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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Oct 16. 2024

16. 추적탐사 119(2)

앵무새 프로젝트 2

  TV방송을 본 정피디는 다음날 오후 다시 생각나무를 방문했다. 호프집에서 같이 안대표의 답변을 들었던 팀원들의 뜨거운 격려 때문이었다. 저녁 9시에 실례를 무릅쓰고 안단태 대표에게 다음날 방문하겠다는 문자도 보냈다. 안대표로부터 즉시 오케이라는 답변이 왔다. 팀원들로부터 쿨가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동안 불도저나 망치병정 등 거친 별명에서 꽤나 정제되고 세련된 표현이어서 꼭 맘에 들었다.


  오후 3시에 다시 안대표의 방에 둘러앉았다. 생각나무 구내 카페에서는 그날의 간식과 커피를 준비했다. 생각나무에서는 안대표와 고팀장, 민팀장이 함께 했다. 정피디가 커피 잔을 들고 인사치레로 말했다.


  “안대표님, TV 화면에서 뵈니 꼭 연예인 같은 분위기이시던데요. 하하하.”


  “하하하. 연예인이라니 별말씀을요. 부끄럽습니다. 잠시 나와서 그렇지. 사전에 대기하고 분장실에서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꽤나 시간이 많이 소요되던데요. 촬영카메라에서 불이 들어오니까 어찌나 긴장되던지 영 마음이 불편하던데요. 평소에 피디님이랑은 그런 환경이 괜찮으세요? 허허허.”


  “저도 처음에는 비슷했죠. 그러다 적응되니까 조금 괜찮은 것뿐이죠. 지금도 카메라 울렁증은 여전합니다. 어제 보니까 대표님은 거의 프로 배우들 같은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저만 그랬을까요?"


  정피디가 말하면서 주위를 쭈욱 둘러보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안대표는 거듭되는 칭찬에 얼굴이 붉어졌다. 정피디는 안대표의 표정을 보고서는 좀 더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사실 어제 대표님 말씀하신 거 보고는 저는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자신의 얘기를 듣는 누군가에게... 혹시 저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죠?”


  광고업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발이 넓은 민팀장이 싱긋 웃으며 정피디에게 말했다.


  “어머, 피디님도 그렇게 느끼셨나요? 저도 그랬는데요. 아마 여러 사람들이 ‘저 멘트는 나에게 메시지를 전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호호호”


  대화의 분위기 때문인지 안대표도 치즈케이크를 한입 베어 먹으며 커피까지 마셨다. 달달한 게 땅기는 시간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의도한 바가 타인들의 시선에 그렇게 보였다는 게 다행이었다. 어떤 비밀을 전혀 관계없는 제삼자가 언급할 때 당사자들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을 터였다. 관계없는 제3자에게는 AI를 둘러싼 전문가의 일반적 시선을 얘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대표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분명한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그래서 앵무새까지 언급한 까닭이다.


  갑자기 어느 보수 신문에는 생각나무와 안단태 대표를 비방하는 칼럼까지 실렸다. 다른 신문에는 생각나무가 근거 없는 사기에 가까운 기술을 사용해서 선량한 시민들을 현혹시킨다는 논조의 기사들이 여러 개 있었다. 모두 안대표의 TV 출연 직후에 벌어진 일들이다. 정피디의 우려에 안대표는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오히려 추적탐사 119팀의 애로를 물었다. 정피디는 취재와 방송 관련된 최근의 일을 흥분하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던 고민정 팀장은 여러 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대표는 정피디의 프로그램 제작에 관한 난관에 대해 얘기를 듣고서는 동생인 니채가 수집 분석했던 얘기를 차분하게 해 줬다. 정피디와 민팀장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서 그런 게 가능해요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마트 텔레스크린과 마인드 컨트롤, 텔레스크린 프로젝트와 앵무새 프로젝트는 정확한 한 쌍이라는 얘기에 두 사람은 저절로 입까지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앵무새 프로젝트가 인간행동과 심리에 대한 통제에 대한 계획일 수 있다고 하자 눈빛까지 흐려졌다. 마인드 컨트롤과 한국정부 간에 무언가 비밀이 있을 거 같다는 얘기를 듣자 아예 침묵했다. 진짜로 놀랐을 때는 아무런 소리도 못 내는 법이다. 지금 정피디와 민팀장이 딱 그랬다.


