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양복
기성복의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기성복의 출현은 300년도 채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완성미를 갖춘 기성복은 고작 200여 년에 불과하다.
첫 기성복은 남성용 양복으로 시작되었다.
18세기 초 런던에서 시작한 남성복은 주 고객층이 하층민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품의 질도 좋지 않았을뿐더러 대강 꿰매놓은 허술한 복식이었다.
헐렁하고 볼품없던 양복은 177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고급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양복과 코트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기성복 수요는 폭발했다.
아따! 이건 내 취향이네.
양복의 질이나 디자인, 색상을 맘대로 골라 입는 재미가 쏠쏠했다.
복잡한 과정 없이 즉석에서 사 입을 수 있는 양복은 기성복 시장에 활기를 불러왔다.
그때부터 남자들은 양복을 정장으로 차려입고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남성 와이셔츠는 1500년대 서유럽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었으므로 둘이는
찰떡궁합으로 만났다.
와이셔츠는 본래 전신을 덮는 길이로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서 치렁거렸다.
에잇! 커튼도 아니고 이건 뭐야.
이 거추장스러운 길이를 싹둑 잘라서 바지 속에 넣어 입자.
이렇게 와이셔츠와 양복은 영원한 짝꿍이 되었다.
기막힌 콜라보다.
언더셔츠가 없던 시절에 와이셔츠가 없었다면 양복은 끈 없는 갓이다.
바람이 불면 훌러덩 뒤집혀 속을 훤히 들켜버릴 허접함이다.
와이셔츠는 신체를 얌전하게 감싸고돌아 남자의 체면을 살려준 부속품이다.
둘이는 멋과 기능면에서 천생연분이다.
양복과 와이셔츠가 짝꿍으로 만났지만 둘이는 슬그머니 뭔가가 허전했다.
아차!
가운데 뭐라도 하나 들이자.
그래야만 덜 허전하고 멋있단 말이지.
그 갈증의 끝에서 넥타이가 등장했다.
오스트리아에 용병으로 파견되었던 1660년대 크로아티아 군인들이 리넨과 모슬린으로 된
스카프를 목에 감게 된 것이 넥타이의 기원이다.
멋쟁이 프랑스인 들이 이 스카프에 열광했다.
이것은 이웃동네 영국으로 퍼져갔다.
1666년 영국은 페스트로 인해 국가적 분위기가 어둡고 침울했다.
이럴 때 복장에 활기를 더해주는 스카프가 영국인들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크라바트(cravat)라 부른 이 스카프는 영국의 보 브럼멜(Beau brummel)에 의해
드디어 남성 전용 넥타이로 등장하게 되었다.
유행은 끝없이 패션을 가지고 놀게 마련이다.
라발리에르, 스톡타이, 보타이, 포인핸드로 변형을 시도했다.
좁았다 넓었다 짧았다 길었다 무한 변주를 반복하면서 지금 이곳에 서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장 보편적인 넥타이 형태는 포인핸드(four in hand)다.
길게 늘어뜨린 그 멋이 가장 오래된 넥타이의 장수모델이다.
무채색의 양복 속에 보일 듯 말 듯 감춰진 흰 와이셔츠.
거기에 화룡점정처럼 얹혀버린 넥타이는 양복의 진수를 매듭짓기에 충분하다.
참 점잖아 보이고, 정갈해 보이고, 지적인 분위기의 종합세트가 완성된다.
정장차림의 남성복은 기원이래 지금까지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누가 뭐래도 남성들은 양복을 제대로 갖춰 입었을 때 가장 멋지고 품격 있어 보인다.
여자처럼 다양한 복식이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겐 양복만큼 훌륭한 복장은 없다.
감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 그리고 보랏빛 넥타이.
오우! 숨어있던 감탄사가 불쑥 튀어나오는 복장의 마법이여.
사람의 인물을 살리고 죽이기도 하는 복식의 마술이여.
사람과 가장 밀착된 의상이야 말로 그 사람의 취향이고 환경이다.
단정한 옷차림은 언행을 자제시키는 힘이다.
복장은 그 사람의 아우라다.
참고 문헌: 김대웅.『최초의 것들』노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