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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Feb 10. 2023

시청역과 광화문 사이의 "Now and Here"

토요일 오후 뜻하지 않은 리추얼이 생겼다. 2017 이후에는 결코 이런 습관성 외출을 바라지 않았는데도, 최근 원치 않은 리추얼을 다시 갖게 되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분노의 해우소를 향하는 걸까.


토요일 저녁 약속을 따로 잡지 않은지가 한참 되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시청역 인근으로 나갈 일이 있어서이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손목을 잡아끈 것도 아니지만, 토요일 오후 4시가 되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향하고 있었다. 어쩌다 가족이나 지인들과 뜻이 맞으면 나름의 행동을 한 후 무교동과 을지로 부근에서 저녁을 먹기도 한다.


떠들썩한 이 자리는 분노의 힘으로 모여있지만, 그 속의 열기는 추모를 안고 민주주의의 축제를 향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함성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매주 토요일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와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들, 대학생 친구 모둠들, 홀로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 이들은 무엇을 위하여 이 자리에 모여있을까?


누구에게나 주말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러하기에 모든 이들에게 토요일 저녁은 따뜻한 식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주말마다 집을 나서는 사람들. 시청역 8번 출구를 나가면 하염없는 광야가 기다린다. 엄마손을 잡고 빨간 손팻말을 든 초등생의 눈에는 무엇이 보일까. 참다운 세상을 기다리며 맹추위와 사나운 바람과 싸우는 광장. 혹은 함성을 토해내고 노래 부르고 율동으로 추위를 날리는 어떤 축제의 장. 아이의 눈에 우리의 세상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도로 한쪽에서는 함성과 촛불이 켜지고, 반대쪽에서는 낯 뜨거운 목청의 확성기가 켜진다. 2016년과 2017년의 광화문 광장에서의 기시감이 그대로 적용된다. 몇십 년 전의 기억도 아니고 불과 몇 년 전의 기억이어서 너무도 또렷하게 소환된다. 양쪽 모두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은 비슷할 터인데, 역사와 현실 인식의 차이에는 차가운 장벽이 서있다.


지금, 우리는 독선과 오만과 오독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저렴한 문해력의 소유자들이 활개 치는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얼뜨기 언론이 편견과 맹목의 강으로 흐를 때, 반역사적이고 반민주적 세력이 국민의 생존을 위협할 때 시민들은 광장으로 나온다.


토요일 오후의 리추얼을 얻은 우리의 시민들은,

어떠한 기자보다 더 사실 전달과 비판에 적극적이고,

어떠한 사회학자보다 더 현실인식에 분석적이고,

어떠한 판사보다 더 지혜로운 판단과 결정을 내릴터이고,

어떠한 검사보다 더 정의롭게 기소권을 할 것이고,

어떠한 정치인보다 더 국민의 바람과 국가의 가치를 잘 이해할 것이다.




역사의 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50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1950년과 1980년에도 사람과 사람들 사이로 시간은 흘러왔다. 누군가는 부정한 세력과 대세를 거부하다 천명을 거부당하고, 다른 누군가는 시대와 대강의 흐름에 부역하며 목숨부지하였을 것이다. 그 행위의 정당성은 역사와 자신의 양심이 판단하였겠지만.... 이미 역사교과서에 나와있는 어떤 사건들의 주인공이거나 방관자로서 역할을 다하였을 것이다.


어떤 이는 박경리의 <토지>의 한 인물로 존재하였을 것이고, 어떤 이는 최인훈의 <광장>의 이명준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염상구로 살아갔을 것이고, 다른 이는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아버지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망원과 합정 사이로는 낭만이 흐르고, 광화문과 시청역 사이에는 역사가 흐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  사람들이 지나는 모든 시간에 역사는 흐름으로 이름을 남긴다. 역시나 2022. 10. 29. 이태원에도 시간으로 존재하는 시민들이 존재했었고, 그들의 부재를 슬퍼하는 2023. 2. 의 서울시청 앞 광장에도 시민들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는 아놀드 토인비의 얘기처럼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공간과 시간 사이의 그 어떤 것이기도 하다. 어떤 공간에 위치하고 어떤 시간대를 지나왔는가는 한 개인의 역사의 기록이고, 사회적으로는 통사의 기록이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누군가의 퇴진을 외치는 이들과 반대편에서 태극기를 품은 이들이,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간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고, 나라 구하다 죽었냐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도 미래가 없지만, 퇴보하는 민족에게도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전진하고 있을까, 퇴보하고 있을까는 질문의 영역을 넘어선다. 이미 공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우리가 어느 공간에 어떤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역사는 거창해 보이지만, 대부분의 역사는 늘 이 한 가지에서 결정된다.


"Now and Here."


우리는 지금, 어디에 위치하는가.

어떤 생각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가.

우리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알고 있는가.

이것만이 우리가 써나가야 하는 진실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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