  정피디는 솥뚜껑 같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는 심각한 제스처로 놀란 가슴을 표현했다. 자신의 팀원들과 지금까지 조사하려고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의혹의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옆에 놓인 생수병을 급히 따더니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급하게 마셨는지 사레들린 듯 컥컥거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도 생각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물도 잘 못 마시겠네요. 허 참... 그런 스토리... 아니 그런 비밀 시나리오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네요. 음... 어쩐지 저희 팀에서 여기저기 알아봐도 종잡을 수 없는 게 당연했겠네요. 그것이 진짜 팩트라면요.”


  세 사람도 정피디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는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상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소재들은 숨바꼭질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난처한 증인들이 소재를 감추거나 출연이나 인터뷰를 거부한 경우가 고작이었다. 이들은 문제가 분명하고 이해관계인들이 현실 속에 뚜렷하게 존재하며 그들 간에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이었다.


  고팀장도 안대표와 같이 니채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AI가 만들고 통제하는 실험이 얼마나 위험할지 예측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SF판타지 속에서 나오는 통제받지 않는 컴퓨터시스템이 인간을 종속시키는 얘기도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고까지 했다. 대화 분위기가 급속히 다운된 까닭에 안대표는 가볍게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에 불과하잖아요. 현실화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요. 실제로 그런 프로젝트가 존재해도 실행모드로 접어들기는 쉽지 않거든요. 좋은 일이라면야 소문내면서 하다 보니 금방 본래의 궤도에 오르겠지만, 뭔가 찝찝한 계획이라면 숨겨야 하고 새나가면 안 되니까 굉장히 은밀히 진행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의 계획에는 엄청난 예산과 인원이 필요해서 그런 부분을 관찰하다 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우리가 너무 오버해서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제가 주제넘게 방송에서 넌지시 메시지를 내보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거든요.”


  안대표의 침착한 얘기에 좀 한결 차분해진 정피디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한테 문자로 메시지를 전한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그 얘기를 할 수 없으니까 방송을 통해서 실체를 캐서 내보냈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었을까요? 저희 팀에서도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요. 계속 난관에 부딪히면서 내린 결론이 이거거든요. 일단 기다리자. 약한 고리가 끊어질 때까지. 틀림없이 옳지 않은 일이라면 곪아터지는 부분이 있다. 그게 약한 고리가 될 것이다. 웃기지만... 그런 결론을 내려놓고 외친 구호가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 였네요. 하하하.”


  여기까지 얘기해 놓고는 정피디는 웃었다. 허탈한 건지 상황이 우스운 건지 모르겠지만 갈피를 잡지 못한 자조적인 웃음일 수밖에 없었다. 딜레마에 빠진 정피디의 표정을 보면서 세 사람은 박수를 쳤다.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란 문장이 그들에게 박수를 불렀다. 웃음과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안대표가 정피디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안대표는 자신이 한참 전부터 고민했던 것들을 조용하게 얘기했다.   


  “정피디님, 이런 상황에서 순진하게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걸 아시잖아요. 상대가 만만하면 물어뜯고 짓밟는 게 정글의 숙명이 분명하거든요. 특히나 정치권력과 관련된 사안들은 대부분 약육강식의 본질을 내포할 수밖에 없죠. 수직적인 역학관계를 무기로 돈과 욕망의 결정체가 소용돌이치는 곳이 그쪽이잖아요. 그래서...”


  정피디는 안대표의 말투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옆자리의 고팀장과 민팀장도 눈동자를 모았다.


