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성파파 Oct 19. 2024

18. 에필로그

   밤새 폭풍이 몰아치고 난 뒤 고요한 새벽. 새들도 곤히 잠들었다. 멀리 남한산성의 산새들도 아차산의 새들도 선정릉의 새들도 밤새 잠 못 이루고 푸드덕거리며 나무를 옮겨 다닌 까닭이었다.


  비가 오면 새들은 물에 젖을 뿐이지만 인간들은 시시때때로 물에 잠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인재(人災)라 부른다. 역시나 갑작스러운 폭우에 강남의 어떤 사거리가 물에 잠겼다. 인간의 탐욕이 콘크리트 위에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물에 잠긴 차위에서 차분히 전화를 걸었고, 다른 누군가는 쌓여가는 빗물에 물길을 내기 위해 맨손으로 하수구를 뚫었다.


  기후 온난화 영향 때문일까.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경고를 보내주는 걸까. 아무튼 인간의 욕망과 부주의가 만들어낸 지구환경으로 인해 폭우와 폭염과 태풍이 번갈아 오갔다. 자연 생태계도 세상살이도 개인들의 삶도 순간순간 위태로운 순간을 지난다. 지나고 나면 별일이 아닌 것도 많지만, 큰일 날 뻔한 일도 많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자 법칙이다. 무시하면 큰코다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생각나무 주식회사 또한 그랬다. 뛰어난 인재와 AI 기술력 때문에 경쟁자가 없는 회사였지만, 여러 번 곤란한 상황에 휘말렸다. 아니 휘말릴 뻔했다. 이 또한 지나고 보니 외부의 위협과 공격을 받아 시험대에 선 순간들이었다. 다행히도 몇 개의 행운과 생각의 원천, 외부의 도움의 손길과 내부의 지혜로 슬기롭게 넘어갔다. 아니 지금도 그런 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외부의 위협과 도전은 상주하는 바이러스처럼 끊임없이 면역체계가 약해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살다 간 현자들은 늘 말하지 않았던가. 준비하는 자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나무의 누군가는 계속 긴장하고 주시하고 관찰하고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나무가 만들어내는 테라피는 한국에서는 당연히 최초이고 세계에서도 가장 먼저였다. 만들어 내는 족족 그랬다. 최근의 기억유지 테라피의 대성공은 잘 나가는 생각나무 주식회사의 위상에 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 테라피는 치매인구와 치료나 증상완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학적 성과가 인정되어 뇌과학 연구의 새로운 시발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 유수의 뇌과학 연구소에서 생각나무와의 협업 가능성을 타진했고, 그곳 중 몇 곳과는 다양한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 놨다. AI와 뇌과학을 통합적으로 조망하는 획기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그쪽 연구의 신세계를 열었다. 조기치매로 부모를 잃은 세계적인 대부호는 자신이 뇌과학 협업 연구소를 설립하는데 드는 비용 전액을 생각나무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하고 공증문서까지 전달했다.


  AI의 성장속도에 우려를 가지는 시선이 많아졌다. 빅테크 기업의 무한경쟁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AI의 등장은 현존 인류에게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다. 미국의 빅테크 업체 사이에서는 인공지능 AI의 위험성을 외부에 알리지 못하도록 직원들을 단속한다는 내부고발도 나왔다. 기업과 직원 사이의 고용계약에서 비밀유지 계약사항에 인류에게 미치는 위험성조차 국가기관에 신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경쟁과 성장을 우선순위로 강조하는 자본주의의 첨병인 미국 다웠다.


  AI의 성장과 규제에 대한 가장 발 빠른 대처는 EU에서 나왔다. 인공지능 규제법. 이 법은 AI기술에 대한 위험 레벨을 4단계로 구분해서 허용 불가능한 위험에 대해서는 개발이 금지되고, 높은 위험에 대해서는 주로 공적인 서비스 분야에서 활용되는 기술로서 인적감시가 필요하다는 조항을 여러 개 두고 있다. 이러한 입법 배경에는 AI 성장속도에 관심이 많았던 안단태 대표가 국제적인 이슈화를 이끌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과 유럽 여러 곳에서 공부했던 안대표는 세계의 석학이나 인공지능 기업 CEO들을 만날 때면 늘 강조하곤 했다. AI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이자 착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안대표는 대한당의 노덕술 의원을 통해 한국에서도 AI 기본법의 입법화를 도모하고 있다. 미국과 같은 안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EU 식의 규제조항을 두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한 AI의 성장·발전과 인류의 생존과 안전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고려하는 안대표의 혜안을 담고 있다.      



