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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Pina Apr 05. 2024

다음에 할 일

 지금껏 어떤 일을 실행하는 데에 있어 내게 가장 중요한 동기는, 정해진 ‘마감시간’인 줄 굳게 믿고 있었다. 혹은 과거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최근에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나에게 또 다른 동기유발 요인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를 유추해낸 근거들이 꽤 많이 쌓였지만 어쩐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24년의 연초. 나는 산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저 유튜브 모니터로 전락해버린 아이패드를 잘 써보겠다며 강의 구독 서비스를 신청한 일이 있다. 올해는 혼자 점심시간을 보낼 때, 또는 출퇴근길 지하철로 오가는 동안 무조건 강의를 들으면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이런 비장한 결심을 들은 주위의 동료나 친구들은 참 너답다는 말을 하면서도, 곧 열의가 식을 것 같지만, 그래도 잘 해보라는 격려도 덧붙여 주었다. 실은 나도 이 마음이 오래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름 그룹 구독 할인으로 비용을 아꼈고, 결제하고 한 두 개만 완강해도 이득이지 않을까 싶은 계산이었다. 내가 벌이는 일은 보통 이런 식으로 시작됐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전까지는.



 예상대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 듣기를 미루는 기간에 돌입하게 되었다. 듣고 있던 특정 강의 중 하나에서 다음 강으로 넘어가려면 실습을 해야 했는데, 그걸 할 시간이 나지 않는(하기 싫은) 것이 이유였다. 점심시간 강의 재생 버튼을 누르다가도, 자꾸만 아이패드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싫증 구간'에서 기왕이면 영상을 보지 않는 것이라면 더 좋겠고, 허무하게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을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 언젠가는 하겠지 싶던 전자책 읽기에 닿게 되었다.



 이동시간에 책을 읽는 일. 언젠가는 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미루고만 있던 일이었다. 출근 시간은 도저히 책을 읽을 기분이 아니고, 퇴근 시간은 너무 지쳐있다는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에겐 환승 시간을 제외하고 지하철 안에서 20~30분의 시간이 나는데 그동안 책을 읽기에는 빠듯하지 않을까 짐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강의 듣기 말고 다른 무언가에 눈을 돌리고 싶었던 나머지 전자책 대여 앱을 깔아 바로 책을 대여하고 말았다. 시간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읽기 시작해 그렇게 두 달을 보냈다. 이 사소하고도 놀라운 변화로 어느덧 5번째 책읽기도 마쳤다.



 돌이켜보니 나는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방식으로 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가령 어떤 일 A를 하려다 하기가 싫어 미루던 B를 해치우고, 더 하기 싫은 C를 해야 하는 타이밍에 미뤄뒀던 A를 해내는 식이었다. 꼭 해야 할 일이나 업무 또는 하고 싶은 일 등 이러한 패턴은 유형을 가리지 않고 보이고 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 강의 듣기는 어떤 일이 하기 싫어졌을 때 또 슬그머니 시작하지 않을까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그토록 되고 싶지 않던 회피형에 속하는 사람이고, 바쁜 현대사회 속 나 같은 이들의 생존 전략이 이것일까 싶어 순간, 서글퍼지고 말았다.



 하지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얼마 전 이곳 브런치에도 썼듯, 내겐 일단 시작했다가 별 성과 없이 그대로 떠나보낸 일이 많지만 꾸준히 지속하고 있는 것도 있으니까. 옆길로 샜다가도 덕분에 미뤄둔 일을 시작했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 동기가 회피든, 단순한 호기심이든 결과는 남았다는 점에서 좋은 자체 평가를 주고 싶다. 비슷한 이야기를 쓰던 당시의 나는 새로운 일에 시선을 두는 대신 억지로라도 하던 일에 집중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힘을 빼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더불어 이 글은 어떤 일을 회피하고자 적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유를 찾자면 얼마 전 문득 깨달았던, 나는 도저히 쓰는 걸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각 그리고 다시 주기적으로 글을 쓰는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고 시작하기 싫은 마음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다음에 할 일들을 떠올리면서 조급해 할 것은 뻔하다. 사실 이미 떠오르긴 했는데… 이것은 미뤄둔 또 다른 일로 잘 막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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