  “그런 자들을 상대하려면 좀 더 치밀한 전략전술이 필요하거든요. 힘과 무력을 가진 이들한테 정상적인 방법으로 덤벼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깨기와 같죠. 법으로 하자는 말처럼 순진무구한 것은 없거든요. 법은 강자들의 논리를 대변할 수밖에 없고 약자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최후의 항변이잖아요. 된통 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피디님, 중국의 병법인 삼십육계 중 제34계가 뭔지 아세요?”


  정피디는 안대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대표는 더 조용하게 말했다.


  “고육지책(苦肉之策)이거든요. 삼국지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상대방을 속이는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도구로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지금 이 계책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게 최후의 수단이거나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할 게 아니라 좀 더 고차원적인 고육지책을 써보는 것이 어떨까요? 고육지책에 제33계인 반간계(反間計)를 섞어서요. 반간계는 거짓정보로 적을 속이거나 서로 이간질을 시켜서 적을 기만하는 전술이거든요. 어떻게 한번 들어보실래요?”


  정피디는 역시나 말문이 막힌 듯 대답을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팀장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정피디 쪽으로 생수병 하나를 내밀었다. 네 사람의 얼굴이 테이블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안대표는 자신의 태블릿 PC를 열었다. 그 뒤로 한 시간 동안을 혼자 얘기했다. 안대표가 계책을 말할 때 정피디는 가방에서 꺼낸 수첩에 무언가를 메모했다. 고팀장과 민팀장도 그럴듯한 계획에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이런 내용이 어지럽게 쓰였다.     


  ‘먼저 방송 주제와 내용을 간략히 예고를 하고 여기저기 입소문을 내라... 그다음은 에둘러서 관련자들에 대한 취재를 해라...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움직이는 것은 있다... 언론의 특권을 최대한 활용해라... 나중에 취재가 실패할 경우에는 정정보도까지 할 각오도 해야.... 그러다 보면 반드시 귀인이 나올 것이다....’   

  

  아무에게 말은 안 했지만, 안대표 스스로도 이미 TV를 통해서 공전계(攻戰計)를 실행하고 있었다. 이 상황의 심각성을 고민하면서 생각나무 원천과 대화하며 자신만의 결론을 얻은 까닭이었다. 공전계란 삼십육계의 제3장으로 자신을 알고 적을 안 다음 적을 공격할 때 쓰는 6개의 계략이다. 이를 잘 사용하면 적은 스스로 자신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너구리를 굴 밖으로 나오게 하는 작전이다.



  정피디는 생각나무에서 나름의 묘책을 조언받고 돌아와서 곧바로 팀원들을 소집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과 준비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서로 분담할 사항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팀원들과 대화하면서도 안대표의 당부가 떠올랐다.


  ‘정피디님, 모든 것을 실재인 것처럼 해야 합니다. 먼저 나부터 속여야 남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게 타인의 눈에도 진실로 보이거든요. 팀원들에게는 이게 무슨 묘책이니 계획이나 이런 얘기를 하지 말고 실제 방송제작과정 그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우리 편을 먼저 속여야 다른 편도 속게 됩니다. 그리고 어차피 이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겠지만, 결국 그렇게 실존 프로젝트로 방송되어야 하구요.’


  119팀은 안대표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못했을 방송 주제를 정했다.


  ‘글로벌 빅테크 업체의 빅브라더 프로젝트, 이대로 괜찮을까?


  이 제목은 김현아 작가가 뽑아냈다.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고, 실제 당사자에게 주는 메시지도 의미 있게 보인다는 이유였다. 메인 스토리 보드는 오피디와 김작가에게 짜도록 했다. 미국의 빅테크 업체 관계자들에게는 이메일과 화상 인터뷰 등을 통해 방송분량을 딸 수 있도록 했다. 이쪽의 의도를 모르는 관계자들은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협조적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피디는 오피디, 김작가와 함께 머리를 맞댔다. 먼저 스토리의 소주제를 정했다. 그래야 거기에 맞는 팩트를 발굴하고 전문가들과 관계자들의 진술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과 달리 방송은 화면과 멘트가 전부다. 그 사이사이에 적절한 의도와 편집이 개입되어야 한다.


