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길숙 Aug 25. 2022

46분 11초 나의 행적

- 오늘 새벽, 할까 말까 하면서

정명훈을 만나고     


이른 새벽, 거울에 비친 내 흰머리가 심란하다. 엄지손톱 길이만큼 올라온 흰머리는 검은 머리와 대비되어 초라하다. 오늘 뿌리 염색을 해! 말아! 고민하는 이유는 같이 일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머리 염색도 안 하는 뻔뻔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다. 흰머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지만 모자를 벗어야 할 때도 많다. 나도 흰머리와 주름에 대해 자신만만한 날이 오긴 오겠지 하면서 오늘 일정표를 보니 도저히 미장원 갈 짬이 없다.


작업하면서 염색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유튜브를 켜자 알고리즘 타고 정명훈이 내게로 왔다. 브람스, 교향곡 1번 c단조 Op.68 (J.Brahms, Symphony No. 1 in c minor Op. 68) 연주 시간은 46분 11초. 지휘봉을 잡은 정명훈의 새치와 굵은 주름이 나를 사로잡는다.


https://youtu.be/MCYXSIumox4


시작과 함께 자막이 흐른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정명훈의 서사를 말하는 것 같다. ‘브람스가 교향곡 1번을 완성하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기나긴 과정과 고된 작업의 결과로 이 교향곡은 악상이 풍부하고 극도로 치밀하다.’ 단언컨대 정명훈의 지휘는 극도로 치밀하고 풍부하다. 그의 흰머리와 주름이 아름다운 이유다. 부러우면서도 정명훈을 닮을 자신이 없다.



박범신의 유리(流離) 또한    

  

정명훈을 만나면서 박범신의 유리(流離)를 펼쳤다. 띠지에 박힌 로그 라인이 강렬하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 이토록 간결한 로그 라인 속에 피와 살이 떨리는 방대한 서사가 펼쳐지다니! ‘44년 박범신 문학의 새로운 절창(絶唱)’이란 수식어가 더할 나위 없이 정직하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1980년대 말이었던가.. 1990년대 초반이었던가.. 서소문 호암아트홀에서 만정 김소희 선생님 공연을 관람했을 때 일이다. 공연 마지막 뒤풀이로 김덕수 사물놀이패 연주가 있었는데 많은 이들이 홀린 듯 무대에 올라 춤을 췄다. 나도 참을 수가 없었다. 김소희 선생의 소리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김덕수 풍물이 겁탈하듯 몸을 덮치니 전율이 몰아쳤다. 그때 박범신 선생도 같이 있었다. 전율이 잦아들 때까지 여러 사람이 호암아트홀 앞에서 휘몰아쳤던 감동을 얘기했고, 박범신 선생의 찰진 입담 덕분에 소리의 여운이 더 오래 이어졌다.



박범신의 유리(流離)는 ‘박범신의 맨발에 관한 전설’이기도 할 터. 주름과 흰머리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박범신을 왜 나는 닮지 못하는가?      



46분 11초의 결말    

 

브람스가 교향곡 1번 4악장 선율과 함께 자막이 흐른다. ‘...하지만 이내 찬가풍으로 울려 퍼지는 주제 선율이 전개되는데, 이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주제를 연상케 한다. 피날레에 이르러서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하는 듯한 확신에 찬 선율이 흐른다. 브람스만의 감수성이 빛나는 표현을 통해 브람스가 20년이 넘는 세월을 바쳐 얻어낸 최고의 순간임을 증명한다’ ~~라고.


단원과 함께 객석을 향해 인사하는 정명훈 얼굴이 하회탈 같다. 편안한 자유로움. “염색 그게 뭐라고 고민해요. 마음 가는 데로 하세요”라며 웃는다. 그래서 오늘 나는 시간을 쪼개 미장원 가서 뿌리 염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방금 내린 결정이 무산되지 않게 오늘 하루가 순탄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루빨리 내 흰머리와 주름이 당당해지도록  이 거목처럼 치밀하고 풍부한 내공이 쌓이기를! 나도 늠름한 숲이 되기를!


여적(餘滴)... 한 방울

지리산 절친이 보내준 숲 사진이다. 이곳에 새치 같은 버섯이 당당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