  결국, 생각나무에서는 제2의 창업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와 제품제작, 매출성장과 내외부의 요청을 살펴보면 인원과 규모를 크게 늘려야 했다. 특히 기억유지 테라피의 대성공 이후에 생각나무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지원팀에서는 제2의 창업플랜을 작성했다. 가장 먼저 매출규모와 성장속도를 볼 때 상장법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 근거로 생각나무가 코스닥에 상장된다면 엄청난 주식투자자가 몰려들 것이라는 유명한 펀드매니저의 분석을 곁들였다. 미국의 뉴욕증권거래소나 나스닥에서도 대박 흥행을 확신한다는 얘기도 했다. 그동안 여러 번의 신주발행을 통해 생각나무의 직원들은 대부분 백만장자 그 이상의 주식부자 될 거라는 기대효과가 있다고까지 말했다.


  기획팀의 서미연 과장은 청년실업에도 도움을 줄 수 있고 대학생들에게 동기부여가 가능한 청년인턴을 뽑자는 주장을 했다. 이 의견은 팀장들 전원이 찬성할 정도로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각 팀별로 수요조사를 통해 가능한 인턴 인원을 요청받기로 했다. 지원팀에서는 각 취업사이트에 청년 인턴 모집에 관한 공고를 내고 선발절차에 들어갔다. 40세 미만이라는 연령 제한만 있고 학력과 전공 등은 제한이 없었다. 물론 생각나무 앱의 게시판에도 모집 공지를 올렸다. 최근 주요 고객들의 연령층에는 이십 대 초중반의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나무 주식회사의 직원 수는 설립당시 30명에서 50명으로, 다시 100명으로 최근에는 150명 정도까지 늘었다. 한국 최초로 독립적인 AI연구소도 설립할 예정이어서 정확한 증가인원은 예측하기 힘들었다. 머잖아 300여 명 이상의 정규직원과 보안관리팀 인원까지 명실상부한 기업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안대표는 생각나무의 전문성을 성장시키는 방안으로 신규 데이터 확보와 데이터 통합능력을 꼽았다. 앞으로 AI의 발전은 속도뿐만 아니라 데이터의 양과 질, 데이터의 전문성에서 승부가 날 거라는 예측을 했다. 생각의 원천의 내외적인 성장을 위해서나 새로운 데이터 확보와 통합을 위해서나 데이터창작개발팀을 두기로 했다.


  데이터창작개발팀에는 뇌과학 심리학 인문학 사회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지원팀에서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해당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들에게 한국의 생각나무에서 일할 의사가 있는지 여부를 타진했다. 근무조건은 글로벌 기업의 수준을 상회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실제 우리나라의 유수기업들에도 수많은 외국 인재들이 근무하고 있지만, 이렇게 AI 관련 기업에서 선도적으로 인재를 유치하는 경우는 전례가 없었다. 물론 미국의 AI 빅테크 기업에서도 데이터개발팀이라는 낯선 부서는 처음이었다. 한 발 앞서 가야 두 번 더 생각할 수 있다는 안대표의 철학이 반영된 조치였다.      



  한편, 생각나무를 비방하거나 가짜뉴스와 조작질을 일삼던 언론사와 기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안대표는 생각의 원천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활용해서 필요한 정보를 모았고, 그림자 같은 손정의 보안팀장에게 몇 가지 업무지시를 통해 언론의 부당한 공격에 대응했다. 더불어 가짜뉴스 등으로 시민의 눈과 귀를 어둡게 했던 기자들과 언론에 대해서도 다양한 경로로 사실검증과 확인을 마쳤다. 손팀장은 국정원에서 정보요원으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의 원천과 안대표가 도출한 결론을 충실히 실행했다.


