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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Oct 18. 2024

17. 기억을 보관할 수 있나요?-기억유지 테라피

그대 안의 시간을 초월한 자는 생명이 시간을 초월한 것임을 안다. 어제는 다만 오늘의 기억이며, 내일은 오늘의 꿈임을 안다.

- 칼릴지브란, <예언자> 중에서.   


  오늘은 목요일. 명주네 가족들 모두 일주일에 두 번은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한 날이다. 명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엄마는 전화통화 중이었다. 얼핏 느껴지는 통화분위기가 침울해 보였다. 말투로 보아 아마 지방에 있는 이모랑 대화하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거실로 들어오는 명주를 쳐다보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힘없는 손짓이었다.


  “응..... 그래그래, 우리 명주 왔네.... 그래, 엄마는 일단 네가 잘해드리고.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응, 그러잖구나. 너도 건강 잘 챙기고... 또 연락하자~~~”


  엄마는 통화를 끝내고 명주에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딸, 배고프겠네. 점심은 뭘 먹었니?”


  “아까 간식으로 도넛을 먹어서 아직은 배 안 고파요. 누구랑 통화했어?”


  “응... 저기 있잖니. 목포에 사는 둘째 이모....”


  엄마는 형제로는 이모 두 분과 외삼촌이 한분 있었다. 엄마가 맏이였고 외삼촌이 막내였다.  엄마는 큰딸 역할에 야무져서 외가의 온갖 대소사에 열심이었다. 외삼촌과는 거의 띠동갑으로 어릴 적에는 엄마가 업고 다녔다고 한다. 근심 가득한 엄마의 얼굴을 보고는 명주가 물었다.


  “엄마, 왜 이모네 집에 무슨 일 있데요? 큰애도 이제 고3일 텐데... 걔 이름이 뭐지. 아! 경호지. 공부가 잘 안 되나?”


  “아니, 이모네가 문제가 아니라... 저기 외할머니가....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으셨데....”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명주는 엄마 쪽으로 다가와 앉으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아이고... 외할머니 건강하시잖아. 시골에서도 잘 지내신다고 그랬는데... 치매는 혼자 계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렇잖아도 둘째 이모가 근처에 살아서 외할머니 집에 왕래가 많았다. 하지만 치매는 다른 상황이었다. 단순하게 생활물품이나 반찬거리를 가져다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 기다릴 것이다. 엄마는 물끄러미 명주를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명주는 가만히 엄마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 뉴스에선가 요새 치매 발병률이 증가한다고 그러던데. 점점 젊은 사람들도 늘어난다고 그러고.... 외할머니는 어떡하신데요.”


  갱년기를 무난하게 극복하면서 활기찼던 엄마가 오늘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다시 큰딸이 가져야 할 무한 의무감이 찾아든 까닭일까?


  “그니까. 이모들이랑 외삼촌이랑 얘기해서... 어떻게 할 건지 의논해 봐야지. 당장은 크게 무리는 없다고 하니까. 네가 알다시피 외할머니가 오죽 깔끔한 분이잖아. 평생을 선생님으로 살아오면서도 남들한테 손 안 벌리고 일처리도 다하시고. 할아버지 아프실 때도 자식들한테 아쉬운 소리도 안 하고 다 수발하시고 그랬잖아. 그러니 당신 마음은 얼마나 심란하시겠어....”


  “외할머니는 예전에 선생님 시절에도 우리들 가면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손주들 왔다고 외할아버지 재촉해서 장보고 음식 하시고... 그러고 보니까 우리 외할머니는 데게 열심히 사신 분인데... 치매가 찾아왔네요.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심한 상황을 아니라고 하니까. 좀 더 지켜보면서 고민해 보면 될 거 같은데....”


  엄마는 명주의 얘기를 곰곰이 듣더니 눈을 맞추며 살짝 웃었다. 밝지만 씁쓸하게.


  “그래, 우리 딸 말이 맞아요. 지금 당장 무슨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걱정만 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책이 나오겠지... 음... 그러고 보니 우리 명주가 아주 어른스러워진 것은 분명해... 하하하.”


  엄마의 헛헛한 웃음을 보고 명주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주방 쪽으로 가서 저녁준비를 하면서 두런두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역시나 걱정에도 수다는 명약이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지 않고 대화 속에서 근심거리를 떨칠 수 있는 게 좋았다.


  오늘저녁은 가족이 함께 저녁 먹기로 한 날이어서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와 호박전과 부추부침, 숙주나물과 시금치나물 두 가지를 준비했다. 가짓수는 많아 보이지만 재료만 준비되어 있으면 밥상 차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래지 않았다. 엄마가 찌개를 끓이는 동안 명주는 부추와 숙주 등 나물거리를 다듬어 씻었다. 엄마는 나물을 한소끔 삶아내서는 국간장과 마늘 참기름으로 무쳐 뚝딱 나물을 만들어냈다. 명주는 부추를 일정하게 자른 뒤 멸치액젓과 간장, 고춧가루와 참기름으로 살짝살짝 비볐다. 어릴 적부터 엄마를 도와 음식 만들기를 좋아했던 명주는 겉절이도 곧잘 만들었다. 봄동과 어린 상추, 부추와 연한 파는 겉절이 해 먹기 좋은 재료였다. 만들기도 어렵지 않지만 건강과 맛도 최고인 음식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준비한 결과 한 시간 만에 근사한 저녁밥상이 차려졌다.


