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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Oct 14. 2024

16. 추적탐사 119(1)

앵무새 프로젝트 2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아니, 형님. 그러니까 국장님 말씀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취재를 멈추라고요. 지금 제정신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저번에는 모든 자원을 총 동원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방송국 8층에 위치한 제작국장실 오전 11시. 밖으로 고성이 흘러나왔다. 정피디는 핏대를 올리며 거칠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한번 필에 꽂히면 물불 안 가리고 추진하는 그의 성질상 당연한 반응이었다.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하던 제작국장은 정피디의 우락부락한 표정에 팔짱을 끼며 허리를 폈다. 그러면서도 잔잔한 미소로 정피디를 살살 달래 가며 말했다.


  “허허허, 그랬지. 근데 그게 말이야. 나도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국회 쪽 하고 대통령실 쪽에서 무슨 언질이 있는가 봐.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프로그램의 진퇴여부까지 고려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나도 화나지. 이 새끼들이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런 얘기를 다하고 말이야. 나도 대표님이 극구 부탁하셔서 자네한테 하는 얘기야! 자네도 알잖아. 그 양반이 이런 얘기를 우리한테 할 위인이냐고! 뭔가 난처한 상황인 게지.”


  “허참.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그리고 법무법인 유신인가 하는데서 방송금지가처분을 신청한다고 그랬다고요. 아니 차라리 취재금지가처분을 하라고 그러시죠.”


  “그러니까, 유신인가 그쪽에서 변호사들이 대표님을 방문해서 전달한 거래. 뭐가 구린지 모르겠네. 나도 나중에 듣고 알았다니까 그러네.”


  “그렇죠...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방송이나 취재를 압박하는 걸 보면 뭐가 있는 게 분명하죠. 아직 취재 중인데도 이런데 방송한다고 그러면 진짜로 난리 치겠는데요. 어쩌면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기겠는데요.”


  “그러게. 이런 식으로 방송을 통제하려고 하는 걸 보면 예전 80년대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몰라.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도 아니고 말이야! 참...”


  제작국장 또한 피디 출신으로 한 성질 하는 유명한 인사였다. 정피디와는 호형호제하며 서로 소주잔을 자주 기울이는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다. 이번 취재도 제작국장의 전격적인 지지아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방송국에서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옳은 일이라면 누가 뭐라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 같았다. 두 사람이 앞장서서 했던 가장 큰 일중 하나는 정권의 나팔수로 대표이사로 취임했던 어용인사를 축출했던 사건이었다. 그때는 방송국 노조와 전국기자협회, 세계언론인협회까지 그들 편에서 서서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던 정권의 시도를 무마시켰다. 그때 두 사람은 삭발에 단식투쟁까지 했던 장본인들이다.


  지금의 대표이사는 언론탄압으로 해임되었다가 복귀한 피디 출신이다. 그의 첫 일성은 ‘방송국 구성원들이 그 어떤 것에도 통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는 방송환경 만들기’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보도참사 방송사, 방송사고 대명사’라는 오명을 벗고 공정방송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게 되었다.

 

  “그래도 이번 건은 안 됩니다. 사실 사장님도 우리 상황을 잘 아시잖아요. 이런 이슈들을 방송으로 내보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정치권에서 압박을 하더라도 사장님이나 형님이 방패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다들 나이 드셔서 이제 우리의 부당한 현실이 만만해 보이는 거는 아니죠? 어쨌든 외압이든 압박이든 그거는 두 분이서 알아서 하세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간에요...”


  정피디의 붉으락푸르락한 모습을 한두 번 봐온 게 아닌 제작국장은 난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두 손을 모으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래 나는 분명히 정피디한테 말했다. 사장님이 얘기한 것을 전달했으니까 내 몫은 여기서 끝난 거야. 대신 자네 프로는 알아서 잘해봐. 자네도 알다시피 나도 사장님도 이런 시늉이라도 해야 체면이 설 것이 아닌가! 부탁한 놈들이나 협박한 놈들한테는 이렇게라도 해야 어떤 식으로든지 전달이 될 테고 말이야. 점심약속 없으면 같이 곰탕이나 한 그릇 할까? 아니면 순댓국에 막걸리라도...”


