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호수가의 한 카페. 멀리 김포 쪽에서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구름과 지평선이 그림처럼 펼쳐져있었다. 호수가 훤히 내다보이는 창문 쪽에서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리던 정민태의 스마트폰이 으르렁거렸다. 슬쩍 보니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사회복지 사각지대를 고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모처럼 휴가를 내고 쉬고 있던 중이었다. 정민태는 추적탐사 119 TV프로그램의 메인 피디다.
‘뭐지... 이거는... 무슨 내용이지.... 이게 누구야. 음... 모르는 사람이 뭘 보내고 말이야. 스팸 아니면 보이스 피싱? 저번에 어떤 미친놈이 보낸 협박장인가? 나한테도 이런 게 오네...’
기자들이 기레기라는 오명으로 불리는 시대지만, 그래도 참 언론인의 사명감을 가지고 취재에 임하는 이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추적탐사 프로그램의 피디인 정민태는 입사초기부터 다큐프로그램과 사회고발 프로그램에서 주로 일하다가 추적탐사 119 메인피디가 된 지 3년이 지났다. 예능방송은 철저히 거절했다. 입사동기나 선후배 중에는 농촌마을 하루 세끼, 죽어도 패키지여행 프로그램 등으로 큰돈을 번 이들도 있었지만, 정피디는 꾸준히 자신이 원하는 한길로만 걸었다. 그런 까닭에 집에서는 늘 비교당하며 타박을 받았다.
몇 개월 전에 내보낸 ‘한국사회의 고통과 치유’라는 심층 기획프로가 시청자들이 선정하는 올해의 프로그램 대상을 받았다. 바다에서 길거리에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일상을 추적하면서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사실 그대로 담아냈다는 게 수상 이유였다. 그 방송의 끝 장면은 생각나무 주식회사에서 개최한 치유 테라피에 관한 것이었다. AI를 기반으로 한 생각나무에서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치유의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치유테라피는 유가족들을 다시 건강한 일상으로 복귀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생각나무가 제공한 테라피는 유가족들은 물론 그런 유사한 고통을 겪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에게 무료로 전달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했다. 방송 이후 해당 방송국과 재단법인 공감에서는 생각나무에 감사패와 선한 기업이라는 명패까지 전달했다.
최근에 방송된 고발프로는 ‘사회복지 예산 남용과 사각지대 방치’에 관한 내용으로 장장 3개월 정도를 준비해서 크게 한방 터트린 거였다. 그 방송 때문에 보건복지부장관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담당국장이 보직 해임되었다. 담당 공무원과 이권단체 관계자는 몇 명 구속될 정도로 파격적인 보도였다.
때때로 정피디를 협박하거나 돈으로 회유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두고 보자는 놈 별 볼일 없다는 게 그의 신조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해병대 특수수색대 출신에다 다부진 체구가 만만치 않았다. 같은 프로에서 함께 일하는 3명의 후배 피디와 5명의 작가들도 정피디가 얼굴이 굳어지면 일단 피하고 본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얼음이 반쯤 녹고 있었다. 커피를 시원스레 한 모금하고는 문자를 열었다.
추적탐사 119 정민태 피디님,
혹시 ‘앵무새 프로젝트’를 아시나요? ‘텔레스크린’도 모르시겠죠...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미국 정부와 우리나라에 극소수만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나라와 국민들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이 크다는 겁니다.
한번 추적해보시면 좋은 일 있을 겁니다.
최근에 설립된 ‘마인드 컨트롤 코리아’라는 AI 회사를 살펴보세요.
계제가 되면 또 연락하겠습니다. 단 조심하시고, 무운을 빌겠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인사가 보낸 문자였다. 보통 신분을 밝히지 않는 제보는 신뢰성이 낮은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건은 묘하게 정피디의 동물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비록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분명 정치나 정보 분야 쪽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보였다. 일반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추적탐사 119는 시사고발 프로그램이다 보니 제보는 늘 넘쳐났다. 담당 피디들에게나 방송국 홈페이지에 매일 새로운 건수가 접수되었다. 제법 의미 있는 건수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감정풀이나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많았다. 제작시간과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사안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지... 누가 장난하는 건가? 마인드 컨트롤, 앵무새 프로젝트는 뭐란 말인가! 허허’
정피디가 받은 단어는 무슨 말 못 할 스토리의 퍼즐조각처럼 보였다. 아니면 어딘가의 핵심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비밀사항일까? 요새 음모론이 유행한다는데 그런 걸까? 슬며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허리를 곧게 펴고는 핸드폰에 두 단어를 검색했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결과물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결국 문제는 저 단어 몇 개로는 도무지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아닌가. 통상 제보는 과거에 일어났거나 현재진행 중인 사실을 전제로 하다 보니 확인이나 추적이 쉽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수수께끼 같은 낱말 몇 개를 주고 추리를 하는 것은 어쩌면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다루기는 어려운 분야였다.
그럼에도 탐사 프로그램 피디인 자신에게 이런 귀띔을 해준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피디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동안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소신이 없다거나 타협적인 인물로 비춰졌다면 절대로 자신에게 이런 제보는 오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틀림없이 큰 건이다. 그의 동물적 본능이 깊은 곳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안테나를 세웠다.
