‘엄마에 대한 배려는 1 없는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얼마나 난처했을까 싶다. 하지만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인 ‘청소년 타이틀을 거머쥐면서부터부담으로 느꼈던  같다. 사실 ‘자유로운 영혼 아빠는  삶에 관심은 갖더라도 관여하진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그랬다.  


다른 학교에 비해 소규모였던 별무리 학교는, 내가 아빠의 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학생, 선생님, 심지어는 친구의 부모님들까지도. 때문에 아무도 시킨 적 없는 ‘모범생 코스프레’ 같은 걸 했던 것 같다. 물론 시험 점수 같은 게 모범생이었던 건 아니고, 그냥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남들과 싸우지 않고, 선생님 눈 밖에 나지 않는. 고런 모범생.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할 말 다하고 사는 친한 친구도 있었지만, 중학교 1학년. 모든 친구들이 담임선생님 속을 썩이던 시절, 담임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너까지 내 속 썩이면 난 진짜 몬산다”는 이야기가 가슴에 박혔다. 그렇게 나는 타의적으로나 자의적으로나 의도치 않은 범생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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