  정피디는 가타부타 대답하는 대신 출입문을 꽝 닫으며 나왔다. 부속실에 있던 직원이 깜짝 놀라 정피디를 쳐다봤으나 고개만 까딱하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저 성질머리 하고는, 쯧쯧쯧’ 하며 제작국장의 혀를 차는 소리가 메아리로 들렸다. 100킬로에 육박하는 몸무게에서 나오는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창밖 저 멀리서 국제선 비행기 하나가 비행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지평선과 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이었다.      



  방송국 4층의 회의실 오후 4시, 추적탐사 119팀의 제작회의시간. 테이블 위에는 컵라면 그릇과 커피 잔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정피디는 자신이 국장실에 갔다 왔다는 대강의 얘기를 하고 나서 팀원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다들 월급쟁이 신세지만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대한 응원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나름의 사명감이 이들을 외압이나 회유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발그레해진 정피디의 얼굴에는 어떤 고집이 서려있었다.


  정피디는 결국 제작국장과 함께 순대국밥을 먹었다. 방송국 뒷골목에 있는 직원들의 단골집이었다. 이 집은 돼지국밥과 순대국밥을 주로 팔았다. 손님들은 막걸리나 소주에 얼큰한 국밥을 안주로 먹었다. 앉자마자 서둘러 막걸리부터 시켰다. 벌컥 소리 나게 들이마신 정피디가 말했다.


  “형님, 죄송합니다. 하도 성질이 나서. 방통위나 국회나 대통령실이나... 지들이 뭐라고 콩 놔라 팥 놔라 간섭하고 훼방 놓고 협박을 하지 않나. 흐흐흐.”

  정피디는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막걸리를 연거푸 몇 잔 마셨다. 제작국장도 막걸리를 건배하고는 국밥 속의 순대와 고기를 몇 개 건져먹었다.


  “그니까. 말만 민주사회지. 뭐 이 놈 저놈 하는 짓거리는 아직 한참을 멀었지. 아직도 쌍팔년도를 못 벗어났어. 어떻게 되는 게 이놈의 나라는 앞으로 가도 시원찮은데, 한참을 뒤로 가는 거 같기도 하고. 나도 미안허네. 우리 사장님도 속이 아닐 것이네. 잘 알잖아. 그 양반 성질. 더럽고 아니꼬운 거 못 참는 거...”


  “그야 저도 잘 알죠. 서로 알고 지낸 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번에 보니까 뭔가 켕기는 놈들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죠. 이렇게 일개 방송 프로그램 하나 때문에 여기저기서 말들 나오는 거 보면.... 그래서 말인데요. 더 오기가 나는데요.”


  “그래. 일단은 나랑 사장님이랑 적당히 알아서 모른 체할 테니까 눈치껏 해봐. 팀원들 보안 유지 잘하고. 요새는 밤낮 안 가리고 듣는 귀를 조심해야 되는 시대잖아.”


  “예, 알겠습니다. 형님이 이해 잘해주셔서. 아무튼 조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막걸리 한 병을 추가로 더 시켰다. 낮술이 땡기는 날이 따로 있는 법이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비라도 한바탕 내리면 더 좋으련만 하늘은 무심하게 푸르고 높았다.


  피디들과 작가들이 원형 탁자에 빙 둘러앉은 사이에서 정피디는 고민에 빠졌다. 턱을 괴고 앉는 그의 모습은 얼핏 보면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대어를 잡을 것 같은 제보였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어서였다. 오피디가 마인드 컨트롤 코리아를 방문했으나 아무런 수확 없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상당히 폐쇄적인 사무실 구조여서 약속되지 않는 방문은 보안요원들을 통과조차 할 수 없었다. 정보산업 업체라 철저한 보안이 생명인 까닭에 불만조차 할 수 없었다. 커피를 쪽쪽 빨아먹던 오피디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광화문 인근 빌딩의 2개 층을 쓰고 있으면 상당한 규모일 텐데, 기자나 일반인들이 방문할 수도 없다는 게 이상하긴 해요. 신문에 광고나 홈페이지 빼놓고는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구요.”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히고 있던 정피디는 책상을 톡톡 치며 말했다. 그가 뭔가를 고민할 때의 습관이었다.


  “오피디, 보안문제가 아니라 아예 접근을 차단한 것은 아닐까? 원천적으로 허용되는 직원들이나 예외적인 사람들 빼놓고는 못 들어가는 거지.”