  저녁 7시 30분. 현수에 이어 연달아 아빠까지 돌아왔다. 두 사람 모두 들어오면서 하는 인사가, ‘야 이 맛있는 냄새가 끝내주네!’였다. 아빠인 민부장은 최근 들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중년 테라피 제안자로 이름을 날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다양한 공사기업체나 사회단체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오늘도 모 대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가족 모두가 식탁에 모여 오늘 있었던 얘기와 음식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현수와 아빠는 나물을 보더니 비빔밥을 해 먹겠다고 해서 두 사람은 큰 양푼에 나물과 부추부침에 열무김치까지 넣어 쓱쓱 비벼먹었다. 참기름을 얼마나 넣을 것인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현수가 이겼다. 두 스푼.


  “현수야 맛있지. 아빠는 어릴 때부터 나물이나 무생채만 있으면 무조건 비벼먹었거든. 참기름에 고추장 넣고 매콤하게 비비면 다른 반찬도 필요 없잖아.”


  “네, 저도 최근에는 라면보다 비빔밥이 더 좋은 거 같은데요. 저번에 중2병 테라피 사용한 이후에는 식성도 변한 것 같아서.... 하하하. 아빠, 한 그릇 더 비빌까요?”


  “아빠, 요새 대학에서 강의하고 강연하는 거는 재미있어요? 피곤하지는 않아요?”


  “음... 피곤은 해도 보람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도 되고, 그리고.... 아빠한테 새로운 인생설계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줘서 좋은 것 같아. 얼떨떨하기는 하지만, 오늘 오후에 어떤 출판사 대표란 분이 연락을 주셨더라고. 단행본으로 중년에 대한 책을 한 권 써보면 어떻겠냐고.... 허허허.”


  책 출판 얘기까지 더해지자 가족들의 웃음소리의 톤은 더 높아졌다. 더 바빠졌지만 웃음이 많아진 아빠 때문에 명주네 가족의 분위기는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저녁을 먹던 중 엄마는 외할머니 치매진단 얘기를 했다. 아빠는 엄마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현수도 한입 크게 오물거리다가 엄마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엄마는 저녁 자리가 불편해질까 봐 아빠에게 눈짓하며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면서 급하게 마무리했다.  


  저녁을 먹은 후 후식으로는 배를 먹었다. 아빠는 배 맛이 예전 같지 않는다면서도 달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라고 했다. 현수는 외할머니 얘기를 듣다가 불현듯 시골 할머니 생각이 났다. 배 한 조각을 베어 물다 자신의 보물 1호를 떠올렸다.


  중학생인 현수는 오래된 사진첩 하나를 자신의 소중한 보물로 생각한다. 그 속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맞벌이하는 부모 사정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시골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할머니 댁은 전남 무안의 어느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논과 밭, 들판과 산이 잘 어우러진 그야말로 동화책에 나옴직한 그런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마을 바로 옆에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이 있어서 현수는 그 어린이집에 3년을 오갔다. 엄마 아빠 누나와 떨어져 있어서 많이 울었지만 집 뒤의 대나무처럼 무럭무럭 잘 자랐다. 할머니 댁 앞에는 텃밭이 있어서 계절마다 먹을 수 있는 푸성귀가 자라고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에 현수는 김치와 찌개와 국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게임기와 핸드폰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집 안팎에 혼자서도 여럿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놀 거리가 널려있었다. 심심해 보이지만 지루하지는 않은 시골의 풍경이 현수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의 현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박한 어린이의 생활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현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시골 할머니 건강은 어떠세요? 최근에 전화한 적이 없어서....”


  “응, 할머니. 잘 지내고 계시지. 아빠는 엊그제도 통화했는데. 고모도 자주 왔다 갔다 하고, 매일 동네 마을회관하고 복지관에 잘 다니신다고 그러더라. 우리 현수가 할머니 생각이 나나 보네. 허허허.”


  “저번에 어디 아프시다고 했잖아요. 두통인가 무릎인가....”


  “아! 하지정맥류 때문에 수술하시고 그랬잖아. 젊으셨을 때 들일을 많이 하셔서 그러실 거야.”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를 생각하는 현수를 애틋하게 바라봤다. 명주도 엄마랑 눈을 맞추며 슬며시 웃었다. 현수는 중3이 되면서 공부도 게임도 자신의 생각도 뭐든 열심이었다. 심지어는 책도 열심히 읽었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머리를 치면서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혹시 사람의 기억을 보관할 수는 없을까? 누구나 시간이 되면 기억이 없어지거나 희미해지잖아. 그래서 모두 사라지기 전에 그걸 보관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 기억을 보관한다고. 그런 기술이 있는지 아직 알려져 있거나 들어본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왜 네 기억을 보관하게?”


  “아니, 나는 아직 어려서 기억이 사라지거나 뭐가 중요하고 아까운지 모르잖아. 우리 외할머니나 할머니처럼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아쉬워할 것 같아서. 갑자기 밥 먹다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 할머니.... 그렇지. 우리가 추억을 소환하고 싶어도 지금은 방법이 없어서 기억이 안 나면 그냥 꽝이잖아.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걸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아마도 그런 방법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의학적인 검토도 해야 되겠지만....”