정피디는 제보의 진실성을 판단하기 위해 가장 먼저 알고 있는 몇몇 정치권 인사들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그들도 저런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최근의 정부의 동향에 대해서 더더욱 잘 모른다는 답변이 주류였다. 자신들도 언론에 보도되거나 사전에 통지된 정보 이상은 모른다는 거였다. 소통부재와 난맥으로 유명한 이 정부 들어서서 국가정보의 흐름이 그렇다는 거였다. 보통의 정부계획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것이라 할지라도 세세한 사항까지는 몰라도 그 형식정도는 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하물며 일반 국정운영이나 국가정책에 관련된 사안의 경우 이렇게까지 이상한 프로젝트로 이름까지 붙여가며 진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제보는 “앵무새 프로젝트”라는 이름부터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왜 앵무새를 붙였을까? 미국 정부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를 바로 확인할 길은 없다. 미국 정부 또한 국가안보라는 이유로 언론에 노출하지 않은 비밀 계획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보의 뉘앙스로 보건대, 어떤 계획에 대한 한미 정부 간 약속이 있었고, 그 이행을 위해 미국의 기업체가 뭔가를 실행한다는 내용으로 보였다. 공식적으로 진행하기에는 뭔가 불편한 구석이 있거나 숨겨야 할 이유가 있는 계획이 아닐까? 정피디는 자신의 메모장에 “왜”와 “?”를 크게 썼다. 자신의 꿀 같은 휴가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내 한글파일을 열었다. 자신의 팀이 할일은 "누가, 어떻게'를 알아내는것이다.
추적탐사 119 제작팀의 회의실. 정피디는 제작국에 예비 기획서를 제출하고 팀원들을 소집했다. 본격적인 기획서를 작성하기 전 기획회의를 통해 각자 역할을 분담해서 자료수집절차에 들어갔다. 이 프로그램은 그동안 사회적 금기와 문제점을 치밀하게 파고들어 각종 제도개선과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킨 명예와 보람이 있었다. 제작 과정에서는 온갖 협박과 회유 고소고발이 있었지만 모두 이겨내고 한국사회의 소금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119의 기획서가 제출되면 방송국 수뇌부에서도 태클을 건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피디들과 작가들이 여러 방면으로 앵무새 프로젝트에 대한 구글링과 정보검색을 해봤지만 별 신통한 내용은 없었다. 국회 보좌관들이나 각 언론사의 정부출입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려봤지만, 그들도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고래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만, 국방부를 출입하는 기자들 사이에서는 인간병기 사태 이후로 불편한 기류가 감돈다고 했다. 국방부 각 실국의 직원들과 군인들 사이에서도 업무에 대해 입단속을 단단히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실과 국방부 기자실에서는 대변인을 통한 극히 정례적인 브리핑 외에는 일절 소통이 없다고 했다.
다음은 마인드컨트롤 코리아였다. 이 회사에 관련된 사항은 법인등기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자본금은 50억 원. 사업목적은 AI 관련 정보화 사업, 로봇 제작 등. 서울중앙지방법원 등기국에서 설립등기를 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대표이사는 미국 국적의 외국인 패트릭 로이드였다. 세 명의 사내이사 중 두 사람은 미국인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한국인이었다. 이름은 한상훈... ‘어라! 이 사람이 누구지. 어디서 들어본 거는 같은데... 음. 한국계 미국인이겠지.’ 정피디는 이사들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본금이나 회사본점의 위치, 이사들 정보 외에 법인등기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었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마인드컨트롤 코리아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였다.
최근에 일간신문에 1면 광고로 내보낸 것도 확인했지만,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개인의 감정조절이나 태도를 개선한다는 그런 내용으로 보였다. 언론 채널을 통해 본사인 미국 측의 마인드 컨트롤을 검색해 보니 꽤나 유명한 AI 빅테크 업체로 나왔다. 미국 정부와 관련된 프로젝트도 몇 개를 진행해서 급성장한 기업으로 평가되었다. 미국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업체와 긴밀한 관계가 있고, 최근에서는 로보틱스와 자율주행차에 이르기까지 정보화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정피디와 팀원들은 몇 날 며칠을 여러 방면으로 앵무새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봤지만 특별한 소득이 없었다. 정피디는 대한당 사무처에 당원교육 관련 사업에 대해 물어봤지만 역시나 앵무새 같은 답변만 돌아왔다. 4년 차 피디인 오정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텔레스크린에 대한 검색 결과를 가져왔다.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갔는지 머리상태가 엉망이었다.
“정선배님, 저기 말씀하신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텔레스크린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리는데요.”
정피디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시간만 보내던 차에 후배 피디가 한 말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한 마리 곰처럼 의자에 길게 기대어 있다가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우고 후배의 말에 집중했다. 두 손으로 커피 잔을 그러쥐었다.
“그러니까, 텔레스크린이란 단어가 텔레비전의 화면이라는 의미거든요. 그런데 이 단어가 어디에 쓰였는지 아세요?”
