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날의 기록
일진이 사납다고 느낄만한 날이 쌓여갔다. 평범한 날이 연체라도 된 듯 버텨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늘 그런 날들은 연달아 찾아오곤 했다. 신경쓰지 않아도 될 법한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고, 그런 문제는 내 감정이나 감각을 헤집어 놓았다. 변화는 ‘기분’이나 ‘태도’라는 단어로 내 하루를 채워갔다. 나는 그런 하루를 미워했다. 곪아간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하루라고 생각했다. 그런 날엔 평소라면 반응하지 않을 법한 것들에 쉬이 걸려 넘어졌다. 일진이 사납다고 느끼는 날이었다. 와중에 애초에 약했던 행거가 무너졌다.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의 질서도 함께 무너졌다. 나는 쉬이 상심했다. 그렇게 상심과 부정을 배웠다. 이런건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각이라고, 괜한 오해를 시작했다.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이런 날일수록 ‘괜히’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됐다. 나는 괜히 늦잠을 잔 사람이 됐고, 괜히 배달을 시켜 먹었고, 괜히 무언가 구매한 사람이 됐다. 나의 일상은 괜한 것으로,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으로 취급 당했다. 다 내 맘에 금이 갔기 때문 임을 알면서도, 괜히 그렇게 핑계 대고 싶었다. 핑계는 간편하고, 책임을 묻지 않으니까. 원래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 인생의 무게를 덜어주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니까. 건강에 대해 생각했다. 건강한 마음 가짐을 갖고 싶어서였다. 그런 생각을 한 건 내가 건강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건강한 사람이 건강을 위해 노력하기는 쉽지 않지만, 불건강한 사람이 건강을 위해 노력하기는 쉽다. 잃어본 경험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꿈꾸게 만든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동력이다. 잃어봐야, 얻는 경험을 통해 내가 조금은 달라졌고,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것. 일진월보를 꿈꾸는 삶이다. 어쩌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무형한 것을 더 쉽게 믿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보이는 것은 쉽게 손상되고, 손상으로 인한 변화는 쉽게 실망을 낳으니까. 어떻게 하면 인간은 덜 실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만 실망을 덜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믿을 수 있을까. 살면서 이뤄낼 수 있는 업적일까? 아니면 평생 지고 가야 할 삶의 십자가일까. 일진이 사나운 날은 일취월장을 바라는 이의 바램이었다. 누구도 내 하루가 우울에 잠식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생긴 마음이었다. 너무 아껴서 아끼지 않는 것 같은 나날이었다. 어쩌면 모든 부정의 시작은 긍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모든 믿음은 불신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도. 어떤 것을 긍정할지, 어떤 것을 부정할지 결정하는 마음은, 결국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을 불신할지에 대한 선택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 있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튼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고, 그 날은 일진월보를 한 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