  남매는 엄마 아빠를 사이에 두고 할머니들의 건강과 기억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사이좋은 남매를 바라보며 부모들은 환하게 웃었다.      



  생각나무 회의실. 일반 시민들의 제안을 검토하는 기획팀의 자체회의가 있는 날이다. 서미연 과장이 한 달 동안의 제안주제를 유형별로 분석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생각나무의 맞춤형 생각 제안 게시판에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요청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농담이나 장난 같은 얘기도 있지만, 진지한 사연이나 과학적 근거를 둔 제안도 상당합니다. 저희 기획팀에서는 매주와 매월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제안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기획팀장과 팀원들은 귀를 쫑긋하고 서과장의 설명에 집중했다. 원형 탁자 위에 놓인 간식도 소리 없이 먹고 마시며 오물거렸다. 서과장은 좌중의 차분해진 분위기를 의식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비슷한 유형 분류를 해보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의미 있는 제안서가 꽤나 있었습니다. 기획팀 여러분 일복 터지셨네요. 하하하.”


  일복 터지겠다는 얘기는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래 일복도 좋은 복이다, 이런 표정들이었다. 서과장은 화면에 플로 차트를 띄웠다. 일목요연한 표와 그래프가 위아래로 정렬되어 있었다.


  “화면을 보시면, 정말 다양한 의견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토록 하고 싶은 게 많고, 이루고 싶은 게 다양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 기준으로 유형별 분류를 해놓았으니 각 팀에서는 구미 당기시는 주제에 대해서 별도 제안서 검토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기준은 잘 아시겠지만, 다시 환기한다는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사회 공헌도, 둘째는 선한 영향력, 셋째는 사회적 약자에 관한 요청이 우선입니다. 우리 생각나무는 영리 목적의 회사이긴 하지만, 처음 제안을 받기로 하면서 정한 이 기준에 맞춰서 여러분께서 제안서 검토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말씀드리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가지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서과장이 자신의 패드를 조작해서 화면을 바꿨다. 제안서 중에서 자신이 검토한 주제 하나를 화면 위에 띄웠다. 파란색의 문장이 흘러갔다. 쳐다보는 눈동자에 기억을.... 보관... 한다... 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기억을 보관할 수 있나요?     


  “제가 눈독을 들인 제안서 제목입니다. 검토서나 화면에 보시면 이와 비슷한 요청이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기억해야 할 일들, 추억하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다는 걸 보여줍니다. 특히 기억과 치매, 추억과 보관 등에 관한 요청은 고령화 사회나 뇌과학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걸 말해줍니다. 지금 보고 계신 ‘기억을 보관할 수 있나요?’ 제안은 이 주제에 관한 복합적인 질문과 해답을 모두 안고 있는 훌륭한 요청으로 보입니다. 우리 생각나무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어느 남매의 이야기와 사연이 담긴 제안입니다. 이 제안에 대해서도 좋은 의견이나 접근방법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 업무게시판이나 제 개인 메일로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5분간의 회의가 끝나고, 다른 팀원들의 눈 속에 ‘기억’이라는 단어가 떠돌고 있었다. 기억은 어쩌면 뇌자극과 관련된 생각나무의 역량과 잘 들어맞는 주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들이 모아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패드 화면에서 제안 목록을 살펴보며 어떤 요청이 의미 있을까를 고심했다. 예비 소비자들이 직접 제안한 주제가 생각나무에서 제품화되어 대박 히트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과장이 제안게시판 담당 직원으로부터 특이한 제목의 제안을 들은 게 일주일 전이었다. 20대 대학생과 중학생 남매가 보낸 사연과 바람이었다. 제안의 제목은, 기억을 보관할 수 있나요? 처음에는 다소 황당해 보였지만, 사연을 읽어나가면서 서과장의 머릿속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스치는 영감이 있었다.


  ‘그렇지, 생각나무가 가진 생각의 원천과 뇌자극 간의 상관성은 가능성이 무한한 영역 아니던가! 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시도를 하지 않아서 그 결과를 모를 뿐이지....’     


  제목: 기억을 보관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생각나무 담당자님.