성질 급한 정피디가 이마에 큰 갈매기를 그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 하자, 후배인 오피디는 즉시 웃음기를 거두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그 유명한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서 당원들을 감시하기 위에 집에 설치한 감시장비라는 겁니다. 그 소설에서 가공의 나라인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독재당이 나오잖아요. 거기에서 당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스크린 장비인 거죠. 당의 입장에서는 모든 당원들의 가정집이 하나의 거대한 파놉티콘이나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파놉티콘이라는 말을 듣자 그 순간 정피디의 머릿속에서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지, 파놉티콘은 벤담이 고안한 감옥이잖아. 개념적으로 감시와 통제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감시와 통제 그리고 정보사회라... 거기에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 음”
오피디는 이제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느냐는 눈초리로 정피디를 쏘아보며 더 자세하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커다란 정피디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오피디는 부담스러운지 의식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규율사회에 맞는 감시시스템이라면, 정보 파놉티콘은 통제사회에 맞는 감시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죠. 실제로 벤담의 파놉티콘은 감옥 같은 시설만 전제로 하지 않고 군대나 병원 학교 공장 등 광범위하게 확대될 수 있는 거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파놉티콘은 이상적인 사회의 축소판이자 이상향이 될 수 있는 거죠. 이걸 만약에 인공지능 컴퓨터가 꿈꾼다면, 그리고 거기에 특정한 인간이 감시와 통제를 명령한다면... 얼마든지 효율적인 통제수단으로 바뀔 수 있는 게 지금의 정보사회죠.”
정피디는 오피디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야! 이 자식 맨날 술만 마시고 게임만 늘상 하는 줄 알았더니만... 나름 쓸모는 있네. 허허’ 오피디가 계속 얘기하도록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동의를 표했다.
“하하하. 성질 한번 급하시네! 놀라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우리나라말로 마인드컨트롤의 전 상호가 ‘스마트 텔레스크린’이라는 상호였어요. 상호변경 시점을 살펴봤더니 미국 정부와 모종의 프로젝트를 하다가 언론에서 까발림을 당한 후 회사이름을 바꾼 거 같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정피디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니까 니말은 마인드컨트롤이 스마트 텔레스크린이었고. 마인드인가 이 회사는 정보 파놉티콘을 꿈꾸는 그런 회사일수도 있다 이런 말이지. 그것도 최첨단 AI를 도구로 해서 말이지. 그런데 그런 회사가 왜 한국에 와서 문제가 되는 거지?”
“그러게요... 흐흐흐. 그걸 알아야 되는데. 이 친구들이 한국에서 무슨 장사를 할까요? 무엇을 팔고 싶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요?”
“자... 잠깐만, 생각해 보면 이 회사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면 되는데... 그런데, 오피디. 우리가 지금 바보 같은 질문을 서로 주고받는 거 알지? 하하하. 초등생들이 하는 스무고개 같은 추리를 하고 있는 거잖아.”
“선배님, 그치만요. 스무고개를 무시하면 안 되죠. 계속 무언가를 집중적으로 힌트를 얻어서 묻다 보면 감춰진 단어나 비밀이 드러날 수밖에 없잖아요. 결국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묻고 시작해야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패를 볼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지금도요.”
정피디는 오피디의 장난기 넘치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스무고개가 넘어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문제가 아닐까? 어쩌면 몇 번의 예리한 질문을 던지면 쉽게도 해결하는 게 스무고개의 매력이잖아. 질문을 잘하는 거...”
“맞습니다.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오셨군요. 우리가 물어야 하는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방금 전에 했던 거잖아요.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회사가 왜 한국에 왔을까? 한국에서 무엇을 혹은 어떤 사업을 할까?.... 를 묻는 게 가장 첫 번째 질문이어야 하죠.”
“그런데 스무고개는 애써 숨기는 사람과 묻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숨기는 사람은 묻는 사람의 질문에 뭔가 답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누구에게 묻지? 그게 중요한 문제네. 다시 원점인가! 무슨 개그 프로도 아니고....”
“음, 그거는 선배님이 받으신 문자 속에 단서가 있잖아요. 우리나라의 소수라면 누구를 말하겠어요. 여당인 대한당, 국방부, 국회 국방위원회 등등등. 여기가 질문에 답을 해줘야 하는 상대가 아닐까요? 아무도 답을 해줄 것 같지 않지만...”
“꼭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봐야겠지. 그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으면 되는데... 대한당이나 국방부 사람들 아무나 잡고 물어보면 대답해 주려나... 미친놈 소리 듣거나 말도 못 붙이게 하지 않을까... 헤헤헤”
“그렇겠죠. 그 안에 있어도 이런 비밀 같은 거를 많은 사람들이 아는 거는 아닐 테고, 극히 소수만 아는 그런 거겠죠. 다수가 알 정도면 이미 언론에 기사화돼서 전 국민이 알겠죠. 결국은 대답해 줄 만한 극소수가 누구인가를 찾아야 하는데... 흠. 다시 말하면, 선배님께 이런 문자를 보낸 사람이 그 극소수에 포함되겠죠. 아니면 그런 사람을 알고 있거나요.”
정피디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오피디를 바라봤다. 다시 생각해 보니 오피디는 쓸모가 많은 친구였다. 오피디의 그럴듯한 추리에 정피디는 누가 문자를 보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발신 전화번호를 추적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테고. 대포폰이거나 추적이 안 되는 것일 테니까. 정치스릴러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이런 때 뛰어난 기지를 발휘해서 상대방을 찾아내던데... 옆에서 찰떡같이 도와주는 천재 해커들도 존재하고.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망망대해에서 니모 같은 흰동가리 물고기 잡기나 한강에 빠진 바늘 하나 찾기와 같았다. 영화와 현실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수는 없잖아. 괜히 취재 소문나면 꼬리를 감추는 역효과가 있잖아. 그렇다면 저기 그 회사 있잖아. 마인드 컨트롤 코리안가... 오피디가 그쪽부터 한번 접촉해 봐. 실마리를 찾다 보면 무언가 잡히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도 국회 쪽이나 국방부 쪽에 다시 한번 알아볼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 회사가 광화문 쪽에 있다고 하니까. 방송 취재라는 목적을 숨기고 한번 방문해 보겠습니다. 작가 한 명이랑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정피디는 시커먼 물속에 움직이는 대어가 보일 듯 말 듯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입질을 받게 할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문자에 들어있던 AI란 단어가 떠올랐다. 텔레스크린, 마인트 컨트롤, AI... 그래, 우리가 모르는 분야를 탐색하는 거는 분명 문제가 있지. 그렇다면 AI 관련해서는 누구를 접촉하는 게 좋을까?... 자신의 머리를 콕콕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 이런 바보가 있나. 민수경 팀장님. 마케팅업계에서 마당발로 유명한 생각나무의 민팀장님. 그리고 천재 공학자라는 안단태 대표님이 있잖아. 그렇지 일단은 민팀장님한테 연락을 해서 알아보면 뭔가 질문거리가 풀려나가겠는데... 그때 우리가 생각나무 본사를 방문해서 취재했을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지... 오케이.’