  손팀장은 기자들을 만나 간결하게 얘기했다. 기자들이 해당 기사를 쓰기 전에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먹었고, 그 대화가 어떻게 술술 진행되었으며, 기자가 만난 누군가가 그 이전에 다른 누군가를 만나 어떤 내용을 기자에게 전달할지를 논의하였고, 그 저녁자리에서 마신 술과 기름진 음식 값은 누가 지불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기자에게 전달된 현금 봉투와 계좌에 입금된 송금내역이 어떻게 기자들의 눈앞에 있게 되었는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손팀장은 별도로 기자들의 질문은 받지 않았다. 아니 기자들은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두 눈이 커지고 입을 더 크게 벌린 기자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고작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흐르는 침을 쓱 닦거나, ‘저기요 물 좀 마실 수 있나요’라는 구차한 멘트정도였다.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놀라움과 공포와 서스펜스가 섞인 복잡한 심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 것이다.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상황이 자기에게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부정의 순간이 영혼의 둑을 무너뜨리고 있을 것이다. 그저 펜을 쥐거나 키보드를 두드릴 때에는, 그 결과물이 언론이라는 매체를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 읽혀질 때까지는 마치 철갑을 두른 슈퍼 갑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들먹거렸겠지만, 손팀장이 보여주는 여러 증거물과 영상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인 슈퍼 을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늘 예외는 있는 법. 가끔 운명에도 없는 호기를 부리거나 손팀장이 가진 증거물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기자가 두 명 있긴 했다. 당시 이들이 항변하며 외쳤던 단어는 자유로운 대한민국과 언론의 자유였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를 소문으로 전해 들은 대부분의 기자들은, 아니 누군가의 부탁을 받거나 대가를 받고 쓴 나쁜 기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다리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지만, 그거야 호랑이 담배 피웠던 시절의 얘기고, 광케이블 인터넷으로 무장된 대한민국에서는 순식간에 수십만 리도 뛰어넘었다.


  그 뒤에 객기를 부렸던 그 기자들에게 벌어졌던 소소한 참사는 기자들 사이에서는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가벼운 예 하나를 들자면. 만용을 부린 기자가 근무하는 언론사 대표에게, 그 기자의 동료기자들에게, 그 기자의 가족에게, 호기심 많은 유튜버들에게 어떤 것이 전달되었을까. 소소하지만 낯 뜨거운 밀실 술자리 영상들, 서로 주고받은 현금봉투와 빵빵해진 계좌의 흔적들, 호텔에서의 은밀하면서도 농밀한 애정행각의 장면들, 굳이 만날 필요가 없는 이들이 만나 대화를 나눈 수많은 부적절한 상황들. 그리고 이러한 달콤한 상황을 원인으로 해서 작성된 어떤 의도된 기사들.


  아마도 언론사의 사장은 멍청한 놈이라고 대로하였을 것이고, 동료기자들은 기자 정신없는 멍청한 친구라고 수군거렸을 것이고, 가족들은 불의에 영혼을 판 멍청하고 창피한 가장이라고 외면했을 것이고, 호기심 만땅인 유튜버들에게는 꽤나 짭짤한 수익창출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리석은 한 번의 선택, 아니 두 번의 선택으로 인해 직업을 잃고, 가정과 가족을 잃고, 사회적 명예와 자존감마저 잃은 이들을. 모험심은 많았지만 자기반성이 부족했던 그 기자 두 명이 딱 그랬다.


  가짜뉴스와 조작을 일삼던 일부 언론사의 메인 서버와 클라우드는 회복 불가능한 공격을 받았다. 자신들의 존립기반이던 검은 돈줄과 불법 광고수주가 모두 까발려지고 그동안의 편향된 기사와 통계조작과 그러한 커넥션을 가능케 했던 다양한 비리가 온라인에 공개되었다. 그들은 극구 부인하고 언론의 자유를 해치는 반민주주의적 음모론이라고 몰아세웠지만, 한국기자협회는 물론 세계기자협회와 세계신문협회에서도 날카로운 비난성명을 쏟아냈다. 이들 역시 퇴로는 물론 탈출구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실제 기업과 로펌 등에서 돈과 다양한 향응성 대가를 받고 기사를 쓴 몇몇 기자들의 양심선언도 있었다. 겉으로는 기자의 자유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모양새를 갖췄지만 모든 것이 생각나무 측의 다정한 손길이 닿지 않은 케이스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몰랐겠지만.    

  


  반면, 한상훈 형제들은 어떤 상황일까. 꿈항아리 사건이 어지럽게 여론에 회자될 때, 숨기고자 하는 이슈를 해킹 이슈로 덮었을 때, 엉터리 같은 신속 수사로 유야무야 종결지었을 때 안대표는 뭔가 조치를 취했었다. 국정원 블랙 요원 출신인 손정의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생각의 원천의 특별한 기능을 통해 우선 한상훈과 그의 형인 검사 한영훈에 대한 빅데이터를 만들었고, 손팀장에게는 그 데이터를 공유하면서 이들의 상세 동향을 주시하도록 했다. 이들이 누구를 만나는지 이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누구로부터 돈을 받고 누구에게 돈을 주는지에 대한 정보가 하나둘씩 차곡차곡 모아졌다.