  저는 생각과 인간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은 대학생 민명주입니다. 몇 개월 전에 생각나무 카페 체험을 통해 생각나무 주식회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생각나무 제품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진로고민하기 테라피를 사용하면서 확실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지난 몇 달이 지나면서 막막했던 진로에 대한 답답함이 구체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변해 가는 걸 느꼈습니다. 중학생인 제 남동생은 중2병 테라피를 사용하면서 차츰 차분해지고 공부와 미래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이 생각나무 제품을 사용하면서 생활과 태도가 개선된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게시판에 요청한 제안은 ‘기억’에 관한 것입니다. 최근 저희 외할머니 치매진단과 동생의 추억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가 가진 기억을 보관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치매 환자분들은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려서 그런 기억을 되살리는 게 큰 도움이 될 거 같고, 이런 방법이 있다면 치매예방에도 적잖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기억하고픈 추억거리들을 보관하거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 있다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뇌과학이나 의학 분야의 전문용어나 기술을 잘 몰라 서툴게나마 요청드립니다. 제가 요청드리는 제안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보관할 수 있나요?’입니다. 한참 어설픈 제안이지만 저희 외할머니 같은 치매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추억을 오랫동안 기억하고픈 수많은 분들에게 큰 기쁨을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서과장은 명주의 제안을 여러 번 읽었다. 게시판에 올라온 여러 제안들을 살펴보면 생각나무의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자들이 요청한 껀들이 많았다. 그만큼 테라피 제품이 개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 제안을 읽으면서 서과장 자신의 머릿속에서도 막연한 질문들이 계속 맴돌았다. 기억을 보관한다. 그런 게 가능할까? 그런 방법이 현시점에서 현재의 뇌과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실현성이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것들이 꼬리를 물고 오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떠오를 듯 말 듯한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도움을 받기 위해 기획팀장을 찾았다. 김도윤 기획팀장은 생각나무의 아이디어 뱅크다. 소소한 제안이나 스쳐 지나가는 생각 조각도 그의 손을 거치면 어김없이 그럴듯한 아이디어나 잘 팔리는 상품으로 변했다. 그래서 별명도 생각나무의 마이다스의 손이다. 인문학적 지식이 풍부하고 분야를 뛰어넘는 통합적 지적능력 때문에 안대표가 특별히 붙여준 것이다. 김팀장은 생각나무에서 모든 사업을 기획하고 제품개발 이전의 상황을 조정하고 정리하는 기획팀의 최적임자이다.


  때마침 김팀장은 자신의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말보다 생각을 앞세우는 그는 평소 기획팀 자체 회의도 15분을 넘지 않는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선 서과장은 명주라는 대학생의 제안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얘기했다.


  “팀장님, 그런데요... 우리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기억은 그 시스템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 생각나무의 시스템은 생각의 원천과 뇌자극을 통해 생각이나 그 유사한 것들의 씨앗을 심어 사람이 스스로 성장시키도록 하는 거잖아요. 지금 제 수준에서 보면 뇌자극을 통해 어떤 이미지를 재생하거나 문장을 떠올리는 것은 가능한 문제인데... 숨겨진 기억이나 잊혀진 기억을 다시 되살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김팀장은 얼굴에 큰 표정의 변화 없이 서과장의 얘기를 들었다. 가끔씩 손가락을 끄덕이거나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렸다. 팀장이 말이 없이 듣고 있자 서과장은 계속 자신의 얘기를 했다.


  “만약 뇌자극을 통해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치매치료나 예방은 물론 기억을 보관하는 것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인데요... 팀장님 생각은 어떠하신지... 히히히. 무리한 생각일까요?”  


  김도현 팀장은 서과장의 애교 띤 말투에 씩 웃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특유의 표정이었다.


  “과장님 말씀이 맞아요. 아니 옳아요. 지금의 기억이나 뇌과학에 관련된 연구들이 너무 한쪽에서만 진행되고 서로 연결이 안 되다 보니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거죠. 의학과 뇌과학 심리학 컴퓨터공학 이런 학문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도요. 다만, 각 분야의 지성들이 그렇듯이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대가들이 많잖아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잘 인정도 안 하고 무시하고. 한 사람이 여러 분야의 대가가 되는가도 현실적으로 어렵고요. 그러다 보니 지금 같은 문제점이 의미 있는 진행절차로 나아가지 못하는 거죠. 이 문제도 진즉부터 통합적인 연구나 실험이 계속 진행되었다면 획기적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죠. 삼십 년 전에 지금의 컴퓨터 능력을 어떻게 상상했겠어요. 최첨단 의학 장비나 반도체공학도 살펴보세요. 어느 누가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들은 하나도 없거든요. 꾸준한 생각과 아이디어 연구와 실험이 계속되면서 훌륭한 성과들이 나온 거죠. 그래서 기억을 보존하는 이 문제도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의 영역은 아닌 거 같아요. 서과장님이 유연하게 정리해서 제안서를 한번 써보세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평소에 말이 없던 김팀장은 강물 둑 터지듯 열변을 토하면서 서과장에게 엄지 척을 해주었다. 생각나무의 마이다스의 손이 내손을 들어주었다... 는 생각에 서과장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하게 바뀌었다. 고민의 물꼬를 튼 것이다. 전문가들에게 묻고 또 물어보리라는 결심이 굳게 섰다.      


  팀장들의 회의시간. 서과장은 그 제안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개요와 진행절차를 설명했다. 중간중간에 김팀장이 부연설명과 전문가 집단의 참여 필요성을 역설했다. 서과장은 안대표와 팀장들이 이목을 집중하자 남매의 사연에 이어 또 다른 안타까운 사연이 소개했다.  


  “교통사고 때문에 기억을 잃어버린 50대 후반의 부인을 위해 기억을 되찾아달라는 사연이었습니다. 남편 분이 보낸 편지글에 의하면 결혼 30주년 여행 때 발생한 가벼운 추돌사고였는데, 그때 뇌진탕이 기억상실을 불러왔다고 합니다. 일상생활을 무리 없지만 과거의 시간을 거의 기억을 못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현대의학의 힘을 빌어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저희 생각나무에 사연을 보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치매와 더불어 기억상실도 사실 현재의 의학 수준에서는 거의 치료하기 힘든 분야입니다. 좋은 의견 있으신 분들은 말씀해 주세요.”