정피디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민수경 팀장은 광고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카피라이터 출신 기획자였다. 광고 카피 히트 제조기로는 물론 감각 있는 영상제작으로 방송사 관계자들과도 인맥이 상당했다. 정피디도 업무 때문에 몇 번의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정피디는 빠른 손놀림으로 자신의 폰 주소록에서 민수경 팀장을 검색했다.
다음날 오후 4시. 민팀장은 추적탐사 119 피디인 정민태를 안대표의 방으로 안내했다. 어제 오후 정피디는 민팀장에게 이런저런 사연을 얘기한 후 국내 최고의 AI 권위자인 안대표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느냐는 부탁을 해왔다. 그렇게 잡힌 일정이 오늘이었다.
안대표의 방에 처음 들어와 본 정피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큰 화면의 다양한 PC와 벽에 있는 더 큰 화면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기기들 때문이었다. 방송국에도 각종 최첨단 방송장비와 컴퓨터 시설이 있지만 역시 인공지능을 다루는 회사의 대표 사무실은 그 환경부터 달랐다. 큰 창밖으로는 선정릉이 훤히 내다보였다. 반갑게 웃으며 맞이하는 안대표에게 정피디는 명함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추적탐사 119 피디 정민태입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큰 영광입니다. 저번에 1층에서 행사할 때는 촬영 때문에 먼발치에서만 뵙는데, 오늘은 조언을 구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 정피디님,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저번에 TV에서 저희 생각나무를 잘 광고해 주셔서 너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시사고발 프로그램이라 혹시나 저희가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러나 싶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 유명한 119 프로에서 훈훈한 얘기가 나올 줄은요..... 하하하.”
“그거야 저희 프로그램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내보내고 거기에 대한 가치판단은 시청자들이 하도록 하고 있어서... 사실 결과에 대한 예측은 하지 않거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죠. 피디님 프로에서 방송된 내용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켜서 타격을 입거나 명예를 얻거나 둘 중 하나잖아요. 누군가에게는 소금 같은 역할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공감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은 쉽지 않잖아요.”
서로 마음의 결이 잘 맞았는지 대화의 방향이 유쾌하게 흘러갔다. 함께 온 민팀장도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표님, 그때 우리 생각나무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기업으로 소문이 나서 사회적 인식이 좋아진 것은 물론 매출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었거든요. 광고도 그렇지만 시사 프로그램의 영향력도 폭발력이 꽤 크다는 걸 느꼈습니다. 주말 드라마도 아니고 시청률 23%는 어마어마한 거잖아요. 호호호.”
정피디도 거듭 계속되는 칭찬에 고무된 목소리로 톤을 높였다.
“그렇죠. 통상 시사프로그램이 2~3%대에 많이 머물거든요. 잘 나와야 6~7% 나오면 대박 성공인데... 생각나무 주식회사가 나간 그때는 23%가 나와서 저희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표출되지 못한 고통과 억울함이 그런 숫자로 나오지 않았을까 싶네요...”
정피디는 안대표와 민팀장에게 자신이 찾아온 내막을 자세하게 얘기했다. 막막한 상황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풀만한 영감을 찾기 위해서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궁금한 것은 현재 AI의 발전상황과 그러한 상황이 불러오는 불안한 미래를 전문가로부터 듣기 해서라고 했다. 목소리 톤을 조금 낮춰서 최근에 자신에게 보내온 익명의 문자 얘기를 했다.
“저희 팀원들이랑 제보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인터넷도 뒤져보고 정치권 사람들도 만나봤지만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오피디라고 4년 차 후배가 있는데, 그 친구가 꽤나 신박한 추리를 한 게 있어서 뭔가 실마리가 잡힐 듯 말 듯한데 그게 뒤로 연결이 잘 안 됩니다. 허허허.”
정피디는 실없이 웃다가 자신과 오피디가 검색하고 생각해서 알아낸 몇 가지를 짧게 얘기했다. 안대표는 얘기를 듣다가 몇몇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피디님 말씀은 마인드 컨트롤의 예전 상호가 스마트 텔레스크린이었고, 그 회사가 미국에서 뭔가 모종의 프로젝트를 실행했었고, 지금은 한국에서 별도 법인을 설립해서 뭔가를 꾸미는 데 그걸 알 수가 없다. 이거죠?”
정피디는 안대표의 요약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민팀장도 흥미롭다는 듯 한마디를 건넸다.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무슨 영화 속에 나오는 스토리처럼 보이는데요. 007이나 미션임파서블 같은 영화 있잖아요. 정부와 기업이 짜고 무슨 나쁜 계획을 하고 그걸 막으려는 측에서는 엄청난 모험과 위험이 기다리는 그런 스토리....”
