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타지에서 자취를 하며 지냈다. 한 번은 추석 연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 아는 오빠를 만났다. "이번 명절엔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쉬고 싶다"라는 말을 꺼내자 오빠는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래도 가족인데 어떻게 그래. 집에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도리지."
지금은 명절 연휴에 친구와 호캉스를 즐기는 사람도 많지만 10년 전엔 저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던 시절. 난 궁금했다. 내가 어떠한 이유로 저렇게 말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조언부터 꺼내는 걸까? 그건 가족의 힘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가족인데..."로 시작하는 말을 들으면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나는 오빠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큰아빠에게 "몸이 안 좋아서 혼자 좀 쉬겠다"라는 문자를 남기고 버터 케이크를 사 왔다. 큰아빠는 납득이 어려웠는지 계속 전화를 했고, 부재중 전화는 금세 200통이 쌓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때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싫은 걸 아주 싫어하던 대학교 1학년의 나는 단 한 통도 받지 않았다. 케이크를 깨작깨작 먹으며 끊임없이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쳐다봤을 뿐. '네가 언제까지 내 전화를 무시할 수 있겠냐'라고 말하는 듯한, 괘씸하게 여기는 태도가 멀리서 전해졌다.
서른이 된 나는 가족 중 어느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는다. 즉 가족이 없다. 마음을 열고 잘 지내보려고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이젠 애정이 고갈돼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올해 추석 연휴엔 혼자 호텔에서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읽다가 스무 살인 아는 동생 Y와 잠시 통화를 했다.
Y: 언니, 뭐해요?
나: 호텔에서 책 읽고 있었어.
Y: 집에 안 갔어요?
나: 응. 난 가족이 없는데?
Y는 당황한 듯했다.
Y: 그... 그럼 언니는 고아예요?
난 웃으며 물었다.
나: 나 서른인데 뒤에 '아이 아'자가 붙는 거야?
그 뒤로 계속 다른 사람에게 가족이 있는 척을 했다. 분위기가 싸해지고, 별도의 설명이 필요해서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은 많았다. 몸에 문신이 7개라고 하거나 개명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부모님은 괜찮다고 하시냐"라고 물어보고, 난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지어내서 대답한 뒤 생각한다. 심리적,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어도 사람들은 가족과 분리된 삶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구나.
그런데 이혼을 하는 것처럼 가족과 분리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 아닐까. 가족은 험난한 세상 속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지만 고유한 생명력을 발현하지 못하도록 옥죄고, 잠재력을 갉아먹기도 한다. 누군가는 앞 문장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누군가는 공감하겠지.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없는 게 훨씬 낫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내 얘기를 꺼낼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가족이 있는 척을 해야지. 어쩌면 살면서 고아원에서 자랐거나, 나처럼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지도 모른다. 다들 가족이 있는 척해서 잘 몰랐던 게 아닐까.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건 정말이지 성가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