  검사 한영훈의 장인은 검사 출신으로 한국에서 세 번째 가는 로펌인 법무법인 유신의 대표 변호사였다. 그는 유신정권 때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렸고, 그 정권 말기 때 마지막 검찰총장이었다. 이 로펌은 설립당시부터 토건 건축 재벌세력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이들의 이익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주로 기업비리와 재벌가 오너들의 범죄, 재벌가 3세들의 온갖 범죄에 대한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해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꾸준히 이어오는 검찰과 경찰 내 인맥과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사회 각 분야의 보수인사들 덕분이었다. 법무법인 유신은 한국 최대의 로펌인 김앤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픈 욕망이 있었다. 그들은 꾸준히 전관출신 변호사 수를 늘리고 정관재계에 두루두루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늘려갔다. 그 핵심에 검사 한영훈과 토건 세력의 검은 돈줄이 있었다. 그 처가에서는 사위인 검사 한영훈을 검찰총장 한영훈으로, 다시 법무부장관 한영훈이나 국회의원 한영훈으로, 더 나아가 대한민국에 한자리밖에 없는 더 큰 자리로 나아간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검사 한영훈은 검찰 내부에서 아주 잘 나가는 초엘리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특수통과 정보통을 오가며 검사로서의 기초체력과 수직 신분상승의 인맥을 형성했다. 검찰 내부의 정보원에 따르면 실력에 비해 고평가 된 냉정하고 비열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를 잘 아는 전직 검찰총장은 철저한 학벌주의와 인맥에 의해 키워진 철없는 황태자라고 평가했다. 세간에 알려진 천하제일검이라는 얘기는 월남 스키부대의 허명과 같다고 했다. 기업수사와 정치 관련 수사에서 저승사자라는 명성을 얻었으나 그 명성의 실체는 두고 볼일이다. 그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를.


  손팀장의 조사에 따르면, 차장검사 한영훈은 주가조작과 코인 관련 사기 사건을 진두지휘하면서 얻은 내부 정보를 그 동생 한상훈에게 너무도 가볍고 쉽게 알려주고 말았다. 역시나 형제는 용감할 수밖에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얘기는 이 형제들의 우애에서 더 빛난다. 한상훈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나 고려도 없이 일반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그 정보를 활용하여 주식을 사고팔고 코인에 투자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보의 편향성이 가진 돈의 법칙을. 주가조작을 하는 작전 세력이 가진 게 무엇인가. 그들만 알 수 있는 정보와 적시에 사고팔 수 있는 타이밍. 그게 전부다. 하지만 그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대박의 기회와 투자의 귀재라는 별호까지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한상훈은 강남 출신의 좋은 머리에 남들은 알 수 없는 정보와 서울중앙지검 차장검사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가진 사나이가 아니던가! 결국 한영훈은 친구들 사이에서 뛰어난 컴퓨터 전문가로 성공한 사업가이자 투자가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안대표는 이들 형제 관련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은 손대지 않기로 했다. 좀 더 큰 껀수가 기다리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손정의 팀장은 안대표에게 은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네트워크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다.


  “대표님, 지금까지는 한영훈이나 한상훈 쪽에서는 우리 생각나무에 별 생각이 없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마인드컨트롤코리아 사건 이후에는 이 친구들 쪽에서도 우리를 주시하는 게 느껴집니다. 법무법인 유신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이 상당히 조심스러워서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 거 같습니다. 한상훈이 우리 생각의 원천에 백도어를 만든 것과 마인드컨트롤, 검사 한영훈과 법무법인 유신 그리고 신정부의 어떤 의도가 하나의 그림판에 들어오는 느낌이 좋지는 않습니다. 음, 이들의 네트워크를 좀 더 신중하게 지켜보도록 하죠.”


  이 친구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들의 계획이나 커넥션, 돈과 인간에 관한 전략전술이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계획을 세웠을 것 아닌가. 생각의 원천이 가진 특별한 능력도, 귀신같은 손팀장의 탐지 능력도 어느 선에선가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것은 생각나무 측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보안이 그만큼 철저해졌고 행동도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위를 살피게 된 것은 그들로부터 돈을 받고 기사를 쓴 기자 몇 사람과 광고를 실어주는 대가로 유리한 여론을 형성해 주는 언론사 몇 개가 정체불명의 상대로부터 치명적 타격을 입은 뒤였다.   