  갑자기 누군가 흑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팀장 옆에 있는 최지민 팀장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회의실이 자신 때문에 조용해지자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희 친정엄마가 치매 진단을 받았거든요. 5년 전에요. 그때는 아버지도 아들딸도 몰라보는 급성 치매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큰일 날줄 알고 다들 우왕좌왕했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급성치매는 뇌경색이나 뇌졸중을 동반해서 오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하다고 하더라고요. 기억력 손상도 천천히 진행되는 게 아니라 급격히 진행되는 측면도 있고요. 음흠... 갑자기 서과장님 말씀 듣다 보니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버렸네요. 죄송해요.... 그러다 보니 엄마의 삶의 질이 엉망이 되어 버렸죠. 아빠도 마찬가지구요. 초기에는 가족들한테도 엄청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상당히 좋아지시긴 하셨어요....”


  최팀장이 눈물을 훔치며 말을 잇지 못하자 옆자리에 있던 고민정 팀장이 최팀장의 등을 다독이며 어깨를 감쌌다. 부모 이야기와 아이들에 관한 사연은 언제나 사람들을 싸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다들 전염성 강한 눈물 때문에 최팀장에게 촉촉한 눈길을 보내주었다. 안대표는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밝은 톤의 문장을 꺼내 들었다.


  “사실 치매나 기억의 문제는 우리 삶에 있어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죠. 남매의 제안이나 남편분의 사연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의학계에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미리 포기하거나 불가능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학과 뇌과학, 컴퓨터공학과 심리학 등 관련 학문에서 좀 더 통합적이고 학제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우리 생각나무도 더 섬세한 검토를 통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여지를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뇌과학 전문가들과 정신의학, 심리학 전문가들에게 뇌의 작용과 자극에 대한 의견을 듣고 그들의 도움을 전제로 우리가 개발 플랜을 세우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최팀장님, 서과장님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안대표는 추가적으로 여러 인맥을 동원해서 정신의학과와 뇌과학 전문가들에게 연락을 취해 이 문제를 더 심도 있게 진행할 예정이라는 얘기까지 했다. 여러 사람들의 눈빛에서 든든함이라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안대표는 확실하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위로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가 가진 지적능력과 물적능력, 인적 네트워크가 곧 자신감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프로젝트가 <기억유지 테라피>다. 사실 명칭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영어로 메모리 프로젝트, 기억 보존 프로젝트, 치매예방 프로젝트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으나, 결국 <기억유지 프로젝트>로 정해졌다.



생각나무 측의 의견요청에 대한 권위자들의 조언은 이랬다.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뇌과학 전문가와 정신의학과 교수들의 대화에서 의미 있는 문장을 몇 개 추렸다.


  “기억은 외부가 아닌 자신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작용의 문제입니다. 그 작용 자체가 보관의 실체인 거죠. 인간의 뇌는 신기하게도 보고 듣고 느낀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적시에 의미 있는 정보로 추출하는 것은 별론의 문제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어떤 기억을 찾는 것은 뇌의 어마어마한 용량을 생각해 보면 바닷가 모래 위에서 바늘 하나 찾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렇죠.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 나뉜 정보나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이는 게 아니라 두뇌 곳곳에 흩어져 정보처리가 됩니다. 문제는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끔 하는 인식체계가 발달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고난 지능도 의미 있지만 의외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죠. 시험 공부할 때 죽어라 반복해서 기억하고 답안지에 현출 하는 게 그 메커니즘의 원시적 버전이죠. 반복학습은 인식하는 통로도 만들고 정확성을 높여주잖아요. 사실 공부 잘한다는 것은 머리가 좋다는 의미보다는 이 패턴에 익숙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맞습니다. 컴퓨터가 연산능력이나 기억능력이 탁월한 것은 인간의 뇌와 달리 정보를 체계적으로 저장하고 이를 빨리 찾아서 표현하는 것이 시스템화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고 구조화되어 있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쩌면 컴퓨터보다 더 좋은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뇌 속에서 처리해야 할 것들이 더 많다는 게 걸림돌이죠. 감정이나 생각 등 오만 잡다한 것들이 시스템적 정리와 처리를 방해하는 거죠. 하지만 컴퓨터는 그런 복잡다단한 것들이 하나도 없잖아요. 오직 기억하고 연산하고 종합해서 질문에 답만 내어주면 그만인 거죠. 그래서 AI의 능력이 향상될수록 이 기능은 물론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나 이런 부분까지 포함될 가능성이 큽니다.”   


  “굳이 컴퓨터랑 인간을 비교해 보면.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좌절하는 단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물론 아예 성장하지 않는 경우도 많구요. 할 수 있음에도 시간이나 의지부족, 게으름 때문에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하지만 컴퓨터는 용량이나 능력이 허용되는 한 포기나 좌절이나 실수는 없죠. 전력만 공급되면 나태나 의지부족도 없고요. 허허허.”


  “그래서 인간에게도 기억을 일깨우는 메커니즘 불러오는 기제가 가능하다면 치매나 기억상실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지 않을까요? 문제는 현재까지의 인류의 과학문명의 수준이 우리 자신의 뇌기능과 작용을 정확히 모른다는 게 가장 큰 함정이죠. 그걸 알게 되면 컴퓨터 못지않게 빠르고 원활하게 상당히 많은 기억과 추억을 소환할 수 있을 겁니다. 모두들 천재소리도 듣고요. 하하하...”