민팀장의 영화 스토리 같다는 얘기에 정피디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민팀장님 실제 어떤 사건이나 팩트를 추적하다 보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스토리들이 많아요. 사건 사고 속에는 단순한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 보이지 않는 의도나 음모 비슷한 계획 같은 것들이 숨어있을 때가 있거든요. 방송에서는 그쪽이 포커스가 아니기도 하고 파헤치기도 어렵기도 해서 넘어가기는 하지만... 그래서 저도 그런 소재들이 영화화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늘 해보거든요.”
민팀장도 고개를 젖히며 웃다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요새는 영화나 드라마가 현실을 못 따라온다는 말들이 많죠. 작가들에게 상상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다 보면 기발한 스토리가 보일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구요. 제가 아는 작가들도 최근에는 신문하고 시사프로그램을 잘 뒤적인다고 해요. 판타지도 좋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지 못한 이야기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서. 그러고 보면 기막힌 현실이라는 게 말이 되네요....”
정피디가 뭔가 생각이 난다는 듯 자신의 뒤통수를 치며 말했다.
“아, 그리고 저번에 정보를 수집하면서 보니까. 마인드컨트롤 코리아의 사내이사가 세 명인 데요. 그중 한 명이 한국 사람이었거든요. 한상훈이라고... 그런데 혹시 그 사람이 누군지...”
정피디의 입에서 한상훈이 튀어나오자 안대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그렇고 생각나무 측에서는 마인드컨트롤 코리아에 대해서 깊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마인드컨트롤하고 한상훈이 접점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떠올렸다. 뭔가 더 큰 그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저 멀리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안대표의 표정을 보고 정피디는 당황스럽게 말했다.
“혹시 한상훈 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안대표님.”
“아, 네 그 친구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죠. 피디님도 아시겠지만 최근에 꿈을 판다는 사건의 주인공이죠. 꿈항아리 대표이사요....”
“아하!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듯했거든요. 그 사건은 들어봤어도 어떤 내막인지 자세히 살피지를 않아서... 그 꿈항아린가 하는 회사도 인공지능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을 얼핏 들었는데.... 그 사람이 마인드컨트롤하고 연결된다는 것은..... 뭔가, 흠흠...”
정피디의 얘기를 들으며 안대표는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붉은 노을이 서서히 펼쳐지고 있었다. 선정릉의 소나무 위로 까치 떼가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그 부근에는 까마귀 두 마리도 날아다니며 서로 영역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는 새들이나 인간들이나 모두 중요한 것이다. 정피디가 웃음기를 거두고 안대표에게 물었다.
“안대표님, 그리고 저한테 보내온 문자 속에 앵무새 프로젝트라는 게 있는데. 혹시 그런 프로젝트 들어보셨나요? 그게 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서....”
안대표는 정피디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다시 목에 걸렸다. 어라! 앵무새 프로젝트는.... 그러니까 그날 밤에 노덕술 의원이 택시 문을 열고는 무심코 한 질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질문이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면..... 안대표는 계속되는 정피디의 얘기를 들으며 노의원의 의도를 짐작해 봤다.
“아, 앵무새 프로젝트라고 하셨나요. 음... 저도 얼마 전에 그 단어를 우연히 들어본 적인 있는데, 거기에 대해 알고 있거나 생각해 본 것은 없네요. 아직까지는요....”
“저도 그래서 국방부하고 국회 출입 기자들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봤거든요. 이런 프로젝트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요. 그런데 아무도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그랬거든요. 원래 기자들이 귀신처럼 뭔가를 알아내는 데는 촉이 밝은 사람들인데... 그 친구들이 처음 들어봤다면 없는 내용이거나 아니면 진짜로 보안유지가 잘되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그러겠네요. 어떤 계획이나 그런 것들은 극소수만 알고 있어서 음모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잖아요. 나중에 시간이 흘러 그런 게 있었다고 밝혀지기도 하지만. 아마도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들은 극히 일부이지 않을까요? 저도 정피디님이 말씀하신 얘기를 귀담고 있다가 여기저기 알아봐야겠네요. 그리고 혹시 저녁 시간이 되시면 저하고 민팀장님이랑 함께 저녁식사 하시죠?”
“네, 좋습니다. 그렇잖아도 여쭙고 싶은 얘기들이 많았는데, 식사하면서 하다 보면 더 술술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을까요? 하하하”
안대표는 즉석에서 남도식 반찬을 주로 내놓은 목포 미각이라는 식당에 예약을 했다. 6시 30분에 함께 하기로 했다. 남은 시간 동안은 정피디가 심심해하지 않도록 민팀장에게 회사 여기저기 소개를 부탁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가자 안대표는 동생인 니채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그 속에는 마인드 컨트롤에 관한 자신의 의문과 정피디의 질문이 여러 개 담겨있었다. 한상훈과 앵무새 프로젝트라는 단어도 잊지 않았다. 고팀장에게도 저녁을 함께 하자는 사내 메신저를 보냈다. 3초 뒤에 ‘당근, 오케이요’라는 친밀함이 듬뿍 담긴 답장이 도착했다.