   


  그렇다면, 혼란의 도가니인 여의도와 정치권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을까. 그동안 한국정치는 독재에 준하는 초헌법적 대통령제와 고질적인 양당제로 브레이크 없는 음주과속운전 같은 세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가 정치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민들에게 실망 마일리지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그러던 여의도에 새로운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회에 쌓여있던 부질없는 이념논쟁과 개인비리를 감추려던 권력자의 실상이 하나씩 꺼풀을 벗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한 이념논쟁과 지역 정치적 공방을 일삼던 여의도에서는 여야 의원들 간에 훈풍이 불어왔다. 국가적 대의와 국민적 복리를 위한 법률과 정책에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서로 토론하고 합의하는 것으로 대승적 정치공동체를 구성했다. 일찍이 태생적 분열로 시작해서 사시사철 대립 중이었던 대한민국의 정치사에 없던 장면이다. 이 미증유 사건의 가운데 여당의 노덕술 의원이 있었다. 국회 부의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면서 국회의 고질적인 여야 정쟁을 불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혹자들은 노덕술 의원이 전생의 오명을 씻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정치개혁의 트리거 역할을 한다는 평가를 내놨다.


  정치권과 다수의 시민단체는 남북관계의 평화적 관계의 영속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국회차원에서 국민의 불안지수를 조사한 결과 불안의 제1 원인은 남북분단과 전쟁의 공포였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생적 공포가 그들의 삶 속에 뼛속 깊은 불안의 DNA를 숨겨놓고 있었다. 무한경쟁사회에서 쫓기듯 살아가면서도 내면적 불안까지 겹친 이중삼중의 불편한 현실에서 행복이라는 말은 사라진 고어 같은 존재였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을까. 결국은 불안과 공포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다. 여당 내에서도 한참 비뚤어진 남북관계를 부활 개선하고 전향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대통령실의 일부 인사가 색깔논쟁을 되살리면서 제비 몇 마리가 봄을 불러올 수 없고 매미 몇 마리가 여름을 불러올 수 없듯이 현실적인 변화는 두고 볼일이었다. 여전히 광화문 거리에서 이상한 군복을 입고 다른 나라 국기를 들고 외치는 이들과 이들에 의탁해서 나라를 위기상황으로 내몰고자 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대표는 인간적으로 더욱 친밀해진 노덕술 의원과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노의원은 최근 정치권력의 무개념과 몰염치 부조리에 격분하고 있어서인지 오가는 문장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정치사에는 늘 제왕적 권력과 사냥개들이 있었죠. 이들은 우리가 기억해야 될 역사나 국민들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죠. 오직 지들만 잘 처 묵고 모래알 같은 권력 유지하면서 부정 축재하는 거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물론 나도 한동안 그런 인간들의 욕망에 편승해서 너무너무 부끄럽죠. 자식들 보기도 민망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되죠. 요새 여기저기 보세요. 우리나라 돌아가는 꼴이 뭔지. 이게 나라입니까! 이런 개판 오 분 전 아사리판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는 큰 판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뭐냐!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랍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모른 체하고 있었던 거는 창피한 일이에요. 안대표, 이제 미친개 사냥을 시작해 볼까요? 시민의 인권과 삼권분립, 우리의 역사와 국가의 미래를 해치는 조직이나 사람은 이제 존재해서는 안 되죠. 사라져야 할 구악이자 적폐입니다.”    

  


  생각나무 인턴사원 면접이 있는 날. 대학교 4학년인 명주는 선정릉 옆에 있는 생각나무 빌딩을 두 번째로 방문했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내려 선정릉을 쭉 따라 걷는 길이 무척 떨리고 설렜다. 숲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경쾌했다. 안쪽 깊숙한 곳에 능처럼 보이는 봉분이 있었다. 저분들은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발걸음이 가벼워진 명주는 별별 생각을 다하며 걸었다.