  “결국 기억을 유지한다는 것은 기억을 저장하고 재생하는 통로와 자극에 관한 문제입니다. SF영화를 보면 기억을 강제로 없애거나 다른 기억을 주입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이런 스토리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지만, 기억 메커니즘에 따르면 얼마든지 가능성의 영역에 포함됩니다. 기술력만 뒷받침된다면요...”


  “현재로서는 치매나 기억상실의 부분도 병리적인 현상으로 접근하는 측면이 강하잖아요. 치료의 대상으로요. 그런데 이걸 다르게 생각해 보면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아래 숨어있는 정보를 다시 떠오르게 하거나 다른 통로를 개설해서 끌어오거나 하면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이때 인간의 뇌에 어떤 자극을 주느냐가 관건이고 연구대상인 거죠.”


  전문가들의 결론은 어떤 측면에서는 부정적이었다. 현대 의학기술과 뇌과학의 연구성과물에 따르면 치매나 기억상실을 치유하거나 기억을 찾아올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한계에 부딪쳐야 이를 뛰어넘는 열정이 생기고 특별한 노력 끝에 특별한 성과가 생긴다는 것을.     


  생각나무에서는 생각의 원천을 활용하여 현존하는 ‘기억’에 관한 모든 연구결과와 정보를 모았다. 방대한 분량을 다시 압축하고 추려내는 작업이 진행됐다. 만약 사람들이 이 작업을 수행했다면 엄청난 시간이 걸렸을 것을, 생각의 원천은 생성형 AI의 선두주자답게 빠르게 자신의 결론을 내놓았다. 다만, AI가 추출한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결국 사람의 손에 달렸다. 안대표는 처음부터 생각의 원천을 설계할 때 AI와 빠른 처리능력과 인간의 감성의 협업을 상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안대표는 빅테크 업체들이 무한경쟁에 빠져 AI가 인간의 통제범위를 뛰어넘는 것을 꾸준히 경계하고 있다.


  생각의 원천은 특이하게도 세계적인 장수마을을 연구검토 대상으로 소개했다. 그 마을들에서는 먹거리는 물론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되어 인간적인 연대감이 유지되고 있었고, 치매발병률도 극히 낮았다. 생각의 원천은 장수마을의 각종 연구결과물을 다시 시계열적으로 재분석하여 공동체의 유지가 사람들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적인 장수마을은 이탈리아의 비오따르지 마을과 라 레지오네 마을, 일본 오키나와의 오기미 마을, 아이노시마섬의 아카리가와 마을, 그리스 이카리아 마을, 파키스탄의 훈자 지구, 중국의 단지 마을, 코스타리카의 니코야 반도 등이다. 특히 파키스탄의 훈자는 1984년에 알려졌는데, 당시 그 지역의 평균나이가 120세였다.


  이 마을들의 공통점은 건강한 식습관,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 개방성과 사회적 연대를 통한 연결, 건강한 고령인구가 많고 치매인구가 극히 적다는 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


  또 하나, 생각의 원천은 우리나라에서 연구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소개를 했다. 모 대학의 연구기관에서 시골지역과 도시지역의 노인들의 생활과 두뇌활동에 대한 비교연구였다.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시골마을의 치매노인과 도시의 치매노인들을 추적 관찰해 본 결과, 시골마을의 마을회관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노인들이 훨씬 많은 언어자극에 노출돼 있어 치료에 도움이 되었다. 시골마을의 치매노인들은 거의 정상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지역에서 정서적인 마을 공동체 복원이 시급하다는 결론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100세 이상 노인들의 숫자는 전남 제주 전북 순이다. 모두 건강한 음식과 활동량이 많은 지역에 살고 있는 노인들이다. 또한 이곳은 전형적인 마을 공동체가 아직 숨 쉬고 있는 지역이다. 지속적인 육체적 활동과 공동체 생활 속에서의 적당한 자극은 육체적 건강과 뇌건강 모두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음은 생각의 원천이 내린 최종 결론이다.    


  지금 현재의 과학 수준에서는 완벽한 치매치료법과 예방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억상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는 적절한 약물치료와 인지기능 향상요법을 통한 진행 완화는 가능합니다. 향후 뇌과학의 발전 수준에 따라 두 가지에 대한 해법이 존재할 가능성은 열려있습니다.