  “히힛, 그러니까요. 그렇다고 우리가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처럼 비밀스럽게 들어갈 수도 없고요. 난감한데요. 어디 한가한 해커라도 섭외해 볼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작가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두 분 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는데요.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우리 현실은 출입문에 접근도 못하고 있는데요. 히히히.”


  오피디 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개인 프로그램에 관한 상담은 할 수 없고 홈페이지서만 구매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식 자기계발과 자기통제 프로그램을 통한 자기혁신이라는 광고 문구에 이끌린 사람들이 방문했다가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반면 개인용 프로그램의 온라인 이용은 호조를 보인다고 했다. 미국의 최첨단 자기계발 프로그램이라고 하니 성공에 목마른 사람들이 호기심 삼아 구입을 하고 있었다.


   다른 피디들과 작가들이 동네방네 정보를 얻으러 다녔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마인드 컨트롤이 흘린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 정피디 자신도 생각나무를 방문했지만, 생각나무 측에서는 아직까지 연락은 없었다. 그쪽에 가장 큰 기대를 하고 있어서인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순댓국에 마신 막걸리 때문에 속 또한 불편해졌다.


  “그러니까 오피디, 일반적인 시사고발 상황인 경우에는 관련자들이 우리를 불편해하지만 지금 마인드 컨트롤 관계자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거잖아. 우리가 접근할 수도 없고 말이야.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다는 거잖아.”


  “그렇죠, 선배님. 무언가 큰 벽에 부딪힌 것은 분명한데. 이 벽이 전부가 아니라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기 3년 차 최피디 하고 우리 작가들이 국회의원 보좌관들하고 국방부 정보담당 무관들한테도 전화도 돌려보고 찾아가서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들이 더 답답해했다는 겁니다. 무슨 철 지난 음모론을 만들고 있냐고요... 그런 거 알면 자기들한테 알려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답니다. 히히힛. 잘하면 우리 프로가 한국판 음모론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오피디가 자신들의 우스꽝스러운 처지를 말해주자 옆에 있던 최피디와 작가들은 전깃줄의 참새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추리소설 작가이기도 한 김현아 메인 작가가 얼굴을 쏙 내밀어 말했다. 그녀는 119팀의 스토리 보드 작가이자 아이디어 뱅크이기도 했다.


  “사실, 단서 몇 개로 어떤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실체를 분석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범인을 잡는 것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트릭입니다. 작가가 상황 전체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사건과 단서 간의 인과관계를 정교하게 설계도 하고 서브플롯도 넣어서 재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단서 몇 개로 모르는 전모와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니 말도 안 되는 벽에 부딪쳐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건은 소설작법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죠.”


  평소에 말이 없던 김작가가 한번 입을 열자 어깨가 처져있던 여러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추리소설 2권을 집필한 프로작가 이기도 한 그녀의 얘기는 막힘없이 흘러갔다.


  “누군가 이 상황을 통제하고는 있다는 게 사실이잖아요. 문제는 그 누군가를 우리는 모른다는 거죠. 저번에 피디님들 얘기할 때 스무고개처럼 말해줄 누군가가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때는 우리가 성급하게 나서서 휘젓고 다닐 때가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영화 속에서도 답답한 상황에서 반드시 귀인이 나타나거든요. 그래야 영화도 스토리도 결말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 약한 고리의 원칙 아시죠? 우리가 쫓고 있는 이 사건에도 분명 약한 고리가 있다는 거죠. 그게 사람인지 아니면 사건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큰 귀인이 될 수 있는 거죠. 만약 어떤 계획이 나쁜 의도를 가진 거라면 반드시 어느 부분에서는 곪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야 사회가 생존하고 잘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나쁜 놈들이 계속 승리하는 것은 배 아프잖아요. 완벽한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 속에만 존재하는 게 맞죠. 어딘가 약한 고리가 곪아터질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 앞에 짠하고 나타나지 않을까요?”


  최근 취재하면서 짜증이 많이 났던 오피디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김작가의 추론에 추임새를 넣었다. 아직까지 정피디는 졸고 있는 모양새로 명상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어디선가 읽은 게 생각나네요. 완벽한 통제는 없다. 그저 서로가 가진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발생하는 착시현상이 통제를 잘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때는 그 비대칭성이 깨질 때를 기다려라..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어디서 읽었더라!”