  첫째, 마인드 컨트롤이 다른 빅테크 업체와 달리 한국시장에 별도 법인을 세워 진출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둘째, 마인드 컨트롤이 다른 미국 내 빅테크 업체와 다른 행보를 비교 분석한다. 미국 정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드러난 부정적 내용을 집중 부각시킨다. 셋째, 이런 이미지의 마인드 컨트롤이 한국에서 익명의 사업을 하는 것은 별도의 목적이 필요하다. 넷째, 한국정부는 이들에게 무엇을 맡기려고 하는가? 실체가 안 보이면 꼬리를 찾아라. 국회 국방위원회 의원들과 국방부 인사들을 집중적으로 취재한다. 다섯째,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하라. 하나는 마인드컨트롤의 실체와 앵무새 프로젝트를 확인했을 때의 의혹과 문제점을, 다른 하나는 그러지 못했을 때 일반적인 AI발전의 위험성에 대한 주제로 진행한다. 여섯째, 다소 자극적인 요약 영상으로 방송을 광고하라. 한 달 뒤 방송 예정으로 이슈를 선점하라. 공중파 시사고발 프로그램에 대한 입소문은 빠르다. 그동안의 추적탐사 119 명성 때문에 더 많은 이목이 집중되는 효과가 있다.


  여기까지가 추적탐사 119팀의 제작 기획안이었다. 김현아 작가가 피디들과 작가들의 업무분담과 활동내역을 분배해서 다시 팀원들에게 제공했다. 정피디는 오피디에게 방송예고용으로 먼저 나갈 영상분량과 멘트를 검토하라고 했다. 마인드 컨트롤과 앵무새 프로젝트가 반드시 들어가게끔 요구했다. 예고방송 예정일은 사흘 뒤로 잡았다.      



  노덕술 의원으로부터 안대표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 당장 저녁을 먹자는 얘기였다. 며칠 전부터 국회에서는 추가경정예산을 두고 여야가 티격태격 대립하고 있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과 정부가 야당의 동의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대통령실에서는 예산동의를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입법독재라며 원색적으로 야당을 비난했다. 야당에서는 추가경정예산으로 국방예산이 늘어나는 것은 전례가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뭔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노의원은 저번에는 삼성동에서 자신이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이 저녁을 사겠노라고 공덕동 로터리 쪽으로 오기를 바랐다. 쭈꾸미 샤브샤브를 기막히게 잘하는 오래된 노포가 있다고 했다. 때마침 쭈꾸미가 제철이라 알이 통통하게 밴 쭈꾸미를 먹으며 대화를 이어나가자고 했다.  


  저녁 7시. 안대표는 스마트폰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10여 미터 뒤에서 손정의 팀장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TV 출연 이후 형의 안전을 염려한 니채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골목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돼지갈비 냄새가 시장기를 더하게 했다. 큰길에서 조금 벗어나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원조 마포돼지갈빗집 바로 옆에 허름해 보이는 노포가 있었다.

  

  가게 밖 수족관에는 싱싱한 쭈꾸미가 바닥과 벽면에 꼼꼼히 붙어있었다. 주문과 동시에 바로 수족관에서 손님상으로 직행하는 방식이었다. 홀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운데에도 모든 테이블에 손님들로 꽉 차있었다. 제철에는 일주일 전에도 예약이 안 된다는 맛집이다. 안쪽의 세 개 있는 방 중에 마지막 방에 노의원이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맑은 육수가 끓고 있었고, 옆에는 미나리와 기본반찬이 세팅되어 있었다. 노의원은 혼자서 이미 여러 잔 째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안대표가 앉자마자 소주를 한잔 따르면서 말했다.


  “아이고, 안대표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허허허. 자 한잔 받아요?”


  “별말씀이십니다. 의원님. 생각보다 가깝습니다. 지하철 한 번만 환승하면 5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주인장이 큰 양푼그릇에 살아있는 쭈꾸미를 가져와 펄펄 끓는 육수에 넣었다. 탈출하는 다리 몇 개가 전골냄비 위로 사투를 벌였다. ‘저기, 많이 익히면 찔겨지니께 살짝만 익힌 다음 다리부터 드세요’,라고 말해주고는 방을 나갔다. 쭈꾸미가 생사를 넘나드는 가운데 두 사람은 투명하게 넘실거리는 소주잔을 쨍 소리 나게 건배했다.


