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방학은 폭우와 코로나때문에 발이 단단히 묶여서 유난히도 짧게 느껴졌는데 그래도 중간 중간에 동화처럼 느껴졌던 날들이 있어서, 일기처럼 적어두려고 한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이번 여름 방학에 본 영화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정말 좋았다.
어릴 적 할머니 집, 외가집, 친척 집에서 보냈던 수많은 날들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향수 짙은 영화였다. 후덥지근한 열기와 선선한 선풍기 바람이 함께 공존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문득 언니네 집에 가서 조카들을 만나고 싶었다.
영화에서는 고모와 조카들의 이야기가 등장했는데 고모와 조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서로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으면서도, 오랫만에 봐도 편안한 그 분위기가 너무 잘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나도 영화 속처럼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던 어느 여름 날, 시외 버스를 타고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조카 재유는 방학이었고, 언니는 일을 시작해서 재유랑 단 둘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재유는 내가 이야기 들려주는 걸 정말 좋아해서 언니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지난 번에 들려 주다 만 악동 바이러스의 뒷 이야기를 계속 고민했다. 조카들이랑 잘 때면 밤마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데 세헤라자드의 마음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재밌는 이야기는 사랑 없인 절대 안 나오는데…
언니는 출근하고, 승유는 유치원에 가고, 언니네 집엔 재유랑 나랑 고양이 네네, 이렇게 셋만 남았다. 재유의 몇 개 없는 숙제를 봐주는 동안 선풍기 바람과 네네가 번갈아가며 우리 곁을 살랑살랑, 왔다갔다 했다.
재유는 혼자서도 책을 많이 읽고 이야기를 좋아해서, 방학 중에도 초등학교 도서관에 가서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는데, 나는 지난 달 동화 창작 수업을 재밌게 듣기도 했고 그래서 재유네 초등학교 도서관에 같이 가기로 했다.
초등학교 도서관이다 보니 상급 학교의 도서관처럼 크지는 않았는데, 우리 집이랑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나도 매일 가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책들이 잔뜩 꽂혀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책은 <비밀을 들어주는 토끼>였다. 일러스트도, 담고 있는 이야기도, 인물들의 고민들도 다 정말 사랑스러웠다. (초등학교 3-5학년 정도의 어린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게 될 경우 이 책을 정말 추천합니다.)
어릴 땐 책을 거의 안 읽었는데, 나도 재유처럼 어릴 때부터 도서관에 들락거렸으면 더 일찍 이야기와 소설에 빠지지 않았을까! 사실 이번 달엔 소설 창작 수업도 듣고 있는데 아직도 혼자 감을 못 잡겠어서 죽을 맛이다.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과정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1차 합평 이후 잔뜩 주눅들었지만 선생님께서 죽이되든 밥이되든 계속 써보라고 하셔서 내가 내 소설 속 주인공이다,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써보려고 한다.
우산을 쓰고 공원을 지나 도착한 재유네 도서관에서 한참이나 책을 구경하고, 또 책을 잔뜩 빌려서 집으로 왔다.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다 못 읽자 재유가 자기 이름으로 빌려줬는데 세상 든든한 도서관 친구였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재유가 좋아하는 베스킨라빈스의 이상한 나라의 솜사탕을 포장해왔다. 비가 잔뜩 고인 후덥근한 여름날, 책과 시원한 바람, 아이스크림만 있으면 여기가 곧 낙원이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승유까지 합세해서 아가들의 침대방에 들어가 악동 바이러스 이야기 2편을 들려줬다. 말로 들려주는 이야기의 맛은 아가들의 극적인 리액션 덕분에 잘 살아났다.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다음 번에는 바다로 떠난 하늘이 이야기(악동 바이러스 3탄)도 들려주기로 했다.
이야기까지 들려주니까 벌써 집에 돌아가야할 시간이라 나오는 길이 아쉬웠다. 하지만 즐겁게 놀다가 헤어질 때 느끼는 아쉬움은 그대로 아름다운 거니까,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인사하고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언니가 카톡으로 재유와 승유가 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엄마, 이모는 어쩜 그렇게 재밌게 이야기를 할까요?”
엄청 힘이 되는 말이었다. 다음에 만나는 날까지 이모가 틈틈이 소설 창작도 열심히 해볼게!
이야기는 나의 힘!
언젠가 이 여름날의 기억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남을 것 같다. 재유, 승유에게도 이모와 함께 보낸 여름날이 좋은 추억으로 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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