  오피디의 그럴듯한 독서이력에 김작가가 미소를 보냈다.


  “맞아요. 정보를 통제하는 쪽에서만 보면 그걸 가지지 못한 쪽이 퍼즐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터이지만... 그쪽 또한 정보나 퍼즐 조작을 찾는 사람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디 부분을 맞추고 있는지 계속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마치 바둑을 둘 때 상대방의 수가 읽히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잖아요. 결국 정석이 아닌 이상 몇 개의 포석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수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죠. 누가 먼저 상대의 대마를 먼저 잡을까, 늘 그게 문제죠!”


  시사다큐 프로그램 전문 피디를 희망하는 최피디는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최근의 취재 결과는 그의 희망과 달리 꽤나 불만스러웠다. 이놈의 대한민국에 무슨 비밀이 그리 많고 숨길게 많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흔드는 걸 보고는 잠시 회의가 들곤 했지만.... 오늘 김작가의 얘기를 듣고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 같았다. 역시나 작가적 상상력이 누군가의 가슴에 열정이라는 불씨를 던져놓았다. 소름이 돋아난 자신의 팔뚝을 만지며 말했다.


  “오! 그러니까 메인작가님 말씀은 우리가 결국 바둑이나 그런 숨겨진 수싸움을 해야 된다는 것이고, 지금도 그걸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갑자기 오싹한데요. 스릴과 서스펜스는 이럴 때 쓰는 용어잖아요. 우리 프로가 시사다큐에서 정치스릴러로 장르를 바꾸고 있네요.”


  다이내믹해 보이는 방송국 생활도 3년 차가 고비였다. 김작가는 최근 들어 다소 지쳐 보이는 최피디가 장르 변화 이야기를 하자 옳거니 맞장구를 쳐주며 말했다.


  “최피디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는 지금 영화 속 한 장면 속에 살고 있어요. 나중에 우리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도 있잖아요. 호호호. 그리고 정피디님 말씀대로 마인드 컨트롤이나 그쪽 정보가 새나가는 걸 두려워하는 쪽에서는 통제하면서도 상대방의 수를 읽으려고 노력하겠죠. 여러 가지 수단을 써가면서요. 제작국장님을 통해서 내려온 펀치가 그런 수단의 하나에 속하겠죠. 아마도요....”  


  가만히 턱을 괴고 멍 때리던 정피디는 김작가의 확신에 찬 얘기를 듣다가 느닷없이 일어나서 박수를 쳐댔다. 주위 사람들은 정피디가 꿈을 꾸다가 깬 게 아닌지 잠시 우려했다. 나눠 마신 막걸리 세병에 취할 위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막걸리 때문에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있던 그에게 김작가의 추리 소설적 추론이 갑자기 치솟는 열정을 주었던 것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때를 기다릴 힘과 또 다른 예술적 영감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굵은 주먹을 위로 내지르며 말했다.


  “맞아, 우리 메인작가님 얘기가 맞아. 철벽방어를 하는 놈들을 무리하게 우리가 접근해서는 우리만 된통 당하고 힘들어질 수도 있어. 이럴 때는 저들이 약점을 보이거나 우리를 도와주는 의인이 나올 때까지 잠깐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어때 오피디, 그렇지 않겠어?”


  오피디는 부담스러운 큰 바위 얼굴이 자신을 돌아보며 묻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렇죠. 시간이 우리 편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은 계획이죠.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기회가 오겠죠. 하하하.”


  시간은 이미 6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고, 온갖 대화에 모두가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눈치 빠른 최피디와 다른 여러 작가들까지 합세해서 박수를 치고 함께 외쳤다.


  “우리는 기다린다.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 하하하.”


  “야야! 뭔 놈의 회의하다가 정의까지 다 나오고. 답답하니 요 앞 호프집으로 회식이나 하러 가자고!”


  “그렇죠. 요럴 때 회식이 필요한 거죠. 골뱅이소면에 치킨, 생맥주면 우리가 무얼 못하겠습니까. 하하하.”