  명주는 한 달 전 생각나무 앱에서 인턴사원 모집 공고를 봤다. 그 공지를 보는 순간 막연했던 생각에 확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사실 얼마 전부터 어떻게 하면 생각나무 주식회사에 입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바로 지원요강을 숙지하고 지원신청서를 다운로드 받았다. 지원신청서의 질문은 평범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AI가 가져올 미래사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등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명주는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꾸밈없이 적었다. 자신의 동생과 함께 제안했던 ‘기억을 보관할 수 있나요?’에 대한 스토리도 기재했다. 자신이 어떤 자격증과 어느 정도의 외국어 능력을 갖고 있는가 보다는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생각을 하였는가를 써넣었고, 여러 가지 잡다한 경험사항을 기록하기보다는 어떤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가를 밝혔다. AI가 가져올 미래사회에 대해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일자리 유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고, AI의 성장은 인간의 통제를 전제로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최근 취업준비생 대상 설문 조사 결과 취업하고픈 회사 1위를 차지한 생각나무 주식회사. 1차 서류전형에서 몇 백대 일로 경쟁이 치열했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명주는 사실 절반정도는 포기한 상태였다. 지원기간이 끝나고 2주 뒤에 서류전형 합격자로 통보받았을 때 날아갈 듯이 기뻤다. 마치 최종 합격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명주에게 생각나무는 소망스러운 일터였다. 공원길 끄트머리에 다다르니 생각나무 빌딩이 보였다. 반드시 저곳에서 일해보리라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저번 주 주말에는 친구랑 종로와 황학동 일대를 걸었다. 황학동의 중고서점에서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책들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깨끗해 보이는 어린 왕자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판매가격은 3500원. 예전에는 집집마다 한 권씩은 있었던 책이었지만, 명주네 집의 어린 왕자 책은 언제인가 이사할 때 버려지고 말았다. 내심 반가운 마음에 책을 집어 들어 상태를 살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책갈피 사이에 코팅된 네 잎 클로버와 색 바랜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요새 아이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네 잎 클로버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예전에는 다들 클로버나 단풍잎 같은 식물 잎사귀를 이렇게 코팅해서 책갈피로 쓰기도 하고 친구에게 선물도 했다고 했다.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펴보니 무슨 낙서 같은 게 적혀있었다. 어떤 초등학생이 낙서를 하고 여기다 넣어두었을까? 호기심에 종이를 크게 펴서 자세히 봤다.

  

  꿈이 이루어지는 독서법     


  오래된 종이에 적힌 내용의 제목이었다. 뭐야, 이것은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지. 이런 게 있을 리가 있나... 하며 웃었다. 어떤 초등학생이 자신의 일기를 적어놨나 생각했지만, 다시 그 내용을 살펴보니 뭔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생각의 씨앗이라는 단어, 생각의 씨앗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 대한 그림, 생각을 키운다는 문장, 생각의 씨앗을 사람의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문장, 그런 메커니즘을 풀어낸 손으로 그린 플로우차트, 그리고 마지막에 안단태라는 이름과 이름을 흘려 쓴 사인까지 적혀있었다.


  ‘어라! 글씨는 완전 초등생인데 생각은 초등생이 아니네. 그럼 뭐야 이것은... 그리고 안단태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봤더라....’


  그것도 최근에... 음... 흠, 잠시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산더미 같은 책이 쌓여있는 서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중고물품을 사러 나온 사람들과 풍물시장을 구경하기 위한 관광객들과 그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비둘기가 보였다. 좌판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과 막걸리에 김밥과 김치전을 먹는 사람과 그 뒤에서 뭔가를 집어먹는 비둘기 몇 마리가 느린 화면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문득 안단태라는 이름이 누구를 말하는지 떠올랐다.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이 종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깨달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꿈이 이루어지는 독서법’은 결코 장난이나 뻥이 아니었다. 안단태라는 초등학생이 그려낸 간절한 꿈의 증거였다. 안단태는 자신이 다음 주에 인턴면접을 봐야 할 생각나무 주식회사의 대표였다. 네 잎 클로버와 초등학생 안단태의 꿈이 이루어지는 독서법이라! 명주는 행운의 증표라고 굳게 믿었다. 누가 볼세라 급히 지갑을 열고 현금을 꺼내 들었다.


  면접전형은 3단계로 이루어지는 개별면접이었다. 무슨 인턴사원을 뽑는데 세 번이나 면접을 보다니, 속으로는 놀랐지만 내심 신뢰가 가는 측면도 있었다. 다행히 지원자의 편의를 위해 3단계 모두 하루에 이루어졌다. 실무자급 면접은 세 사람의 팀원 면접관이, 팀장급은 두 사람의 팀장들이, 그리고 마지막 대표이사와는 일대일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명주는 서류전형이 엄청 까다롭고 엄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무자와 팀장급 면접에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면접관들의 표정이 편해 보여서 그런지 이분들이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어려운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인지 궁금해졌다. 평소 다양한 독서활동과 친구들과의 대화가 이토록 유용할 줄은 몰랐다. 별도로 공부하거나 연습하지 않고 정리된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말한다는 것이 편했다.


