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딸로 산다는 건
우리 엄마는 개신교 목사님이다.
- 3대째 기독교 가정
- 목회자 가정
- 개척 교회
어릴 땐 몰랐다. 위 키워드들로 인해 내가 짊어져야 할 것들과 가정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더 나아가 나의 삶에 미칠 영향들에 대해서.
커가면서 점점 나의 환경적 특수함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고 이게 단순하고 보편적인 부모님의 직업이 아니란 것도 더 깨닫게 되었다.
어릴 적 엄마는 집에 계신 시간과 비례하게 또는 그 이상을 항상 교회에 있으셨다.
자연스럽게 엄마를 따라 나도 교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여름, 겨울방학이면 나는 성경학교에 가는 게 당연하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으며 밤 10시부터 철야예배로 새벽까지 없는 엄마는 너무 당연했고 또 익숙했다.
나에게 있어 교회는 종교생활 그 이상으로서의 삶의 배경이었다. 교회는 곧 또 다른 집이었다.
그게 남들과 다르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건 10대부터였다.
10대 학생 시절이었다.
교회 중고등부에서 한 남학생이 엄마한테 굉장히 아주 굉장히 무례하게 군적이 있었다. 부모 욕은 못 참는다고 여느 자식처럼 쫓아가서 크게 다퉜다.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말했다. 엄마이기 전에 이건 엄마가 목회자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중 하나라고 (사명이란, 기독교에서만 쓰는 용어일지 모르겠지만 역할을 넘어서 더 큰 가치, 주어진 임무 같은 것)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기 전 당했던 채찍질과 고난에 비하면 이건 너무도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라 하셨다.
혼란스러웠다. 나의 부모의 직업은 무엇이길래 쌍욕을 먹어도 그저 묵묵히 사명이라는 걸 감당해야 하는 건지..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받았던 나의 큰 스트레스는 공부 스트레스보단 신앙 스트레스(?)였다. 엄마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나의 신앙심이었다. 그에 반해 나의 동생은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 줬기에 우리 집에서 나는 ‘기도 제목’이자 우리 엄마의 ‘고난의 십자가’ 그 자체였다.
엄마와 대화의 결론은 항상 같았고 서로가 서로를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 공부해서 아주 좋은 곳은 아니지만 적당히 4년제 대학도 가고, 진로도 알아서 척척 결정도 하고 나름 야무지게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나의 부모는 내가 할 수 없는 걸 요구하는 건가.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채울 수 없는 게 그 한 가지인데 나의 부모는 그 한 가지가 필요했다.
그때의 나는 영영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자식이었다.
20대 중반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만난 남자친구도 사귀게 되었다.
어느 날 남자친구 부모님을 만났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평범한 질문을 받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는지 여쭤봐도..?”
“네, 아버지는 이런 일을 하시고 어머니는..”
분명히, 망설였다.
예전과 다르게 대답하는 것에 주저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당혹감을 잊지 못한다. 순간 나도 모르게 주저했고 주저한 이유를 찾고 싶었다.
나는 엄마의 직업이 부끄러운 걸까? 목사라는 건 정말 직업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대답을 하면서 스스로 작아지는 이 느낌은 무엇이며, 대체 왜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혼란스러운 가운데 또렷하게 기억나는 감정은 엄마를 부끄러워했다는 ‘죄책감’이었다.
30대를 지나고 있는 지금이다.
나는 결혼하여 또 다른 가정을 이뤄 물리적인 가정의 독립을 했고 조금 뒤 부모님이 다니던 교회를 떠나서 신앙적으로도 독립을 했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반드시 이뤄 냈어야 했다.
내가 매주 일요일마다 당연하게 교회를 가는 이 행위가 부모님을 만족시켜 드리고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가야 하는 일련의 효도이자 가족 행사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했다.
청소년기와 20대를 거치고 어렵사리 자리 잡은 이 가치관은 정말 내 것이 맞는 걸까, 나는 엄마를 떠나서도 이걸 유지할 수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고 확인해보기 위해 독립이 필요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지금 삶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나의 가족과 부모님을 대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나의 독립된 삶들로부터 안정감을 느끼고 있고 무엇보다 스스로 만들어 가는 신앙관과 교회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있다. 거리두기를 한 탓인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건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건 나와 엄마의 관계가 좋아졌다는거다.
평범한 딸과 부모로 대화하고자 하는 욕심과 마음은 이제 내려놨다. 지금은 그저 나의 부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줬으면 했던 마음처럼 말이다.
엄마는 부모이기 전에 다양한 이유로 목회의 길을 택하셨고 본인의 삶에서 가장 좋고 가장 최우선인 가치를 나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그 동기가 이제는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니 그게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와 내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는지는 더 이상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가장 좋은 걸 주고자 하셨던 동기에 대한 진실함을 그래도 알게 되니 나머지는 부가적으로 치부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처음으로 엄마와 단 둘이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해가 지날수록 여러 방면으로 손이 많이 가게 되는 우리 엄마, 엄마를 볼 때 드는 이 감정은 특별하다.
특별함을 넘어서 너무나 많은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감히 한 단어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확실한 건 엄마와 있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 특별하다.
조만간 운전면허를 따기로 결심했다.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지만 따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건 엄마와 이번 여행이 나에게 엄마를 더 알게 되고, 더 나아가 나를 알게 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더욱 자주 이런 시간을 갖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예전엔 목사님이기 이전에 먼저 나의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면,
지금은 그냥 목사님인 엄마를 더 알고 싶다.
목사님이면서 두 아이의 엄마는 어떤 감정을 갖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여행을 다니며 더 귀 기울여 들어보고 싶다.