  정피디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막내 작가는 급히 호프집에 전화를 걸어 세 테이블을 예약했다. “10분 뒤에 갈게요.”라는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멤버들은 회의실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10분 명사 초대석. 시청률이 15%대에 가까운 저녁 8시 뉴스에서 진행되는 대표적인 코너로 오늘은 생각나무 주식회사의 안단태 대표가 출연했다. 이 시간은 앵커가 세 가지를 묻고 출연자가 그에 답하는 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진행된다. 10분을 넘지 않게 시청자에게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게 최고의 전문가들만 출연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 달에 한 번만 진행되기 때문에 여기에 초대받고자 하는 이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이 방송국의 스타앵커로 유명한 손명석 앵커가 차분하게 말했다.


  “네, 오늘은 최근 엄청난 발전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AI발전상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한국이 낳은 천재 공학자 안단태 대표를 모셔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안대표님은 컴퓨터 공학자이자 뇌과학자로 현재 생각나무 주식회사의 대표입니다. 최근 생각나무 주식회사는 AI를 기반으로 하는 생각의 씨앗을 통해 우리사회에 선순환의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각나무는 대학생들이 취업하고픈 제1순위 회사입니다. 안단태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깔끔한 감색 양복에 노타이의 안단태 대표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생각나무 주식회사의 안단태 대표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안대표님. 저희 프로그램의 시간관계상 거두절미하고 딱 세 가지만 질문드리겠습니다.”


  TV화면이 앵커 단독 샷에서 앵커와 안대표와 투 샷으로 바뀌면서 첫 번째 질문이 나왔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최근 AI나 AGI(범용인공지능, 인간과 같거나 그 이상의 지능을 구현하는 시스템)의 발달 속도가 무섭습니다. 세계적 추세에 비추어볼 때 언제쯤 인간과 유사한 형태로 구현될 수 있을까요?”


  “네, 현재의 기술발전 속도로 볼 때 챗 gpt를 개발한 오픈 AI, 구글 딥마인드, 앤트로픽, 엔비디아 등 빅테크 기업이 모두 2028년 이전까지 AGI에 도달할 예정입니다. 저희 생각나무는 이보다는 빠른 시간 안에 도달 예정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빅테크 업체들은 AI뿐만 아니라 로봇이나 그 밖의 정보시스템 구축에도 사업이 확장되어 있어서 저희처럼 AI시스템에 집중하는 스몰테크 업체에 비해 살짝 느릴 수도 있습니다. AI기술의 빠른 발전이 인간의 편리성에도 큰 도움을 주겠지만 한편으로는 휴머노이드 로봇 등의 개발과 맞물리면서 인간을 대체하는 분야가 많아질 겁니다. 지금도 경제 환경이 좋지 않은데, 로봇과 고용경쟁을 하게 된다면 썩 좋지 않은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네, 염려스러운 상황이 예상되는군요. 다음은 두 번째 질문입니다. AI와 인간의 생존방향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류들이 많습니다. 전문가들 중에는 인간멸종이라는 무서운 시나리오까지도 얘기를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I나 AGI의 통제능력 상실의 위험은 예상가능성이 아닌 현재적 문제입니다. 늘 상존하기 때문에 AI기업에 대한 범정부적 통제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답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빅테크 기업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에 과도한 경쟁이 분별없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무시 못 합니다. 자칫하면 AGI의 과도한 발달이 인간을 앵무새와 같은 존재로 만들 재앙 같은 위험이 상존합니다. 때문에 인간에게 해악을 끼칠 정도의 기술개발이나 발전은 통제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통제 불가능한 임계점을 넘어서기 전에 세계 각국이 나서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기술개발을 통제해야 할 시기입니다. 통합적 AI 감독기관과 긴급규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컴퓨터와 시스템 성능을 제한하는 방식을 우리 모두에게 제안합니다.”


  “아 그러니까 최근 유럽에서는 AI 발전 속도나 통제권에 관한 규제가 법적으로 제도화되고 있는 게 이 문제이군요. 흔히 SF영화에서나 봤던 그런 불편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음은 마지막 세 번째 질문입니다. 최근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AI나 AI 환경시스템에 대해 상당히 진일보한 움직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추진과정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이나 문제점은 없을까요?”


