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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슨니 Feb 21. 2023

여전히 내 배 채울 궁리만 하는 못난 딸이라

주말 내내 수련회로 시간을 보내고 출근한 피곤한 월요일. 일찍 하루를 마치고 잠에 드는 게 오늘의 유일한 목표였다. 귀가 후 조금은 여유롭게 책을 읽고, 이제 슬슬 자볼까 하던 찰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보통 엄마에게 전화가 오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함께 자취하는 오빠가 전화를 안 받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청 PPT 수정이나 디자인을 맡길 때이다. 시계는 벌써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어김없이 이번에는 후자 때문이었다.


엄마가 하는 부탁에 퉁명스럽게 반응하며 이렇게 해야겠다, 저건 저렇게 해야겠다 말하곤 조금 짜증이 난 채로 PPT를 손봤다. 수정이 마무리되면 다시 연락을 달라는 엄마의 말 뒤로, 틀어져있는 드라마 소리가 나서 팍, 기분이 상해버렸다. 엄만 TV나 한가롭게 보면서 나는 지금 이걸 하라는 건가. 그런 삐뚤어진 마음이었다.


수정을 마치고, 엄마 메일로 파일을 보낸 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졸업식 때 사준 트위드를 돌아오는 토요일 결혼식에 입고 가라는 이야기, 토요일에 올라갈 거란 이야기.. 토라진 내 기분을 좋게 좋게 달래려 꺼내는 모든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오늘 정말 피곤하다며.


끊고 나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되려 불편했다. 엄마한테 이렇게밖에 못하는 내가 너무 못나보였다. 미안한 마음에 카톡을 남겼지만, 보낸 내용을 곱씹을수록 나는 내 시간을 보장해주지 않은 엄마에게 앞으론 내 시간을 존중해 달라고 이기심을 부린 철없는 딸이었을 뿐. 엄마에게 진짜 사과를 전하진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어렸을 때 내가 하루종일 열이 나서 고생했던 날, 열을 내리려 새벽 내내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던 엄마가 생각났다. 나는 내 시간이 그렇게도 소중해서 당당하게 말했는데, 따지고 보면 엄마는 알아주지도 않는 시간과 마음을 내게 얼마나 쏟았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가 정말 못나보여서 눈물이 났다.


다 큰 어른이라고, 이 정도면 꽤나 사랑을 아는 것 같다고 자부했던 얄팍한 마음이 너무 쉽게 들통난 것 같았다. 언제쯤 나는 엄마가 줬던 사랑만큼, 내 배 채울 궁리만 하지 않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 못 될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따라가기엔, 나는 계속 엄마보다 젊을 테니까. 다 큰 줄 아는 오산만 범하는 개딸인 내가, 언제쯤 사랑에 인색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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