목포미각의 저녁은 시끌벅적했다. 한쪽 구석방으로 안내된 네 사람에게 예약한 요리가 줄이어 나왔다. 홍어삼합과 병어조림, 준치회와 갑오징어 숙회가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정피디는 자신도 취재차 전국의 맛집을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보기 힘들었다며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네 사람의 젓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최근 들어 부쩍 안대표는 사석에서 고팀장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민팀장은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감정을 읽었는지 싱글벙글 웃었다. 막걸리를 곁들인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정피디의 취재과정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사고와 생각나무 맞춤형 테라피 게시판에 오른 더 황당한 주문을 얘기하며 박수치며 웃었다. AI를 둘러싼 최근의 발전상과 미래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고, 오늘 풀지 못한 의문사항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며칠 뒤 니채로부터 안대표에게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마케팅팀에서 올린 분기 매출액 결산보고서를 검토한 뒤여서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매출액이 꾸준하게 우상향으로 늘고 있었다. 최근의 지속적인 성장세로 봐서 개발팀과 마케팅 팀은 계속해서 인원보충이 필요했다.
“형, 이건에 대해 알아봤는데... 전화나 메일로 말하기는 그렇고 조용히 저녁에 만나서 얘기하자고. 가능하면 저번에 같이 맥주 마셨던 고변호사님도 함께 오면 좋고. 법적인 쟁점도 따져볼 게 있어서~~~”
단태는 동생이 보낸 카톡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니, 니채 이 자식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고팀장까지 보자고 그러는 거지. 그러면서도 손은 자연스럽게 메신저로 향했다.
“오늘 저녁 시간 어떠신가요? 가능하면 저녁에 동생 니채랑 저녁식사를 같이 할까요?^^”
고팀장이 사무실 자리에 있는지 즉시 메신저가 깜박거렸다. 안대표는 은근히 한 근반 두 근 반 기대하며 메신저를 열었다.
“어, 대표님. 안 되는데요. 선약이 있는데요...”
안대표의 가슴에 쿵 하고는 무거운 뭔가가 떨어졌다. 순간 짜증 비슷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고팀장에게 뭔가를 따지기에는 명목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시크하게 ‘알았다’ 고만 짧게 답했다. 빌딩과 공원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가 짜증 나게 느껴졌다. 왜 저리들 시끄럽게 사는 건지! 10분 후 다시 메신저가 뚜렷하게 깜박거렸다. 이번에는 누가 보냈을까? 고민정이었다.
“하지만... 방금 선약을 변경해서 다음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녁 가능합니다. 어디로 가실까요.^^”
아까의 쿵과는 다른 무게감으로 다시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걸 안도감이라 해야 할까. 안대표의 가슴에 설명하기 힘든 희열이 계속 밀려왔다. 자신의 감정에게 설명을 요구해야만 했다. 무언가에 빠져 오락가락하는 심정을. 다시 창밖을 봤을 때 까치로 보이는 새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하늘은 한없이 푸르고 새들은 자유로워 보였다.
오후 7시. 한우 등심만 취급한다는 정육식당인 명품등심에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역시나 니채는 호주산 쉬라 와인을 두 병 준비해 왔다. 이 집은 두병까지 콜키지 프리였다. 종업원들이 고기를 구워주지만 오늘은 직접 굽기로 했다. 비밀스런 이야기 때문이었다. 단태는 뜨겁게 달궈진 숯불 위의 석쇠에 고기를 여섯 점만 올리고 굽기 시작했다. 생와사비와 프랑스산 소금까지 준비되어서 살짝 익혀서 찍어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 세 사람은 니채가 절반씩 따른 와인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니채가 고민정을 향해 살갑게 말했다.
“고변호사님, 반갑습니다. 계속 뵙게 되네요.”
고민정도 쑥스러운 분위기를 무릅쓰고 와인 잔을 놓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저번 맥주 집에서는 죄송했어요. 예고도 없이 불쑥 끼어들어서요. 어머, 오늘 와인도 바디감이 상당히 좋은데요. 요 등심이랑 엄청 잘 어울리네요.... 호호호”
몇 번의 신변잡기에 가까운 얘기가 끝나자 니채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는 진지한 얘기를 꺼냈다. 단태는 계속 고기를 여섯 점씩 올려 고기를 구웠다. 고팀장도 와인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고는 귀를 쫑긋이 세웠다.
“제가 마인드 컨트롤 이 회사에 대해서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습니다. 먼저 깜짝 놀란 게,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 회사의 상세 정보가 극소수만 접근 가능한 비밀정보라는 겁니다. 그 소수는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인물들이거든요. 용산이나 우리 회사 짱 정도 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정보라인 쪽에 슬며시 물어봤죠. 다들 모른다고 고개를 절래 절래.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알 수 있는 정보가 빈약해서 미국 쪽에 알고 지내는 친구들의 도움을 조금 받았죠. 일단 마인드 컨트롤 이 회사는 미국 정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오랜 기간 동안 프로젝트를 함께 해온 것 같아요. 그 프로젝트 중 일부는 언론에 노출돼서 곤혹을 치른 적도 있기는 했죠. 문제는 텔레스크린 프로젝트란 게 있어요. 그때 회사 상호가 스마트 텔레스크린이었죠. 텔레스크린이란 것이 조지오웰 소설 1984에 나오는 감시장비란 거는 다들 아시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니채는 두 사람이 고기를 한 점씩 집어 먹고 와인잔을 들고 있는 걸 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부터 7년 전에 미국 정부와 스마트 텔레스크린에서 추진한 계획이거든요. 이 플랜은 당시 첨단 정보화기술을 통해 군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시스템을 개발하려는 것이었죠. 특히 해외 파병부대에서 심리적 동요나 이탈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언론에 노출돼서 문제가 크게 발생한 거죠. 의회 청문회 논란까지 있었지만 잠잠해졌죠. 그때를 지나면서 회사 상호가 마인드 컨트롤로 바뀝니다. 이 회사는 원래부터 정보화기술을 보유하는 업체였는데, 몇 년 전부터 생성형 AI와 로봇까지 그 분야가 확대되었죠. 자기 계발을 중요시하는 미국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통제하는 마인드 컨트롤이 인기가 좋거든요. 실제 이 회사가 미국 내 개인을 상대로 하는 마인드 컨트롤 시장의 38%를 차지할 정도로 잘 나간다는 게 아이러니한 거죠.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계속적으로 정부와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그 인맥이나 경험들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잖아요. 다시금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기술로 뭔가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시도를 한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시겠죠? 고기 타지기 전에 얼른 와인 한잔씩 할까요?”