  “예, 저는 문제점보다는 아쉬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의 AI기술이나 컴퓨터시스템 기반환경은 세계적입니다. 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실제로 유능한 공학자들과 연구자들이 많습니다.(웃음) 실제 미국의 빅테크 업체에서도 우리나라의 여러 인재들을 탐내고 있구요. 저희 회사만 해도 그쪽 헤드헌터 업체에서 계속 연락이 오는 직원들이 여러분 계시거든요. 우리 정부나 기업들이 이렇게 훌륭한 인재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 비용이 많이 드는 미국의 빅테크 시스템을 이용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특별히 우리가 몰라야 할 그런 비밀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우리 기업과 우리 공학자들이 만든 토종 AI 환경을 활용해서 한국의 미래를 더 밝게 할 수 있을 텐데요. 그 점은 많이 아쉽습니다. 혹시 국회나 정부관계자께서 이 방송을 보신다면 눈을 크게 뜨고 신중하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가만히 안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던 손 앵커가 자신의 넥타이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네, 통상 세 가지 질문만 드리는 게 저희 프로그램의 관행이지만 오늘은 앵커 권한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AI를 활용한 기술진보 중에는 우리 인간사회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안대표님께서는 그 예를 하나씩 들어주실 수 있으시나요?”


  안대표도 손앵커의 마지막 질문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네, 우리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기술의 진보와 성과는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그 전제에만 충실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인간에게 가장 이로운 기술진보는 역시나 지식결합과 생활의 편리성을 위한 보조적 역할입니다. 각종 첨단기기 속에 들어있는 AI기술은 전형적인 생산 활동이나 의료분야, 위험한 직역의 업무처리 등에서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인간능력의 한계를 줄인다는 측면에서 최고의 순기능이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소소한 일상에서도 우리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다양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죠. 앞으로 각종 휴머노이드의 활약이 인간생활을 이롭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손 앵커는 안태표의 발언을 놓칠세라 꼼꼼히 메모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가장 해로울 수 있는 기술성과는 AI 기술을 활용해서 조직이나 인간을 통제하거나 인간의 심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AI기술이 지식이나 정보를 결합하고 로봇 등을 통해 뭔가를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 인간의 심리나 정신을 통제하거나 억압할 수도 있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훨씬 정교해진 AI시스템은 그것을 만든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어느 조직이나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통제할 수도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의도가 자칫하면 아까 말씀드린 AI에 대한 인간의 통제능력 상실과 결부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조지오웰이 그의 소설 1984에서 말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우리 현실에 데려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AI기술과 전체주의의 결합이 가장 우려됩니다. 이런 스토리를 그린 SF영화가 제작되는 걸 보면 그 가능성은 늘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AI 개발자들의 의식도 문제지만, 그걸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의 나쁜 의도는 더 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얼핏 들어보면 좋은 문장 같지만, 이게 영원한 권력 유지를 위한 당의 표어였거든요. 그러니까 빅브라더를 활용해서 인간을 통제하고 역사를 위조한 독재 권력의 욕망이었습니다. 문학 속의 현실이 우리에게 나타나서는 절대안 될 것입니다.”


  “아, 안대표님.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정말 잘 들었습니다. 즉흥적이었지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해주는 부분도 있네요. 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잠시 시간이 오버되었습니다. 오늘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저희 뉴스를 빛내주신 생각나무의 안단태 대표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네, 다음 뉴스는 국회에 제출된 추가경정 예산 이야기입니다. 대통령실과 국방부에서 새로운 병영문화 만들기와 한미연합방어체계 고도화를 위한 명목으로 연간 국방예산의 10%에 달하는 예산을 추가적으로 요구했다는 소식입니다. 국회에 나가있는 정경태 기자가 자세한 소식 전해드립니다. 정기자...”


  오늘 저녁 8시 뉴스의 이 코너는 여러 곳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시청하고 있었다. 여의도의 어느 일식집에서 노덕술 의원도, 상암동의 호프집에서 정민태 피디팀도, 삼성동의 어느 고기 집에서 생각나무의 구성원들도, 광화문 모처에서 마인드컨트롤 코리아 관계자들도, 한남동 일대에서 정권의 핵심 멤버들도 자신들만의 시공간에서 뉴스를 쳐다봤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안대표의 답변에서 다양한 뿌리를 가진 입체적인 생각으로 퍼져나갔다. 누군가에게는 색다른 호기심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동기부여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불편함으로 자라났다. 세상의 크고 작은 갈등은 이렇듯 누군가의 말과 문장에서 시작된다.      



커버 사진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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