  “안대표님, 요새는 왜 이리 정치하는 게 싫은지 모르겠소. 나라를 위하는 건지 어떤 인간들을 위하는 건지 모를 정치판이... 여의도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살고 있지만, 지금처럼 불편하고 불안한 때는 없었답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럴까요? 허허허”


  안대표는 짠한 표정을 하고 있는 노의원의 하소연에 공감과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시는 거 같습니다. 요새 정치 관련 기사내용에도 국민은 간데없고 정치인 관련 이슈만 가득해서 도무지 국민이 정치를 위해 존재하는지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과학기술이나 시민의 요구는 앞으로 향하는데 정치를 둘러싼 우리의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쭈꾸미가 너무 연하고 맛있는데요.”


  “그렇죠. 요즘이 제철이라 샤브샤브로 드시면 최곱니다. 와사비 장에다 살짝 찍어서 미나리 익은 거에다 드시면 됩니다. 요즘은 예전 정치판의 낭만도 의원들의 기백도 대한민국의 미래도 모두 특정 집단에 의해 소멸되는 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대로 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선을 넘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요. 나뿐만 아니라 여러 의원들도 공감하고 있어요.”


  안대표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노의원의 눈빛을 지긋이 응시하며 얘기를 들었다. 노의원은 실내가 더운지 팔을 걷어 올렸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번 국방부 예산 증액하는 것도 그래. 아마도 이거는 저번에 내가 얘기했던 그 사안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전년에 예산에 편성이 안 된 사업을 회기 중에 갑자기 추진하려 하니 안 되지 않겠소. 거기에다가 대통령실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야당은 어떻게 설득하고... 엄청난 돈이 들 정도로 큰 계획이라면 우리가 다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서 뜻을 같이 하는 의원들 몇 분과 함께 일을 치를 계획이랍니다. 정치생명을 걸고서라도....”


  노의원은 더 과격한 무슨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러면서 방 밖의 움직임과 주위의 소음을 가늠하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역시나 30년 관록의 노회한 정치인답게 조심스러웠다. 안대표는 노의원에게 조용히 손팀장의 활약을 얘기했다. 조금 전에 미행이나 수상한 흔적이 없다는 손팀장의 보고가 보고가 있었고, 가게 출입구 쪽 자리에 손팀장과 다른 한 사람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요새는 조심해야 해요. 저 멀리서도 촬영은 기본이고 목소리도 녹음되는 세상이라서.... 허허헛. 사석에서 헛소리하다가 망신당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호텔이나 밀실보다는 오히려 이런 가게가 더 나아요. 사람도 많고 소음도 커서... 그건 그렇고 저번에 저녁 뉴스 시간에 명사 초대석은 잘 봤습니다. 속이 다 시원할 정도로 말씀 잘하셨어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따라 노의원은 뭔가를 말할 듯 말 듯하는 제스처가 강했다. 눈치 빠른 안대표는 노의원이 말하기 전에 동생인 니채와 나눴던 얘기를 상세하게 얘기했다. 마인드 컨트롤과 앵무새 프로젝트에 대한 관계가 나오자 소주잔을 들고 있던 노의원의 손이 떨렸다. 어느 순간 눈동자가 커졌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대표가 추적탐사 119의 취재와 정피디 얘기를 하자 안도하는 눈빛을 보였다. 전후 상황을 모르는 눈치가 아닌듯한 표정이었다. 안대표의 머릿속에서 혹시나 하는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안대표님은 똑똑하시니 제가 하는 얘기를 잘 알아들으실 겁니다. 지금 정부는 마인드 컨트롤사와 겉과 속이 다른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병영문화 만들기나 한미연합방어체계 구축은 형식적인 명목인 거 같고 실질적으로는 군인들을 마인드 컨트롤이 만들어낸 통제된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교육훈련받게끔 하는 목적일 겁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군대와 군인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거죠. 저번에 접었던 인간병기 프로젝트와 차원이 다른 계획이죠. 그런데 왜 하필 우리나라에서...”    