니채는 목이 마른 지 와인을 쭉 마시고 나서는 안대표가 구워준 고기에 양파를 곁들여 먹었다. 안대표와 고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고기와 와인을 번갈아 먹고 마셨다. 니채는 냅킨으로 쓰윽 입을 닦은 뒤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여기서 앵무새 프로젝트가 탄생합니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금실 좋은 부부를 앵무새에 비유하는데... 서양 쪽에서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캐릭터로 앵무새를 형상화시키는 건가 봐요. 아무튼 이 프로젝트는 텔레스크린 프로젝트의 후속작인 거죠. 어떤 방식인지는 잘 모르지만 최첨단 AI를 활용한 감시와 통제수단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마도 장치개념이 아니라 상황이나 환경 자체를 통제하는 쪽으로 기획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단순한 감시나 통제보다 환경설정은 엄청난 차이가 있죠. 통제당하는 집단이 그 상황을 모른 체 생활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러다 보면 생각이나 행동 자체를 통제 주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낼 수가 있어서 무서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의식을 지배하는 상황까지 이를지도 모릅니다.”
니채의 얘기를 듣던 고팀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바빠진 손짓에 하마터면 와인잔을 엎을 뻔했다. 옆자리의 안대표가 재빠르게 잔을 바로 잡아 다행이었다.
“어머나. 죄송해요... 놀라서. 아니 어떤 기술이기에 사람의 의식이나 행동까지 지배할 수가 있을까요? 제 수준에서는 짐작조차 가질 않네요. 참....”
동생 니채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안대표는 놀란 표정의 고팀장에게 말했다.
“고팀장님, 니채가 말한 거는 충분히 이론적으로 가능한 얘기예요. 지금까지 개발된 AI 수준에서도 저런 환경조성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현재 잘 나가는 빅테크 업체들이 정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그 정도는 예측하고 자신들의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나갈 거예요. 요새 눈에 보이는 챗 gpt를 보고 AI의 발전상황을 간과하면 안 되는 거죠. 아직까지는 인간의 이성이 그런 나쁜 의도를 가지지 않으니까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뿐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빅테크 업체들의 무한경쟁이 굉장히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늘 얘기하거든요. 제가 그쪽으로 나가지 않는 것도 그 한 이유입니다. AI의 수준 자체가 어느 정도의 임계점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인간이 통제하기 힘들 겁니다. 스스로 학습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무언가를 조작하는 힘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인간의 명령어를 무시할 수 있는 자신만의 통제력이 생기는 거죠. 가장 나쁜 시나리오가 간혹 SF영화에 나오는 주제인 인간과 컴퓨터 간의 전쟁이죠. 인간의 종말 시나리오....”
단태의 말에 놀란 고팀장은 안대표의 입에서 인간의 종말 얘기까지 나오자 슬며시 와인잔을 놓았다. 놀란 토끼처럼 물끄러미 두 사람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는 니채는 낄낄대며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고변호사님. 아직은 그런 걱정을 안 하셔도 됩니다. 형 얘기는 가정에 가정을 더한 극단적인 상황을 얘기한 것이구요.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규제 법안을 내놓고 있거든요. 그리고 아직까지는 AI가 인간의 통제 안에 놓여있으니까 너무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히히히. 아니 형은 너무 겁을 주고 그래요. 내가 들어도 섬뜩한 얘기를....”
안대표도 놀란 토끼눈 같은 표정의 고팀장을 보고는 장난기가 동했는지 자신이 한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니채가 얼른 상황을 정리하며 다시 와인 잔을 부딪쳤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부터죠. 마인드 컨트롤이 미국도 아니고 왜 한국에서 앵무새 프로젝트를 준비하는지 이게 문제죠.... 최근 미국의 정치상황이 정부에 썩 호의적이지 않잖아요. 세계 곳곳의 전쟁에 안 끼어든 데가 없고, 국가채무는 계속 늘어나고 빈부격차는 날로 커지고 있고요. 미국 대선이 경제문제나 인종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그런 까닭이죠. 그런 상황에서 이런 비인권적 프로젝트까지 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런 연유로 이 프로젝트를 만든 이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 거 같아요? 만만한 국방 소비지역이자 실험대상 지역을 물색한 거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미국에 아주 우호적인 한국정부와 은밀한 거래를 한 것 같아요. 아직 분단 상황과 좁은 지역에 아주 많은 한미 양국의 군인들이 모여 있잖아요. 무언가 실험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여기까지가 제가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 알아보고 분석한 정보입니다.”