  마지막 안단태 대표와의 대화시간은 10여분 정도였지만 자신에게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이라는 비밀병기가 있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더 차분해졌다. 안대표는 기억유지 테라피를 제안한 건에 대해서는 엄청 훌륭한 일을 했다며 칭찬했다. 안대표가 물었다.


  “명주씨는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저는 사회적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남북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과 이념논쟁이라는 끊임없는 분열의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교과서적인 말씀 같지만 이러한 분단과 분열을 끊고 통합과 화합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감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는 사회적 연대라는 외형 속에 들어있는 핵심 가치들입니다.”


  “만약 명주씨가 생각나무의 대표라면 첫 번째 프로젝트로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제가 대표자라면 저는... 행복 테라피를 만들고 싶습니다. 요즘 우리사회는 불행한 분들이 너무 많아요. 그분들에게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른과 아이들, 부모와 자식들, 선생님과 학생들, 부부들, 노인과 젊은이들, 부자와 가난한 이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레시피를 만들고 싶습니다. 비록 동화 같은 얘기 같지만요...”


  “으흠, 대단히 맘에 드는 테라피인데요. 저도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거든요. 하하하. 혹시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명주는 말보다는 자신이 준비한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내서 안대표에게 내밀었다. 그 종이를 집어든 안대표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고, 두 눈이 놀람으로 동그랗게 커졌으며, 그의 얼굴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큰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독서법’이 초등학생 안단태를 이곳 생각나무 대표 안단태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명주는 그 환한 웃음 속에서 자신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그나저나, 생각나무에 떠돌던 로맨스 라인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진짜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단태는 가족모임에 고민정 팀장을 정식으로 초대했다. 부모님의 거부할 수 없는 간곡한 요청이 있었고, 동생 니채의 항변 불가능한 친절한 부탁이 있었고, 단태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단태는 최근에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사랑과 사람이 혼동되어 사랑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사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실망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몇 번의 저녁식사를 함께한 니채는 엄마에게 너무도 솔직하게 고민정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설명했고, 아버지는 멋진 생머리와 똑똑하고 자신감 넘치는 전문직 여성이 아들 단태와 너무 잘 어울린다는 부가적 설명을 했다. 시원한 맥주와 밀도 있는 취중대화의 힘이었다.


  이들의 저녁모임은 가족들이 자주 가는 남도 한식집에서 이루어졌다. 한식은 가장 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다양한 주류에도 잘 맞는 마리아주가 많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니채는 와인을 몇 병 준비했고 식전주로 마실 막걸리는 식당에서 고르기로 했다.


  고민정은 안대표의 어머니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차분한 진남색 톤의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노란색 곱창 머리끈으로 단정하게 묶어 내린 차림이었다. 평소와 다른 산뜻해 보이는 옷맵시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안대표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민정을 보자마자 기대 반 설렘 반인 어머니의 눈에는 이미 어떤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얼른 민정의 두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마치 결혼식 끝나고 신혼여행 갔다 온 며느리를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어머, 우리 민정씨 반가워요. 우리 식구들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참 많이 궁금했었는데... 우리 집안 남자들이 왜 민정씨 얘기를 그토록 침이 마르도록 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가네요. 호호호.”


  두 사람의 첫 대면이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자 이들을 바라보는 세 남자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두 여성은 이미 여러 차례 만났던 사람들처럼 다정한 모습을 연출했다. 아예 민정의 자리를 옆에 마련하고 엄마가 어린 시절 잃어버린 딸을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음식을 먹으며 대화했다. 아마도 둘 사이에 정신적 코드가 맞았을 것이고, 심리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비슷했을 것이고, 사회적 관습과 매너에 대한 정도가 같았을 것이고, 세 남자의 시선을 받고 있다는 것을 동일하게 느껴서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서로가 빈 술잔에 술을 따라주고 이런저런 안줏감을 앞접시에 가져다주는 다정함은 엄마와 딸의 모습 이상이었다.


  멀뚱하니 쳐다보던 세 남자도 이러쿵저러쿵 눈치를 보다가 결국에는 자신들끼리 음식과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안대표는 이번에 또다시 책을 내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이번에 또 책 내신다고 그러셨잖아요. 책 제목이 뭐예요?”


  “음.... 그게 제목이 좀 상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데... ‘한국사회의 그럴듯한 개소리’라는 책이지. 인문사회 철학 에세인데 말이지. 허허허.”


  “오! 아버지. 그 책 제목 바로 귀에 꽂히는데요. 하하하. 무슨 내용인지도 바로 짐작이 가는데요. 저는....”