  “네, 저도 그 점이 불편하고 의문스럽습니다. 한반도 상황을 이용한 미국정부와 마인드컨트롤의 의도가 한국정부와 맞아떨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국정부는 수세에 몰린 국면전환용으로 이런 계획을 활용하려 하고요. 그래서 앵무새 프로젝트 관련 내용을 추적탐사 119에서 심층기획보도를 내보낼 생각인 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 실체 파악도 잘 안 되고 실마리가 안 풀려서 여러 가지로 난관에 부딪친 모양입니다. 저도 제 능력 밖의 일이긴 하지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의원님께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신다면 천군만마를 얻지 않을까 합니다.”  


  노의원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안대표를 바라봤다. 조용히 자신의 술잔을 들고 건배를 권했다. 푹 익힌 쭈꾸미 머리를 초장에 푹 찍어 씹어 먹기 시작했다. 입가에 흘러내린 초장을 손으로 쓱 닦더니 다시 술을 따랐다. 안대표는 와사비 간장소스에 다리 몇 개를 찍어서 먹었다. 노의원은 다시 한잔을 마신 뒤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날 노의원의 입 끝에서 앵무새 프로젝트의 문이 열렸다.      



  일주일 뒤. 공중파에서 추적탐사 119의 예고방송이 나갔다. 마인드 컨트롤과 앵무새 프로젝트에 대한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방송사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접속이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댓글이 달렸다. 일주일 뒤 본방송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다. 일간지에서는 이에 관해 신속하게 관련 의혹과 시민들의 반응을 보도했다. 기사마다 댓글과 대댓글이 수천 개씩 올라왔다.


  미국의 CNN은 마인드 컨트롤 본사 및 AI 시스템이 알 수 없는 해커들에 의한 해킹과 디도스 공격으로 시스템이 일부 파괴되었다고 보도했다. 자세한 피해상황은 알 수 없지만 화이트해커들의 소행으로 보인다고 했다. 자칭 해커라는 이들이 세계 유수 언론에 밝힌 바에 따르면, 마인드 컨트롤이 한국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해서 인간의 행동과 심리 통제를 위한 실험 프로젝트 계획은 정보통제 파놉티콘이라는 끔찍한 괴물을 불러올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전했다.


  마인드 컨트롤 코리아의 홈페이지는 아예 접속 자체가 불가능했고, 회사에서는 피해 규모를 밝히기를 꺼려했다. 국회에서는 여당의 노덕술 의원을 포함한 중진의원이 13명이 긴급 기자회견을 연다고 했다. 노의원의 의견에 동조하는 여당 의원의 수는 계속 늘고 있다는 후속 보도가 있었다. 소식통은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국방안보에 관한 정부정책과 밀실 프로젝트에 대한 항의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여당 내에서는 노위원의 행동이 해당 행위라는 입장과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의로운 행위라는 입장으로 나눠져 치열한 격론이 벌어졌다.  


  드디어 추적탐사 119의 본방송이 수요일 저녁 9시에 전파를 탔다. 글로벌 빅테크 업체의 빅브라더 프로젝트,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제목이 질문이 시작이었다. 담당 피디인 정민태와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김현아 작가의 대화로 문을 열었다.


  먼저 최첨단 AI가 활용되는 미래 사회에 대한 영상화면을 내보냈다. AI의 발전과 미래사회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빅테크 회사들의 명암을 조명했다. 특히 미국정부에 협조적인 마인드 컨트롤사의 성장스토리를 상세하게 전했다. 최근 한국에 마인드 컨트롤 코리아를 설립한 배경과 의도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한국정부에 직접 묻고 있지는 않지만, 앵무새 프로젝트와 마인드 컨트롤 코리아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통제하는 AI가 불러들일 한국사회와 미래의 어둠에 대해서도 말했다.