안대표는 짧은 시간 동안에 이런 결론을 낼 수 있는 동생의 정보력과 분석능력에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고팀장도 덩달아서 박수를 쳤다. 그러면서도 다분히 우려 섞인 눈초리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야! 이 형제의 능력은 어디까지가 한계인 거야...’라고 쓰인 고팀장의 눈빛을 외면하고 안대표가 말했다.
“니채, 네 얘기가 아주 정확한 분석 같아. 나도 솔직히 충격을 받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전개되면 우리나라의 상황이 예상하기 힘든 국면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 결국 이런 프로젝트의 마지막 목표는 인간 통제잖아. 그것도 전쟁을 하는 군인들을 상대로 해서 하는 통제는 무엇을 말할까? 그냥 말 잘 듣고 용감한 군인으로 훈련시켜서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없게끔 하는데 궁극의 목적이 있겠지. 겉으로는 일당백의 용맹함을 가진 군인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감정과 판단력을 상실한 군인... 전투만을 위해 만들어진 군인. 생각만 해도 오싹하잖아....”
고팀장은 형제들이 하는 얘기와 그들이 내린 최악의 결론에 다시 한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생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형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서 하는 얘기지만요. 만약에 그런 의도를 가진 프로젝트가 있다면 극비사항이겠네요. 마인드 컨트롤인가 하는 회사도 철저히 위장하고 있을 테고요. 평범한 회사로요.... 한국정부는 말할 것도 없구요.”
안대표와 니채 형제는 고팀장의 얘기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니채는 고기 특수부위 2인분을 추가로 주문하고서는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하게 한마디를 더했다.
“아마도 국방부도 저번 사건을 교훈 삼아서 국내의 연구 기관이나 업체를 통해서 플랜을 추진하지는 않을 거예요. 결국 보안문제 때문에 정권 핵심인사와 국방부 수뇌부 정도만 은밀하게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측 정보라인도 거의 모른 거를 보면 아직 실행단계는 아니고 뭔가를 진행하고 있는 거는 같은데... 사실 최근 정부 부처의 아마추어적 일처리 때문에 곤혹스런 일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부담이 클 겁니다. 형, 이 집 고기 좋네요. 등심도 특수부위도. 고변호사님도 괜찮으시죠?”
고팀장은 니채의 질문에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업무나 일을 떠나서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 안대표의 가족과 마주하니 마음속까지 뜨거워졌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의문이 맴돌고 있어 그중 하나를 얘기했다.
“예, 저도 맛있는데요. 육질도 부드럽고 와인에도 잘 어울리고요...호호호. 예전에 봤던 영화 중에 아주 인상적인 게 하나 있었거든요. 미래세계를 그린 내용인데... 이퀄리브리엄이라고 아시죠? 그 영화에서 프로지움인가 하는 약물로 인간의 감정을 통제하고, 그 투약을 거부하면 전투요원들이 그들을 제거하는 내용이잖아요. 책을 본다든가 예술 활동 같은 것도 할 수도 없구요. 그런데 오늘 대화내용에 대입해 보니 인간의 감정이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처음에는 의도한 주체가 인간일지라도 나중에는 인간을 뛰어넘는 AI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고기와 탄수화물을 골고루 먹기를 좋아하는 안대표는 식사메뉴로 시골된장죽 2인분을 주문했다. 대화를 영화로 연결시키는 고팀장의 흥미에 맞장구를 쳤다.
“아! 이퀄리브리엄. 그 영화 잘 만들어졌죠. 상당히 오래전 영화인데 고팀장님도 보셨네요. 하하. 미남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출연해서 멋진 전사의 모습을 보여줬죠. 맞아요. 그 영화 속 약물이 AI가 만들어낸 통제시스템으로 바뀌어서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겠죠. 그 상상은 허구가 아니죠. 아까도 얘기했듯이 조만간에 실현가능한 빅브라더 시나리오의 일부죠. 다행히 그 영화는 끝이 해피엔딩이어잖아요. 정의로운 사람들이 결국에는 승리하는... 우리의 현실도 그러해야겠죠. 인간이 스스로의 이기심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AI도 통제 하에 둬야 우리가 바라는 해피엔딩이 될 거예요.”
“낄낄낄. 형, 고변호사님. 오늘의 해피엔딩을 이 시골된장죽을 사이좋게 나눠먹으면서 시작할까요? 새콤한 동치미 국물까지 더해서요... 하하하... 아, 깜박 잊고 얘기 못할 뻔했는데. 한상훈 그 친구가 마인드컨트롤코리아 사내이사로 등재되어 있는 거는 좀 더 파봐야 할 것 같아. 그 회사 법률대리인이 법무법인 유신이거든. 그런데 유신의 큰사위가 한상훈의 형 한영훈 검사고.”
고팀장은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지금 대화에서 법무법인 유신하고 한상훈 한영훈 형제까지 등장한다고요... 무슨 이런 영화 같은 전개가 다 있죠? 어쩜, 점점 흥미로워지는데요...”
세 사람은 웃고 마시며 떠들면서도 진지한 얘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안대표는 대한당의 노의원의 심정변화와 추적탐사 119 정민태 피디의 얘기를 두 사람에게 늘어놓았다. 어쩌면 노의원과 119 프로그램의 연결이 결코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심정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눈치 빠른 니채는 형의 눈빛에서 자신이 더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며 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팀장도 자신이 당장 도울 일이 하나 있다며, 오늘 생맥주는 본인이 사겠노라고 얘기해서 형제의 물개박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