  세계 여러 연구기관에서 실행하는 있는 치매(기억상실) 예방 및 치료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대부분의 연구에서 음식과 자연환경, 끊임없는 육체적 정신적 자극과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 연구에서는 유전적 요인을 최소화하거나 배제하고 있습니다. 자연환경은 통제 불가능 변수이나 선택 가능성의 영역입니다. 음식은 개인의 통제나 선택이 가능한 변수입니다. 마을공동체 생활은 사회문화적 통제 변수입니다. 생각나무에서 개발 가능 영역은 육체적 정신적 자극에 관한 것입니다. 재생 혹은 소환이 어려운 기억정보를 되살리거나 그 속도를 올리기 위한 과학적 방법은 자극활동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향후 보다 근본적인 예방법과 치료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가장 유효 적절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방법과 유사한 치료법치 전 세계적으로 실험적으로 사용되거나 기법이 개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만 기존의 실험 데이터가 의미 있을 정도로 축적되지 않아 보다 광범위한 시도가 있을 경우 획기적인 성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기법은 생각나무 안단태 대표의 뇌자극에 대한 특허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안단태 대표의 뇌자극에 대한 연구는 신경세포에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 기억흔적을 추적하여 이를 자극하는 메커니즘입니다. 뇌신경 세포에 특정한 자극을 주게 되면, 그러한 자극에 의해 그 세포가 다시 활성화되어 보관된 기억을 꺼내는데 유용합니다. 기억흔적에 관한 연구는 독일 과학자 리차드 세몬에 의해 주장되어 현재에는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안단태 대표의 연구가 이를 집대성한 결과물입니다.


  최근 AI를 활용한 치매 관련 기업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는 치매환자들에게 일정한 운동과 자극요법을 통해 질환을 지연시키는 정도입니다. 생각나무가 추진하고자 하는 통합적인 접근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참고로 그쪽 회사 AI는 인공지능 초기의 데이터 축적과 연구 분석 버전에 불과합니다. 



  개발팀에서는 생각의 원천이 분석해 놓은 결과물에 다른 연구기관의 성과를 합하고, 생각나무가 가진 뇌 자극에 관한 기술을 살려 <기억유지 테라피>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테라피 제작을 고지한 까닭에 생각나무 고객게시판에는 잊히지 않게 해 주세요!, 기억을 돌려주세요! 같은 사연들이 계속 쏟아졌다. 그만큼 치매나 기억에 관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가족들이 많았다.


  인간의 언어사용 능력과 뇌기능 활성화에 대한 상관성, 지속적인 육체활동이 뇌 건강에 미치는 실체적 연구결과도 반영했다. 생각의 원천은 이러한 취합 분석에 최적화된 역할을 했다. 안대표의 생각대로 생각의 원천도 꾸준히 자신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AI엔지니어가 요청한 역할을 뛰어넘는 아웃풋의 결과를 보면 특히 그랬다.


  모 대학병원과 연계하여 치매치료 중인 환자들의 동의를 얻어 <기억유지 테라피>에 대한 실험을 했다. 3개월의 기간을 추적 관찰해서 언어기능과 행동능력 향상 등의 기억이 75% 호전되는 결과가 나왔다. 부가적으로 환자들의 생활 활력으로 인해 삶의 질이 기존에 비해 65% 정도 향상된 것으로 분석됐다.


  또한 서울시내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경로당 내에 언어 자극과 행동 활력도를 높이는 공동체 환경을 조성한 결과, 연령에 관계없이 기억력과 얼굴표정이 좋아졌다. 이러한 실험 및 결과를 바탕으로 마을공동체 부활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여러 시민단체에서는 각 자치구와 더불어 마을공동체 살리기라는 사회운동 캠페인까지 벌이기로 했다. 이는 노령인구 중 치매환자 관리와 고독사 방지를 비롯하여 노인복지정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계기를 마련했다.


  연구와 개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안대표는 어머니와 식사자리에서 예전 얘기를 들었다.


  “30~40년 전 시골마을을 보면, 치매 노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거든. 물론 수명이 지금보다 짧은 이유도 있겠지만. 오래 사시는 분들도 많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 가만히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3대나 4대가 함께 살아가고 마을 공동체가 늘 가동되어 있어서 노인분들이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거지. 계속 논밭에 나가 들일을 하시면서 인지기능에 자극을 받아 치매 발병률이 낮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도 있어. 엄마 생각에는... 그때는 그런 추적 관찰이 어렵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존재하지도 않았잖아. 최근 연구들이 의미 있는 결과를 보이는 걸 보면 그때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치매는 인간의 고독이나 고립된 환경과 관련된 질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지. 예전 할머니들 보면,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동네 분들이랑 밭일하고 얘기하고 놀던 분들이 건강수명이 길었지.”


  “그니까 엄마 말씀은 노령인구의 환경을 개선하면 치매 예방이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사실 현대의학이 뛰어난 성과를 보이긴 하지만 유전적 요인 말고도 환경적 요인을 보다 정교하게 설계하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떤 치료법이나 예방법이 존재할 거 같기는 해요. 예전부터 식약동원이니 식후삼보 보약이니 하는 것들도 모두 행동양식에 따른 건강법이니까요.”


  “그렇지. 우리가 정신의학에서도 유전적 소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환경에서 질환이 비롯된다는 연구결과가 많은 게 그 때문이지. 문제는 현대사회의 바쁜 일상과 핵가족제도나 사회정책적 이유 때문에 대부분 약물치료만 하고 환경요건을 개선해서 뭔가 해결하는 노력을 못하고 있잖아. 일단 약물은 쉽게 효과를 보기도 하고 관리도 쉬우니까. 여기에는 대규모 자본이 개입된 다국적기업들의 의도도 포함돼 있겠지만...”