  TV를 시청하는 이들은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감이 커져갔다. 시청자들이 그 어둠에 대해 불안감이 고조될 시점. 무언가 시원한 한방이 필요한 타이밍. 결정적으로 실명을 밝힌 어느 유력인사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어두운 화면에서 목소리만 들리기 시작했다.


  “저는 우리 한국사회가 AI에 의해 통제받는 사회가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이 청춘을 소비하는 군대 내에서 통제받고 수동적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앵무새 프로젝트를 반대합니다. 또한 국민을 속이고 국민의 인권과 젊은 청춘들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우리 정부의 AI 통제시스템 도입을 반대합니다. 정부는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허울 좋은 국방안보 추진계획을 취소하기 바랍니다. 군의 최첨단화란 이유로 불필요한 전쟁의 공포와 긴장이 조성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아무리 나쁜 평화보다도 더 좋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꾸준히 발전해야 하고, 국가와 시민사회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우리 청춘들의 미래는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은 국민을 위한 민주공화국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국회와 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국민과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하지 못하고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해온 우리의 오늘을 반성합니다. 우리나라는, 우리 정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먼저 저부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물론 무릎을 꿇고 사죄드립니다. 지금부터는 오직 국민을 위해 올바로 나아가야 할 국가를 위해 나쁜 의도와 싸우겠습니다. 상대가 누가 됐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대한당의 국회의원 노덕술입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도무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캄캄했던 화면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영상에는 뒷모습과 손이 주로 보였다가 마지막 문장을 말할 무렵에는 서서히 전신이 드러났다. 아직까지 얼굴은 희미하게 보였다. 보는 이들의 궁금증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낯익은 얼굴이 정면에 나타났다. 대한당의 노덕술 의원이었다. 결연하고 비장한 표정이었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노의원의 발언은 동시에 자막으로 내보내졌다. 특히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라는 문장은 더 진한 색상의 자막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우리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멘트는 TV를 시청하고 있던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면서 큰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갔다.


  화면에 전신과 얼굴이 드러나자, 노덕술 의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앵무새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것을 얘기했다. 미국과 한국 정부가 대한민국 땅에서 추진하고 있는 비밀 프로젝트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말했다. 국가안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과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젝트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했다. 또한, 추가로 요청된 국방예산이 그 계획을 위해 동원될 가능성을 언급하며 더 이상 여당이 정부의 거수기로서 역할을 하지 않을 것임을 단언했다. 자신의 뒤에는 같은 뜻을 가진 35명의 의원이 있어 야당과 긴밀한 협조아래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를 끝까지 막을 것임을 강변했다.


  시청자들 대부분은 완벽한 결말에 깜짝 놀랐다. 결론을 알 수 없었던 드라마 속의 대반전이었다.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시청자들에게는 잘 짜여진 추리소설의 플롯처럼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의도와 광화문, 국방부와 용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부고발자가 야당도 아닌 여당의 잘 알려진 중진 의원이라는 점에서 놀라움은 더 크게 번졌다.


  제작과정과 세부내용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안을 유지한 까닭에 방송국 수뇌부에서도 모를 수밖에 없었고, 밤낮 가리지 않고 말을 듣는다는 어떤 새와 쥐새끼들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전국이 충격과 놀람으로 격동하던 시간이 지난 이틀 뒤 저녁. 삼성동의 어느 호프집에서는 박장대소하며 웃는 이들이 있었다. 안대표를 비롯한 생각나무 가족들과 정피디 일행이었다.


  정부 내부의 소식통에 의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온 소식은 마인드컨트롤코리아의 전격적인 사업 폐기였다. 프로그램 제작이 완료되고 방송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낸 사후 대책이었을 것이다. 그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미국과 한국정부의 비밀유지협약 위반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마도 서울시내 어디선가는 꽤나 불쾌하고 시끄러운 밤이 될 것이다. 격노해서 술잔을 들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그들은 유쾌하게 맥주잔을 들었다. 추적탐사 119팀에서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짠 김현아 작가가 거창한 건배구호를 외쳤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국민의 승리입니다. 저는 이렇게 가슴 벅찬 날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국가가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깨닫게 되는 날입니다. 오늘의 기쁨은 여기 계신 모두의 덕분입니다. 물론 여의도에도 몇 분 계시긴 하지만요... 특히 생각나무 주식회사의 안단태 대표님과 직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자, 여러분 오늘의 기쁨을 위해 건배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반드시 존재하는, 살아있는 정의를 위하여.”