  병어조림에 든 매콤한 감자를 건져먹으며 와인을 마시던 니채도 실실 웃으며 아버지와 형에게 말했다.


  “히히히. 형, 그 개소리란 단어는 해리 프랭크퍼트 교수가 쓴 책에도 나오는데. 개소리에 대하여.... 형도 그 책 읽어보지 않았어?”


  “진즉에 읽어봤지. 현대사회의 위선과 가식에 빅엿을 날리는 문장들이잖아. 그 책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잖아. 도발적이면서 익살스러워서 그런 얘기를 듣는 당사자들도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을 거 같기는 하지만....”


  “그렇겠지. 우리사회에도 진리나 진실에 무관심하면서도 돋보이고자 하는 아무 말 대찬치하는 관종 같은 사람들이 많잖아. 농담처럼 내뱉는 개소리가 위험한 이유는 참과 거짓의 경계를 무시하고 논리도 맥락도 없이 진실을 호도하고 상황을 왜곡하는 거거든.”


  “오호라 그렇지. 요새 우리 정치사회가 개판이 된 이유가 그거지. 개소리하는 인간들이 많아진 것. 자신들이 개소리하는 것을 모를 정도로 분별력이 떨어진 사람들 때문에 우리사회에 불필요한 긴장감이 높아지고 위험해지는 거잖아...”  


  민어전 한 조각에 와인을 훌쩍이던 아버지는 아들들이 개소리론에 대해서 얘기하자 껄껄껄 웃었다. 민어전과 와인이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들들이 자신이 하고자 했던 문장들을 대신 얘기해 줘서 그랬다는 건지는 몰라도 흐뭇한 표정이 담겨있었다. 어느 새인가 두 여인의 시선이 세 남자의 대화에 박혔다. 어머니가 한 손으로는 민정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건배를 청했다.


  “여보세요. 우리집 남성분들. 가만히 보면 요새 우리 주위에 개소리하는 족속들이 너무 많아요. 특히 정치권이나 언론매체를 보면 아니면 말고나, 믿거나 말거나 식의 헛소리를 하는 인간들 때문에 우리네 삶과 진실이 위험해지고 있잖아요. 우리 집 남자들, 꼭 이런 부당한 현실에 타협하지도 말고 지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참,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민정씨는 우리 가족이 되었으면 하는데, 혹시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 있으면 개소리 한번 해보시든지!”


  엄마의 재치 있는 발언에 네 사람은 폭소하며 술잔을 들고 부딪쳤다. 쨍그랑. 하하하, 호호호. 서로의 술잔이 한데 부딪치고 서로의 마음도 부딪쳤다. 그 가운데 고민정의 얼굴은 한없이 붉어졌다. 술기운이 올라와서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말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앞자리에서 얼굴을 바라보던 단태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운지 부모들의 눈치를 살피며 지긋이 웃었다. 심지어 어설픈 윙크까지 날렸다.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잦아지자 민정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희 2차 가실까요? 시원한 맥주 마실 수 있는데 제가 잘 알거든요. 노래는 어떠신가요?”


  “아! 어머니라니. 이 듣기 좋은 호칭을 내가 그동안 아들들한테만 듣고 있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지. 어머니 할머니 소리 좀 듣고 삽시다. 아들들.... 다들 우리 민정씨가 안내하는 호프집으로 콜.”  


  엄마의 소망을 담은 불만에 모두가 크게 웃으며 다시 건배했다. 어찌 되었거나 생각의 씨앗을 심는다는 초등학생의 생각이 생각나무 주식회사를 통해 바람직한 결론을 맺고 있었고, 남녀 사이에 오가는 애정의 씨앗 또한 싹을 틔우며 가족이라는 결과를 향해 치닫고 있는 그런 오붓한 저녁이었다.



* 여기까지가 장장 18편에 걸쳐진 장편소설 <생각나무 주식회사>에 관한 스토리입니다. 어설픈 내용과 문장에도 따뜻한 관심과 격려로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고싶은 얘기, 해야 할 이야기들은 많지만 부족한 문장때문에 더 담지 못하고 <생각나무 주식회사 2>를 기약하고합니다. <생각나무 주식회사 1>에서 하지 못한 우리사회의 또 다른 고통과 극복방법에 관한 이야기, 한상훈 형제를 비롯한 빌런들과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비로소 전개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전 27화 17. 기억을 보관할 수 있나요?-기억유지 테라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