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D.P.>
사회의 진보는 대개 누군가의 핏값으로 얻어진다. 안타깝지만, 누군가의 핏값으로 진보하지 못하는 사회도 있다. 탈영병을 잡는 군무이탈체포조 대원들 (d.p. 조)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D.P.>는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탈영한 석봉의 자살로 끝이 난다. 그의 죽음이 충격적인 걸 넘어 참담한 이유는 석봉의 희생으로도 병영 환경이 현저히 나아지지 않을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D.P>가 연일 화제에 오르자, 국방부는 "국방부와 각 군에서는 폭행, 가혹행위 등 병영 부조리를 근절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병영혁신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밝혔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군내 가혹행위, 성폭력 등에 시달리다 끝내 삶을 포기하는 군인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라고 읊조리는 석봉. 마지막 대사는 그의 영혼과 함께 허망하고 허무하게 공중분해된다.
위계가 낳은 폭력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는 전시 상황에 지시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체계로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위기 상황에서 컨트롤타워의 역할은 중요하기에, 수직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지시를 내리고 부하들을 통솔해야 한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위계를 남용하여 평상시에도 부하를 부당하게 괴롭히는 상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황장수와 따까리들처럼 말이다.
제대를 앞둔 황장수 병장은 내무반에 갓 들어온 신참들의 군기를 잡는답시고 그들을 벽에 박힌 못에 밀어 넣는다. 뾰족한 못에 머리를 찧은 후임병의 뒤통수에선 피가 철철 흐른다.
도망갈 곳도, 도움의 손길을 구할 곳도 없는 폐쇄된 내무반에서 부당한 폭력을 당한 석봉은 괴물이 되어갔다. 극 초반, 내무반 선배.동기들이 가하는 조롱과 괴롭힘에도 "아픔 없는 교훈엔 의미가 없지, 인간은 희생 없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라고 말하며 뿜어내던 긍정 에너지는 화를 거듭하며 포동포동하던 볼살과 함께 자취를 감춘다. 가혹행위의 수위는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엎드려뻗치게 한 다음 그 위에 온 힘을 실어 앉는 건 애교다. 대공포 발사쇼가 보고 싶다며 바지를 내려 자위행위를 시키고, 왁싱을 해준답시고 라이터로 음모를 지진다. 석봉은 집요한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분노와 살의를 주체하지 못하고 일촉즉발의 탈영병이 되어버린다. 묻고 싶다. 오타쿠스러운 취향이 적을 무찌르는 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못 살게 구는 것인가?
군 밖에 존재하는 수많은 '황장수'들에게, 잘 사냐?
<D.P.>는 단순히 군대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 이 작품이 환기한 것은 비단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만의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군 입대가 의무인 징병제 국가 대한민국에서 일반 남성이 경험한 군대 문화가 제대 군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에 뿌리를 내렸기에, 위계가 낳은 폭력은 군대 밖에도 존재한다.
나도 드라마를 보는 내내 사회 곳곳에서 만난 또 다른 황장수들이 떠올라 PTSD가 올 뻔했다. 폭력의 디테일은 달랐지만, 그 실루엣은 익숙한 것이었다. 가장 최근에 만난 관PD가 대표적인 '황장수' 모자이크다. 그는 방위 주제에 내 앞에서 온갖 똥군기는 다 잡았더랬다. 1달 동안 웹드라마 제작팀의 막내로 일하고 집으로 돌아 온 내게 부모님은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앞둔 교육생 마냥 군기가 바짝 들었다고 했다. 관PD와 소통할 때는 다-나-까 말투는 기본이요,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할 때는 '님' 호칭을 빼고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일을 잘하면 잘하는 대로 막말, 못하면 또 못하는 대로 폭언. 열심히 하면 오버하지 말라고 하고, 다른 스탭들이랑 잠깐 수다 떨면 놀러왔냐며 호통을 쳤다. 목장갑을 갖다 달라길래 갖다줬더니 '고맙다' '고생한다'라는 말 대신 “꺼져”라는 욕이 돌아왔다. 추위에 떨고 있는 감독에게 따뜻한 차 한 잔 갖다줬더니 칭찬은 못할 망정 왜 꼴깝을 떠냐고 나무랐다. 담배는 혼자서 피우던가, 아니면 흡연자 메이트를 구하던가. 살면서 담배를 입에 대보지도 않은 비흡연자인 나를, 담배 피울때만큼은 애완견 마냥 꼭 데리고 다녀야 했다. 혼자 피우는게 그렇게 싫으면 인형이라도 장만하라고 하고 싶었는데. 한 손으로는 담배를 쥐고, 남은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던 그 새ㄲ.. 잘 사냐 진짜?
"왜 그랬냐 나한테?"
왜 그렇게 못 살게 굴었냐는 석봉의 물음에 황장수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고 답한다. 대개 폭력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따르지 않는다. 아니, 이유가 있어도 피해 당사자가 폭력을 초래했다는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먹이사슬 꼭대기에 서식하는 포식자들이 그저 배가 고파서 약자들을 먹어 해치우는 것처럼, 좀이 쑤셔서 내지는 심심해서 내지는 세상이 좟같아서..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한 가운데서 키워낸 분노를 제3자 (약자)에게 쏟아내야 그들도 좟같은 현실을 견딜 수 있을 테니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황장수도 관PD도 결국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휘둘러야 생을 붙들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원래 가진 게 없는 자들이 내세우기 바쁜 법이다.
안타깝지만, 사회의 부조리는 하루 아침에 뿌리 뽑히지 않는다. 황장수에게 복수하려는 석봉을 뜯어 말리던 호열은 “우리가 바꿀게”라며 그만두라고 회유하지만, 석봉은 “저희 부대에 수통 있지 않습니까. 거기 뭐라고 써있는지 아십니까? 1953(년). 6·25 때 쓰던 거라고….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이라고 답한다. 그렇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황장수와 관PD 같은 인간들은 여전히 어디선가 인류애를 말살하며 지구의 산소를 낭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무책임한 말일 수 있지만, 사회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내면의 힘을 먼저 길러내는 수밖에 없다. 직장 상사가, 군대 상관이 나를 감정 쓰레기통 아니면 벌레보다 못한 인간으로 취급해도 역으로 그들을 ‘불쌍한 인간’이라고 여기며 흘려 넘기는 철통 같은 마음을 길러야 한다.
자존감을 지켜 내는 첫걸음은 권력자들의 시선을 내면화하지 않는 데 있다. 계급, 나이, 경력 등에 따른 위계가 무소불위의 진리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권력이 행사하는 폭력 그 자체보다도 그로 인해 시작되는 자기혐오가 더 지독하다. 관PD의 폭언은 일시적이었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서서히 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었고, ‘실수 투성이인 어리바리’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책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군대나 조직은 떠나면 그만인데, 자기혐오의 굴레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폭력을 다음 세대에 대물림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무의식 속에 남은 폭력의 잔상은 트라우마가 되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복 심리’에 지배 당해 그 억울함과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석봉의 경우 폭력을 행사한 당사자에게) 전가하거나 되갚아주려고 해서는 안된다. 단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어느 사회든 실패를 한다. 우리는 실수를 발판 삼아 성장해나가야 한다. 성장한 사회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폭력을 대물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황장수나 관PD같은 인간들을 재생산해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척결하는 가장 성공적인 전략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