  “살아있을 정의를 위하여, 살아날 정의를 위하여, 태어날 정의를 위하여....”


  제각각 자기만의 건배구호를 외치고는 한 모금씩 들이켰다. 박수소리가 오랫동안 생맥주집을 돌고 돌았다. 영문을 모르는 옆 테이블에서도 ‘국민, 정의’란 단어가 공중에 떠돌자 공감의 박수를 보탰다. 박수소리가 창문을 넘어 흘러갔다.


  안대표와 정피디는 마주 보며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에서는 생각나무와 방송국 팀이 서로가 손을 맞잡고 하이파이브가 파도를 타고 있었다. 그들도 방송과 마인드컨트롤사의 사업폐기 등이 한꺼번에 해결될 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정피디가 진중하게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모두가 안대표님 덕분입니다. 대표님께서 노의원님을 설득해 주시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정보까지 말씀해 주셔서 좋은 결과가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정피디님과 119팀의 사명감과 노력이 없다면 이런 저녁은 없었겠지요. 여기저기서 외압도 많았었고 고민도 하셨을 텐데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드려야죠. 하하하.”


  우여곡절을 지나온 두 사람은 다시 잔을 크게 부딪쳤다. 아주 작은 확률로 시작했지만, 우연과 노력이 합해져서 확신이 되었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대단한 것이었다.


  맥주잔마다 작은 기포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때마침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 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흥겹게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살짝살짝 어깨를 들썩이는 이들에게 노란 생맥주가 꿀물처럼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생각나무 지원팀의 누군가가 생크림 케이크를 사 왔다. 커다란 케이크 위의 초에 불을 붙이고 오늘의 승리를 기념했다. 서로 건배를 하고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대화했다.


  고민정 팀장은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안대표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밖으로 나가자는 신호였다. 감동과 흥분의 여운이 남아있던 까닭에 두 사람의 볼은 붉게 빛났다. 호프집 테라스에 살짝 기댄 안대표가 말했다.


  “참으로 별일이에요. 노덕술 의원님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꼰대 같은 사람이었잖아요. 권위적이고 능글능글한 캐릭터... 그런데 몇 번 만나 뵙고 얘기 나누면서 나라와 국민에 대한 진심이 강한 분이라는 걸 느꼈어요. 다만, 한 가지 의문인 것은 사람이 변하기가 쉽지 않은데... 노의원님은 굉장히 바람직한 캐릭터로 바뀌었거든요. 제가 방송 제작을 말씀드리고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도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오케이 하셨거든요. 당신의 정치적 입지도 있을 텐데요. 그게 참 신기해요.... 허허허.”


  안대표의 얘기를 듣던 고팀장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아아, 그것도 모르셨어요! 우리가 저번에 개발한 공감능력 테라피 있잖아요. 그거를 실천시민연대에서 국회에 가장 먼저 뿌렸잖아요. 소현희 변호사가 그랬거든요. 그때 여당 의원들한테 집중적으로 권장했다고요. 이걸 하시면 정력이 좋아지고 젊어진다고요. 물론 꿀잠을 자는 것은 덤이고요. 아마도 그때 노의원님이 열심히 테라피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히히히...”


  안대표는 고팀장이 말하는 뜻밖의 내용에 깜짝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맥주 몇 잔의 취기가 확 깨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런 정말로 그런 일이 있을 수가요! 진짜요...”


  두 사람은 모처럼 크고 유쾌하게 웃었다.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하다가 하이파이브까지 했다. 서로 맞잡은 손을 오랫동안 놓지 않았다. 선정릉의 숲 속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놀란 새 몇 마리가 저녁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커버 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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