  “엄마, 그래서 저희 회사에서 <기억유지 테라피>라는 이름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환경조성에 목적이 있거든요. 어차피 예전 같은 공동체를 구성하기 쉽지 않아서 개별적 상황에서도 공동체에서 주는 자극을 받고 행동방식을 계속적으로 반복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직접적 치료나 예방은 의학 분야의 고유한 몫이라 저희가 할 수는 없고, 긍정적 자극을 위한 보다 용이한 방법론을 강구하는 게 저희 제품이죠.”


  안대표는 어머니에게 최근 기억유지 테라피를 장기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공익 목적의 사업으로 설정했다는 얘기를 했다. 이는 개발비용에 관계없이 무료로 원하는 이들에게 나눠준다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안대표의 생각에 적극 동의했고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다.



  최근에 여당의 최다선 의원으로 국회부의장이 된 노덕술 의원이 생각나무에 자신의 의견을 전해왔다.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서 전국의 자치단체장들의 협조를 구할 수 있게끔 다리를 놓아주기로 했다. 전국 자치단체장 연합 회의에서 마을공동체 사업을 구체화시켜서 도시 농촌 지역 관계없이 생각나무의 기억유지 테라피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예산지원을 약속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노의원은 마인드 컨트롤 사건 때문에 정권 핵심부와의 충돌로 인해 정계 은퇴를 할 뻔했으나, 오히려 그 이후로 정치적 위상이 더 높아져서 여당 몫의 국회부의장까지 하게 되었다. 자신의 정신적 정치적 변화에는 생각나무와 안대표의 도움이 컸던 탓에 생각나무에 관련된 일이라면 두 손 두 발을 걷어붙이고 도와주고 있었다. 마을공동체 부활을 위해 각종 시민단체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예산 확충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더하여 마을공동체를 살리고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는 의견까지 모아졌다.


  추적탐사 119팀에서는 기억유지 테라피 개발에 관한 전 과정을 시청자들에게 알릴 수 있게끔 생각나무와 긴밀하게 협조했다. 몇몇 시골 마을 공동체의 협조를 얻어 이들을 추적 관찰했고, 도시의 고립된 노인들의 기억유지 테라피 이용 상황을 추적해서 그 결과를 3부작으로 제작 발표했다. 이 3부작은 동시간대 33%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생각나무의 테라피 개발과정을 업무상 보안사항을 제외하고는 전부 공개했고, 실험대상자들이 긍정적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사실 그대로 내보냈다. 국내 치매인구가 100만 명에 이른다는 충격적 통계에 이어 기억유지 테라피의 뛰어난 기억유지 및 재생 능력에 대해 평가했다. 생각나무의 선한 의도가 마을공동체를 살리고 나아가 치매 예방 및 기억재생까지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 기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공헌이라고 칭찬했다.


  생각나무에 의해 만들어진 기억유지 테라피는 자체 홈페이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를 통해서 전국 방방곡곡에 뿌려졌다. 지자체에서는 자체 지원프로그램과 테라피를 함께 실행하는 계획을 세웠고, 시민단체에서는 치매환자의 치유와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복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잠실의 모 대학병원 장례식장. 최지민 팀장의 모친상에 생각나무 가족들이 모였다. 최근 기억유지 테라피를 출시하며 바쁜 일정에도 최팀장을 위로하고 조문하기 위해서였다. 흰 국화에 둘러싸인 영정사진에는 단아한 얼굴의 고인이 웃고 있었다. 상복을 입고 초췌해진 모습의 최팀장은 회사 사람들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바쁘신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엄마가 급성치매 진단을 받고도 상당히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셨어요. 다행히도 엄마가 계시던 동네에서는 경로당 프로그램이 훌륭해서 서로 웃고 얘기하고 했던 것들이 뇌기능에 좋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추진했던 프로젝트랑 과정과 결론이 같아서 속으로는 엄마에게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지막에 며칠만 앓으시다가 편하게 가셨어요. 가족들과 눈인사도 하고요. 정말 다행이에요. 가족들과의 기억을 가지고 가셔서...”


  최팀장은 엄마가 언어나 행동 자극 치료를 통해 건강하게 지내시다 요양원에도 가시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생각나무의 의도가 여러 면에서 옳다는 걸 증명되었다. 고민정 팀장은 며칠사이 수척해진 최팀장 옆에 앉아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쪽 건너편에서 그래도 호상이라며 오가는 대화와 웃음소리가 육개장과 술잔을 통해 건너왔다. 그랬다. 슬픔은 웃음 속에서 덜 슬퍼지고 다시 희망의 속살을 돋게 하는 씨앗이었다.     


  명주 남매는 생각나무로부터 가장 먼저 테라피 개발에 대한 결과를 전해 들었다. 제안자에 대한 당연한 대우였다. 명주는 엄마와 아빠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엄마는 외할머니가 좀 더 오랫동안 당신의 기억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했다. 명주는 엄마가 이모랑 통화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뿌듯해하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확고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지형이 눈을 반짝였다.


  “누나, 그런데 이런 테라피가 계속 업그레이드되면 우리 자신의 기억을 어디엔가 보관하는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루하루 일기 쓰는 것처럼.... 히히히”


  지형의 말에 명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오! 기억을 보관하는 방법이라.... 신통한데. 그런데, 그걸 하려면 생각나무 주식회사 같은 곳에 들어가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명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창밖에는 초승달에서 상현달로 변해가는 달빛이 고요했다. 잠들기 쉽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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